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05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5강, 제6강

❦ 제5강: 대상 세계에 대한 탐구(현상-법칙 해석)
감각지(“많이 헤매는 지체들의 혼합”)와 누스에 의한 지의 구분 / 현상과 본질의 구분
“논변으로 판가름하라”
우리가 알아내는 현상 배후의 법칙이라 해도 근본적으로는 ‘이 세계’에 속하는 것이므로 개연성있는 것, 진리닮은 것, 잠정적인 것일 뿐이다.

❦ 제6강: 학문탐구의 방법(‘학의 시원’ 해석)
“탐구의 어떤 길들만이 사유를 위해 있는지”, 즉 우리의 사유의 종류에 대한 탐구
진리, 즉 설득의 길 / 거짓, 즉 배움이 없는 길 / 어떤 길로 가야할지에 관한 사유, 즉 의심하는 학문의 길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이 결코 강제되지 않도록 하라” — 무규정적인 것이 규정되어 있다고 하지 마라, 즉 아직 규정하지 않은 것을 규정된 것이라 하지 말라, 즉 의심을 의심으로 받아들여라.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05

⟪철학 고전 강의⟫ 5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파르메니데스 강의 제5강, 제6강을 묶어서 해설을 하겠다. 제4강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에 관한 정통적인 해석을 이야기했다. 두세계이론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하고 있는 일자, 하나인 것에 대하여 설명했다.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읽을 때에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즉 두 세계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저 너머에 있는 초지성적 대상, 초월적 대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얘기했다.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알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그래서 19세기 오면 수많은 형이상학자들이 초월적 대상에 대해서 따지는데 그 출발점이 칸트이다. 칸트는 초월적 이념에 대한 가상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오늘 5강과 6강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현상 법칙해서, 학의 시원 해석이다. 간략해서 핵심을 짚어서 얘기하겠다. 파르메니데스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자들에게 핵심적인 문제, 당면 문제가 무엇인가. 우리가 눈 앞에 보고 있는 여러가지 현상들은 늘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게 늘 문제다. 형이상학자들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눈 앞에 있는 것들이 계속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변하기 때문에 진짜로 원래는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변하는 것들 중에 진짜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 것이 현상과 본질이다. 저 물건이 여전히 그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요소가 있지 않겠는가, 그것을 계속 따져묻는 것이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가 내놓은 이론이 처음에 두 세계 이론인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현상은 늘 변하고 본질은 저 너머에 있어서 우리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알 수는 없는데 있을 것이다 라는 것. 그리고 두번째는 현상-법칙 해석이다. 눈 앞에 있는 게 있는데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법칙이 있을 것이다. 그 법칙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두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현상-법칙 해석은 두 세계 이론이 아니다. 저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있다. 현상-법칙 해석은 현상이나 법칙이나 둘 다 이 세계에 있다.

현상-법칙 해석은 두 단계로 되어 있다. ‘있다’라고 할 때 눈 앞에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변화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다 온다. 그래서 우리의 감각으로 들어오는 것을 감각지라고 한다. 우리의 감각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 그렇지만 감각에 의해서 알게 된 것은 본질이 아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많이 헤매는 지체들의 혼합"을 감각지라고 한다. 그런데 "많이 헤매는 지체들의 혼합"을 누스, 정신에 의해서 파악한 것이라고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스에 의해서 파악한 것, 알게 된 것이 진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우리 인간은 감각에 의해서 알게 된 것, 감각지가 하나있고, 그런 감각이 아니라 정신에 의해서 알게 된 누스가 하나 있다는 말이다. 그게 법칙이다. 따라서 그 둘을 식별할 줄 알아야 진짜로 뭔가를 아는 것이다. 그게 바로 현상-법칙 해석이다. 그렇게 보면 파르메니데스의 단편들을 현상-법칙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계와 저 세계, 즉 저 세계에 관한 초월적 형이상학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을 누스, 정신을 가지고 자연현상을 파악해서 그것이 움직이는 법칙을 파악할 것을 주장한 것이 된다. 그러면 이 세계는 현상과 법칙으로 되어 있다, 그에 대응하는 앎은 감각지와 누스에 의한 앎이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계의 배열 전체를 짜맞출 수 있다. 그게 현상-법칙 해석의 핵심이다. 수많은 학자들의 가장 깊은 의문은 늘 변화하는 것을 추적해서 쫒아가다보면 진짜인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니 진짜인 것을 계속해서 챙겨보려고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짜라고 여겨지는 것을 법칙이다 라고 말한다. 법칙은 불변의 것이 아니다. 법칙 또한 변화한다. 그래서 그것은 진짜로 있는 것,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진리 닮은 것, 잠정적인 것, 수정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 사실 파르메니데스의 단편들을 현상-법칙 해석을 가지고 이해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해보면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정공법 독해라고 할 수 없다. 이 세계에서 자연법칙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파르메니데스의 단편들에 기대서 설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제5장 79 이 지작이 "많이 헤매는 지체들의 혼합"입니다. 감각기관들의 혼합이라 하여 인간의 몸통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감각지입니다. 지각 또는 감각지는 "어떤 상태에 처하느냐에 따라" 누스에 의한 사유로 착각하게 됩니다. 한때 많은 잘못을 저지르는 감각기관들의 혼합이었던 것들이, 인간에게는 누스에 의한 사유로 보입니다. 즉 진정한 앎으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제5장 81 "이 배열 전체"는 세계입니다. 세계는 그럴듯한 것입니다. "그럴듯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리를 닮은 것, 진리와 흡사한 것입니다. 잘 배열된 이 세계가 진리와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제6강은 학문탐구의 방법(‘학의 시원’ 해석)이다. 눈 앞에 놓여있는 현상은 늘 변하는데 그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진짜인 것은 무엇인가를 따져서 알고 싶어한다. 현상, 감각지가 진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있고, 감각지가 아닌 누스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러면 일단 우리 앞에는 두 개가 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둘 중에 어떤 것을 믿어야 할까 하고 생각하는 게 하나 있다. 다시말해서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의심하고 있는 생각도 하나 있다. 즉, 감각지를 믿어야 하는냐, 누스에 의한 앎을 믿어야 하는냐가 두 개라면 두개를 놓고 이렇게 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하지도 못하는 생각이 하나 있다. 그게 바로 학문의 출발점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단편2를 보면 "자, 이제 내가 말할터이니, 그대는 이야기를 듣고 명심하라. 탐구의 어떤 길들만이 사유를 위해 있는지." 여기서 중요한 것이 "길들"이다.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중에 하나가 있다는 길, 설득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 즉 배움이 없는 길이다. 있다와 있지 않음만 있는가, 다른 건 없는가 라는 것도 하나 있다. 다시 말해서 단편7을 보면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 결코 강제되지 않도록 하라"고 되어 있다. "있지 않은 것들"는 것은 무규정적이고,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규정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강제되지 않도록 하라" 즉 규정되지 않은 것들을 규정되어 있다고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뭔가를 우리가 생각할 때는 A라는 생각도 있고 A에 반대되는 생각도 있는데, 이 두가지를 동시에 생각하는 것도 있다는 말이다.

학이라는 것은 탐구, 시원은 의심이다. 학의 시원 해석이다 라고 하면 그것은 뭔가를 탐구하는 것에 관해서 내가 정말로 이것을 탐구해야 하는가 라는 근원적인 의문을 갖는 태도를 말한다. 파르메니데스를 읽어보면 우리 눈 앞에 놓여있는 것들이 진짜는 아니구나 라는 것을 일단 의심을 했고, 그 의심의 배후에 진짜라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했다는 점, 그런 점에서 보면 굉장히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또 동시에 진짜를 찾아내려고 하는 굉장히 강력한 열정도 느껴진다. 따라서 파르메니데스를 비롯한 형이상학적인 탐구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얼핏 보기에는 그냥 절망적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 그 근원에는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려는 또는 참으로 진리인 것을 알고자 하는 그런 강렬한 욕망이 있다는 점을 늘 유념해야 한다.

제6강 85 "탐구의 어떤 길들만이 사유를 위해 있는지"라는 구절을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진리로 나아가는 길과 거짓으로 나아가는 길을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내 앞에 길이 몇 개 있는가,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를 미리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유의 대상이 되는 길들은 어떤 길들인지"를 묻는자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묻는 사유는 어떤 사유입니까, '있다'라는 길을 택한 자의 사유일까요, 아니면 '있지 않다'라는 길을 택한 자의 사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길을 갈 것인가, 저 길을 갈 것인가를 따져보고 있는 자의 사유입니다. 이것이 하나 더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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