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마지막 시간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35, 36, 37, 38, 39장, 추기


❧ 존재의 진상眞相과 확신
“그대는 존재의 진상을 알면서도 왜 자신을 기독교도라 말하고 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가.”
“신만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다.”(팡세, §181)
그러나! 저기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 닿을 수 없는 것 — 그것이 슬픔 아닌가.


❧ 에이해브
에이해브는 “내가 멈춰 선 곳에 신이 있다고 확신”하였을 것이다.
그는 “위엄있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은 사람”(Moby Dick; Or the Whale, Ch. 16)이다.
우리의 모든 탐구는 각자의 ‘숨은 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2021.07.03 숨은 신을 찾아서 — 마지막 시간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35, 36, 37, 38, 39장, 추기
❧ 존재의 진상眞相과 확신
“그대는 존재의 진상을 알면서도 왜 자신을 기독교도라 말하고 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가.”
“신만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다.”(팡세, §181)
그러나! 저기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 닿을 수 없는 것 — 그것이 슬픔 아닌가.
❧ 에이해브
에이해브는 “내가 멈춰 선 곳에 신이 있다고 확신”하였을 것이다.
그는 “위엄있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은 사람”(Moby Dick; Or the Whale, Ch. 16)이다.
우리의 모든 탐구는 각자의 ‘숨은 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숨은 신을 찾아서⟫ 마지막 시간이다. 마지막 시간은 35장부터 36, 37, 38, 39장, 그리고 추기를 정리해서 읽는다. 35장 첫문장이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파스칼은 '생각'을 한다. "인간은 (…) 생각하는 갈대이다". 파스칼의 《팡세》에서 아주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할 때 보통은 사람들이 갈대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본다. 약하구나. 그런데 파스칼이 말하고 싶은 것은 갈대처럼 약하지만 '생각하는 갈대' 생각에 초점을 준다. 오늘은 "생각"에 대해서 힘주어 말하려고 한다. 문장을 먼저 읽겠다. 이 "생각"은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우주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 다음 인간은 또 생각을 한다. 신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두려움도 생각이다. 뭔가 생각을 하니까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생각하는, 신을 찾는 갈대이다. 왜 신을 찾는가? 존재의 진상을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는가? 존재의 진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과학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는 확실한 것이다. 

ⅩⅩⅩⅤ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파스칼은 '생각'을 한다. "인간은 (…) 생각하는 갈대이다"(팡세,§231). 이 "생각"은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우주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 다음 인간은 또 생각을 한다. 신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신을 생각하는, 신을 찾는 갈대이다. 존재의 진상을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는가?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우리가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자 주재자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생각을 가지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 속에 있는 것이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 속에서 아무리 틀림없는 것이라고 증명한다고 해도 그것은 확실한 것은 아니다. 보통때는 확실과 확신을 별로 구별해서 쓰고 있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는 아주 엄격하게 구별해서 쓴다. 확신은 생각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고, 확실은 물질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확신과 확실을 우리는 구별해야 하는데 확신에 대해서도 우리는 있다고 말하고, 확실에 대해서도 있다는 말을 쓴다. 즉 비동사를 두 가지 모두에다가 쓴다. "이번에 큰 일이 벌어 질 것이 틀림없어. 난 확신해"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본적도 흔적도 없다. 그런데 그것을 확신하다는 것이다. 머리속에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있다"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다. 신이 있다. 있다라는 말은 확실하다는 말에도 쓰고 확신에다가도 쓴다. 그래서 이 파스칼이 '생각'을 한다고 할 때 홑따옴표를 붙여놓았다. 바로 이 생각이라는 것이 가져다주는 힘이다. "세계는 우주의 티끌들의 우연한 결합이라는 걸 그대를 알지 않는가" 이게 확실한 것들이다. 안드로메다를 이루고 있는 물질과 우리 인간을 이루고 있는 물질들이 똑같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대의 정신이 탐욕스럽게 읽고 있는 책들이 모두 한순간의 응축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지 않는가, 그대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만년필은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대는 알지 않는가, 그대가 몹시도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찰라에 스러져버릴 것들임을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는 왜 그것들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그대는 존재의 진상을 알면서도 왜 자신을 기독교도라 말하고 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가."  존재의 진상은 확실의 영역에 들어 있다. 그런데 나는 기독교도다, 신을 믿는다, 신이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은 확신의 영역에 들어있다. 확실의 영역과 확신의 영역이 구별되는데 왜 그러한가. 그 답이 36장에 있다. 

ⅩⅩⅩⅤ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세계는 우주의 티끌들의 우연한 결합이라는 걸 그대를 알지 않는가, 그대의 몸은 언젠가는 티끌로 되돌아갈 것임을 그대는 알지 않는가, 그대의 정신이 탐욕스럽게 읽고 있는 책들이 모두 한순간의 응축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지 않는가, 그대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만년필은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대는 알지 않는가, 그대가 몹시도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찰라에 스러져버릴 것들임을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는 왜 그것들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그대는 존재의 진상을 알면서도 왜 자신을 기독교도라 말하고 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가.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은 신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 문장이다. 창조라는 것은 우리는 두 가지 모두에 쓴다. 하나는 내가 이번에 무엇을 만들었어라고 할 때 눈에 보이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을 창조했다고도 하고, 동시에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말할 때 이것도 뭔가를 만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는 물리적 실체가 있고, 신은 물리적 실체가 없다. 그러니 신이 뭔가를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물질을 만들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확신의 영역에 있다. 철학에서 물리주의라고 말하는데, 확실한 것만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확실한 것들만 따져서 묻고 그것 이외의 것들, 다시말해서 비확실, 확실이 아닌 것들은 논의하지 말자는 것이 철학에서 물리주의라는 하나의 사조인데, 본인은 그것만 가지고는 세상을 살 수 없다고 본다. 왜냐 인간은 무엇보다도 생각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가지고 확실하지 않은 것들을 창조한다. 즉 확신의 영역 안에다가 만들어 내 놓는다. 그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중요하다고 여기는 철학의 사조가 관념론이다.

ⅩⅩⅩⅥ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은 신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확실한 것과 확신하는 건, 그 다음에 물리주의와 관념론을 구별해야 한다. 따라서 파스칼은 존재의 진상이 어떠하다 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은 신이 세계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은 신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것이고, 그것을 고백하면 기독교도이고, 또 기독교가 아니라도 착한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고 확실한 것 이외의 것은 논의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관념론의 대척점에 서있는 것이고, 대대수의 관념론자들이다. 그리고 그 신이라는 존재는 파스칼은 증명하기 어려우니까 '숨어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숨은 신을 찾아서⟫라는 제목은 파스칼의 deus absconditus 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신학책은 아니라는 점을 첫시간에 얘기했다. '숨은 신'이라고 하는 것은 관념적인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물질적으로 증명해 낼 수 없고 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존재 구조를 명쾌하게 밝혀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의 생물학적 존재 자체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숨은 신이다. 그러면 그런 신이 아니라도 해도 누구나 다 관념적인 것, 확신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부터 자기 삶의 의미를 끄집어 내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슬픔이다. 아주 확실하게 붙들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세상에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뭔가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계속 그쪽을 향해가는 것, 그게 바로 슬픔이다. 그리고 그 슬픔을 이겨내려면 내가 멈춰 선 곳에 신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을 믿고 살면 된다고 확신하면 슬픔이 없다. 그 사람이 누군인가. 에이해브 선장이다. 

ⅩⅩⅩⅥ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비극이다. 저기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 닿을 수 없는 것 ━ 그것이 슬픔 아닌가.

ⅩⅩⅩⅦ 슬픔을 이기려면. 내가 멈춰 선 곳에 신이 있다고 확신한다.

슬픔을 이기려면. 내가 멈춰 선 곳에 신이 있다고 확신한다. 에이해브 선장은 그 신이 무엇인가. 고래를 잡으면 자기는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슬픔을 이겨내는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은 "위엄 있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은 사람"(모비딕, ch.16)이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기독교 세계의 인구에 포함되었으나 여전히 그 세계에 낯선 이였다"(ch. 34). 페이건, 이교도이다. "그는 자신이 멈춰 선 곳에서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었다. "여기, 이 백발의, 신을 믿지 않는 노인, 증오에 가득 차 세계를 떠돌며 욥의 고래를 추적하는…"(ch. 41) 욥의 고래가 바로 리바이어던인데 신을 추적하는 것이다. "숨어 있다고 여겨지던 신을 찾아내고, 그 자리에서 고래를 죽인다." 신을 죽이고 자기는 삶의 절정에 이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이교도는 신을 없애는 것이 자기 인생의 완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불교도들처럼 신을 툭 털어놓고 가버렸으면 좋았으련만. "어떤 사람은 썰물에 죽는다. 어떤 이들은 얕은 물에, 어떤 이들은 홍수에. ━ 나는 지금 가장 높은 물마루에 이른 파도와 같다"(ch. 135). 대단한 사람이다. 38장의 열줄 정도 되는 분량, 이것이 1999년, 2000년 무렵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다. 굉장한 야망을 가지고 있을 때, 지금 생각해보면 철이 없었 던 것 같다. 

ⅩⅩⅩⅧ 에이해브 선장은 "위엄 있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은 사람"(모비딕, ch.16)이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기독교 세계의 인구에 포함되었으나 여전히 그 세계에 낯선 이였다"(ch. 34). 그는 자신이 멈춰 선 곳에서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었다. "여기, 이 백발의, 신을 믿지 않는 노인, 증오에 가득 차 세계를 떠돌며 욥의 고래를 추적하는…"(ch. 41) 에이해브 선장은 숨어 있다고 여겨지던 신을 찾아내고, 그 자리에서 고래를 죽인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삶의 절정에 이른다. "어떤 사람은 썰물에 죽는다. 어떤 이들은 얕은 물에, 어떤 이들은 홍수에. ━ 나는 지금 가장 높은 물마루에 이른 파도와 같다"(ch. 135).

우리의 모든 탐구는 '숨은 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에 있다. 아예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물리주의를 자기의 입장으로 고집하면 관념론적 의미를 찾을 필요 없고 그냥 살면 된다. "더러는 바다를 건너가기도 하면서 더러는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때로는 오뒷세우스처럼 때로는 에이해브처럼." 39장에 보면 에이해브와 오뒷세우스가 나오는데, 이 두 사람은 기독교적인 의미의 신을 벗어난 이교도들. 데카르트나 아우구스티누스나 파스칼 모두 기독교도들이다. 그래서 굳이 기독교, 불교를 따지지 않아도 하나의 인격신에게 삶의 의미를 위탁하는 사람이 있고, 초월적인 법칙에 위탁하는 사람이 있고, 나 자신이 숨은 신이다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 순간 순간에 자기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여러 종류가 있을 것이다. ⟪숨은 신을 찾아서⟫는 그런 것들을 밝혀 보이는 시도이다.

ⅩⅩⅩⅨ 우리의 모든 탐구는 '숨은 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에 있다. 더러는 바다를 건너가기도 하면서 더러는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때로는 오뒷세우스처럼 때로는 에이해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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