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08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10강

❧ 형상실재론, 형상시원론
형상실재론은 형상이 실제로 있다는 주장, 형상시원론은 형상이 논의의 출발점이라는 주장
이는 대상의 질서에 관한 논의

❧ 형상을 파악하는 정신
“혼이 몸과 결별하여 최대한으로 그 자체로만 있게 되며, 혼이 가능한 한 몸과 관계하지도 접촉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진실: to on)에 이르고자 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철학자)의 혼”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ho diakosmōn)이며 그것들의 원인이 되는 것은 결국 정신(지성:nous)이라 주장하는 것이었네.” “질서를 지어주는 정신(지성)”
“가장 좋은 것의 선택... 진짜 원인(to aition)”

❧ 형상유형론
한정(peras)을 통해 규정(horismos)을 만들어내는 힘(dynamis)인 정신은 자연과학적 질서와 좋음의 질서라고 하는 두 가지 종류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
물리적 사물이 아닌 좋음은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인간은 무한정자(apeiron)이므로 좋음의 존재론과 좋음의 논리학은 불가능하다.
타협책으로서의 좋음의 유형론: 본(paradeigma)을 본받는 것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08

오늘은 《철학고전강의》 제10강을 읽겠다. 10강의 제목은 형상실재론, 형상시원론이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에이도스, 형상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대답을 한다면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실재론이다, 시원론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철학책에 나오는 용어가 실재론, 시원론이 나오면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용어여서 막히는 경우가 많다. 쉽게 이야기하면 실재론은 우리가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실제 really 하게 있다. 어떤 형태를 띠고 있다, 우리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있다는 뜻이다. 알라가 있다고 믿는 사람, 하느님이 있다고 믿다고 있는 사람의 수를 생각해보자. 굉장히 많다. 즉 우리가 '믿는다'라고 하는 것과 팩트로 증명된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것이 있다고 믿으면 있는 것이다. 시원론은 대체로 이러이러한 것들을 이렇게 해보자 라고 하는 것. 따라서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에서 형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really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것이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인지 따져 봐야한다. 그 논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 이 문장이다. "혼이 몸과 결별하여 최대한 그 자체로만 있게 되며, 혼이 가능한 한 몸과 관계하지도 접촉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진실: to on)에 이르고자 하는 그때" 여기서 혼은 정신을 말하는 것인데, 우선 형상을 가리키는 말로 나오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형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머릿속에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형상이 정말로 있는 것이든 아니면 우리가 어떤 논의를 위한 출발점으로서 가정을 하든, 형상실재로서 있든 아니면 시원로서 있든, 형상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저쪽에 있는 것이다, 항상 이런 논의를 할 때 저쪽에 있는 것과 이쪽에 있는 것, 즉 나에게 있는 것이 두개를 동시에 떠올려야 한다. 앞서 말한 것은 나는 고려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의 판단능력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야 하고 동시에 내 판단능력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저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개판인 것 같아 이렇게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형상실재론과 형상시원론이라고 하는 것은 형상이 어떻게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러면 형상이 실재로 있든 시원으로서 있든 형상을 받아들이는 정신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그래서 제10강은 형상이 어떻게 있는가에 대한 논의도 있지만 여기에 덧붙여서 형상에 마주서 있는 인간의 혼, 즉 정신에 관한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방금 전에 읽은 문장은 그것이 다 들어 있다. "혼이 가장 훌륭하게 추론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것들 중의 어떤 것도, 즉 청각도 시각도 또는 어떤 고통이나 즐거움도 혼의 주의를 돌려놓으며 괴롭히는 일이 없고" 먼저 여기서 시작이다. 인간의 정신이 청각이나 시각과 같은 감각에 얽매이지 않고 또 고통이나 즐거움처럼 어떤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파이돈》의 앞 부분을 보면 극도로 고통을 느끼면서도 즐거움도 있고, 즐거움을 느끼는데도 고통도 있다. 고통도 즐거움도 아닌 상태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얘기를 소크라테스가 한다. 따라서 이 부분이 사실 먼저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어떤 정신 상태인가. 감각적인 상태에 휘둘리지 않고 고통이나 즐거움에도 빠져있지 않은 극도로 평온한 상태, 그것을 플라톤은 "혼이 몸과 결별하여 최대한 그 자체로만 있게 되며"라고 한다. 몸이라는 것은 육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간이나 특정한 상황 속에서 변화하는 것,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을 몸이라고 표현하다. 벌써 여기서 혼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몸 상태하고는 관계없이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이 불멸로 가면 영혼불멸론이 된다. 형상을 알게 되든 모르게 되든 간에 일단 혼이 몸과 결별하여 최대한 그 자체로만 있게 되는 것이 먼저 논의되고 있다. 따라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철학자)의 혼은 몸을 최대한 무시하고서, 이에 달아나, 그 자체로만 있게 되는 걸 추구하지 않겠는가?"한다. 형상이 실제로 있는가 아니면 규약으로 있는가의 논의 이전에 이 문장에서 정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먼저 있다. 이 둘 모두가 몸에서 벗어난, 단적으로 말해서 감각지에서 벗어난 그런 정신으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10강 119 혼이 가장 훌륭하게 추론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것들 중의 어떤 것도, 즉 청각도 시각도 또는 어떤 고통이나 즐거움도 혼의 주의를 돌려놓으며 괴롭히는 일이 없고, 혼이 몸과 결별하여 최대한 그 자체로만 있게 되며, 혼이 가능한 한 몸과 관계하지도 접촉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진실: to on)에 이르고자 하는 그때일세 […] 그러니까 이 경우에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철학자)의 혼은 몸을 최대한 무시하고서, 이에 달아나, 그 자체로만 있게 되는 걸 추구하지 않겠는가? ━ 《파이돈》 65c~65d

그러면 120~121페이지에서 형상실재론과 형상시원론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해 두었다.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파이돈》의 핵심논지는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정신의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형상실재론과 형상시원론을 파악하는 것이 정신이다. 그것을 파악하려면 멀쩡한 정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상실재론, 형상시원론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에 관한 논의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있다, 논의의 출발점으로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부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제10강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은 122페이지에 있는 부분이다."그렇지만 언젠가 나는 누군가가, 그가 말하는 바로, 아낙사고라스가 지은 것이라는 책의 구절을 읽는 것을 들었는데, 그건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ho diakosmon)이며 그것들의 원인으로 되는 것은 결국 정신(지성: nous)이라 주장하는 것이었네." 정신이 뭐냐에 대해서 논의가 나왔는데 첫째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것들의 원인으로 되는 것이다. 원인이라는 말은 어떤 것의 발생 근거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여기서 원인이라고 하는 말은 그것이 있게끔 존재 의의를 갖추게 해주는 것. 예를 들면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준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부모님인데, 부모님은 생물학적인 나의 원인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오늘날의 나를 만든 것은 OO다라고 할 때의 원인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정신이라고 하는 것에게 생물학적인 것을 넘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지성)이 모든 것의 원인으로 되는 것이라는 건 어느 면에서는 잘 된 일로 내게는 여겨졌네. 그리고 나는, 만일 이게 이렇다면, 질서를 지어주는 정신(지성)은 모든 것에 질서를 지어주고(kosmein) 각각의 것이 최선의 상태로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자리잡게 해준다고 생각했네." 정신(지성)은 모든 것에 질서를 지어주고(kosmein), 여기서 하나 더 해주는 것이 각각의 것이 최선의 상태로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자리잡게 해준다. 이게 지금 문제이다. 정신이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사물들의 발생 근거와 그것이 발생해서 귀결된 결과만 따져 묻는 것은 자연과학적 질서이다. 여기서 두 종류의 질서를 얘기하는데 하나는 자연과학적 질서이다. 그것을 희랍어로 kosmein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앞서서 말했던 파르메니데스의 현상 법칙 해석과 같은 의미를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각각의 것이 최선의 상태로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자리잡게 해준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최선이라고 하는 말은 가장 좋은 상태인데 이것은 윤리적인 상태를 말한다. 적어도 여기서 플라톤이 쓰는 최선이라는 말은 윤리적인 상태, 무엇이 그것의 가장 윤리적인 상태인가를 따져 묻는 것. 따라서 정신이 하는 일은 우주의 만물의 질서를, 즉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kosmein)인데 뭐가 제일 좋은 것인가, 좋음의 질서까지도 따져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10강 122 그렇지만 언젠가 나는 누군가가, 그가 말하는 바로, 아낙사고라스가 지은 것이라는 책의 구절을 읽는 것을 들었는데, 그건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ho diakosmon)이며 그것들의 원인으로 되는 것은 결국 정신(지성: nous)이라 주장하는 것이었네. 바로 이 원인에 대해 나는 반가웠했으며 정신(지성)이 모든 것의 원인으로 되는 것이라는 건 어느 면에서는 잘 된 일로 내게는 여겨졌네. 그리고 나는, 만일 이게 이렇다면, 질서를 지어주는 정신(지성)은 모든 것에 질서를 지어주고(kosmein) 각각의 것이 최선의 상태로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자리잡게 해준다고 생각했네. ━ 《파이돈》 97b~97c

제10강 123 소크라테스는 정신이 "모든 것에 질서를 지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것이 최선의 상태에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자리잡게 해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주목해야 할 도약이 있습니다. 질서를 지어주는 것은 일종의 자연과학의 법칙을 의미할 것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 같은 것이겠지요. 자연과학자는 이쯤에서 만족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 묻습니다. 이는 자연과학적 법칙으로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파이돈》 99b를 보면 "가장 좋은 것의 선택(tou beltistou hairesis)에 의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건, 이건 몹시 그리고 아주 경솔한 주장일게야. 왜냐하면 그건 진짜 원인(to aition)과 그것 없이는 원인이 결코 원인일 수 없는 것이 별개의 것임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네."  여기서 진짜 원인은 좋음의 질서이다. 플라톤에서 aitia라고 말하면 자연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원인이 아니라 좋음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하고, synaitia는 보조원인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원인과 결과를 말한다. 따라서 정신은 두 가지를 다 해야 한다. aitia이기도 하고 동시에 synaitia이기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형상실재론이냐 형상이원론이냐의 논제는 우리의 누스가 무엇을 할 수 있는냐에 들어오게 된다. 왜냐하면 좋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정신을 가지고 따지는 것이다. 플라톤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좋은 것에 근거해서 인간이 살아가고 공동체가 운영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좋음의 질서를 따져 물으려고 했다는 점을 플라톤을 읽을 때는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이 사람이 따져 묻는 모든 논의들은 정신에 관한 논의가 된다.

제10강 124 그렇지만, 내가 행하는 것들 이것들 때문에 행하며, 또한 그것들을 지성에 의해서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의 선택(tou beltistou hairesis)에 의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건, 이건 몹시 그리고 아주 경솔한 주장일게야. 왜냐하면 그건 진짜 원인(to aition)과 그것 없이는 원인이 결코 원인일 수 없는 것이 별개의 것임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네. ━ 《파이돈》 99b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정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사실은 앞서 읽은 파르메니데스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좋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한정을 지을 수 없는 존재, 무한정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정신은 한정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보자. 이 정신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첫째는 인간은 자기 눈 앞에 놓여 있는 사물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규정해서 만들어 내놓는다. 주기율표를 생각하면 된다. Fe는 철이다. 우리는 Fe라는 기호를 보고 철을 생각한다. 주기율표는 논리학과 같은 것이다. 범주를 배열하면 논리학이 되는 것이다. 논리학은 대상 세계의 사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이름표를 만들어서 다른 것과 구별할 수 있는 이를테면 출석부와 같은 것이다. 출석부가 사유의 세계이고, 출석부에 이름이 적혀 있는 학생들이 존재의 세계라면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고 말과 사물이 상응하는 것이다. 그것을 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유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 즉 존재론과 논리학으로 얘기한다. 주기율표와 화학원소들, 이런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 규정이다, 만들어 내는 힘이 정신이다. 정신이 사물의 질서를 지어주기도 하고 동시에 좋음의 질서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사물의 질서를 짓는 방식은 무엇인가. 규정을 만들어서 한정을 만들어 내는 힘이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은 그렇다면 좋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대해서 남아있다. 인간은 무한정자이다. 인간에게서 좋음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학처럼 규정해서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제10강 125 인간의 행위와 그 행위로써 이루어지는 삶은 법칙으로 추려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규정할 수 없는 존재, 한정을 지을 수 없는 존재, 무한정자(apeiron)가 되는 것입니다. 

제10강 126 수다한 것들을 정리해서 개념을 만들어내거나 법칙을 만들면 이것이 '한정된 것'(peras)입니다. 이 한정된 것에는 규정(horismos)이 상응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만들어진 규정을 로고스 logs라 하기도 하고, 그러한 규정을 만드는 힘(dynamis)도 로고스라고 말합니다.

좋음의 존재론과 좋음의 논리학은 없다. 좋음은 인간에게만 관여되는 사태이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한정자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규정할 수 없고 그때그때 다르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어쨌든 좋음의 존재론과 좋음의 논리학을 만들어 보고 싶지만 딱부러지게 좋은 것들의 질서를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 내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타협책으로 내놓은 것이 좋음의 유형론이다. 사실 좋음의 유형론은 없는 말인데 여기에 쓴 말이다. 눈에 보이는 가치의 세계는 변하지만 그래도 늘 있는 것이 아닐까를 사람들에게 생각하게 하고, 불변하는 좋음의 존재론은 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파라다이그마, 잠정적 모형을 통해서 본받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플라톤을 읽어도 인간의 한계가 모방밖에 없구나 하는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합의된 규약에 의지하는 '차선의 방법'"으로 들어 갈수 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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