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09
- 강의노트/라티오의 책들 2021-24
- 2021. 8. 9.
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11강, 제12강
❦ 제11강: 합의된 규약에 의지하는 ‘차선의 방법’
“육안으로 사물들을 바라보고 각각의 감각(aisthēsis)들에 의해서 그것들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다가, 나의 혼(psychē)이 아주 눈멀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네. 그래서 내게는 로고스들(logoi)에 의지하여 이것들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진실: alētheia)를 고찰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네.”
아낙사고라스의 방법을 통한 ‘좋음’ 탐구의 실패, 가치목적론적 탐구의 방법론
“아름다움 자체에 관여”, “아름다움의 나타나 있게 됨(parousia)이거나 결합(koinōnia)이거나”
❦ 제12강: 같음과 같음 자체에 관한 논변
“이들 같은 것들은 그 같은 자체와는 다른 것들인데도, 어쨌든 이것들로 해서 자네는 그것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으며 또한 그것에 대한 앎(지식: epistēmē)도 얻게 되었겠지?”
불멸하는 영혼은 앎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상기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09
오늘은 《철학고전강의》 제11강 합의된 규약에 의지하는 ‘차선의 방법’, 제12강 같음과 같음 자체에 관한 논변을 읽겠다. 《파이돈》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바가 뭐냐하면 영혼불멸이다. 왜 영혼불멸을 이야기하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와 비슷한 순서를 생각하면 된다. 거칠고 단순하게 말해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뒤에 놓여있는 것이 진짜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는 우리에게 먼저인 것, 본성상 먼저인 것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먼저인 것에서 탐구를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본성상 먼저인 것으로 나가아게 된다. 또는 나아가야만 그것이 진정한 학의 자세다 라고 말을 한다. 우리에게 먼저인 것과 본성상 먼저인 것을 구별하고 본성상 먼저인 것에 관심을 두고 그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봐야한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는 우리에게 먼저인 것은 감각으로 닿아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고, 또는 존재 자체가 아니고, 플라톤의 말을 빌리면 형상이 아니고, 플라톤의 생각을 정리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것은 이데아가 아니다. 혼이 몸을 떠나서, 누스로 파악하는 것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좋음이라는 것은 인간적으로 좋은 것, 도덕적으로 좋은 것, 윤리적으로 선하고 올바른 것을 다 묶어서 좋음이라는 것으로 포괄하려고 했다. 그것은 아낙사고라스가 말한 것과 같은 자연과학의 방법으로는 탐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파이돈》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다른 탐구 방법을 생각한다. 그래서 11강 합의된 규약에 의지하는 ‘차선의 방법’, 여기서 차선의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탐구의 방법을 새로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낙사고라스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 겠다, 그것이 《파이돈》 99c~99e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원인을 얻지 못하고 말았기에, 내 자신이 그걸 찾게 되지도 남한테도 배우게 되지도 못했기에, 내가 그 원인의 탐구를 위한 차선의 방법을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케베스, 자네는 내가 보여주는 걸 바라는가?" 그러면서 내가 무엇때문에 실패했는지를 말한다. "육안으로 사물들을 바라보고 각각의 감각(aisthēsis)들에 의해서 그것들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다가" 감각(aisthēsis)에 의해서는 뭐가 안되더라, 이 문장이 사실 중요하다. "나의 혼(psychē)이 아주 눈멀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네." aisthēsis에 몰두하면 내 정신이 망가질까봐 두려웠다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soma에 붙어있는 aisthēsis하고 nous 또는 psychē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 psychē에 의해서는 로고스들 logoi이다. 대립이 생긴다. 몸뚱아리에서 얻게되는 것은 aisthēsis, 우리의 psychē로 얻게 되는 것은 logoi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인간관을 말하면 soma와 psychē, 그리고 soma에서 얻게되는 aisthēsis, psychē로 얻게 되는 것은 logoi로 나뉜다.
성경에서도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5장 24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이러면 성서에는 인간이 세가지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영은 pneuma, 혼은 psychē, 몸은 soma이다. 성서의 인간관과 헬라스의 인간관은 다른다고 얘기한다. 즉 spiritus, pneuma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psychē와 soma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고 대개 암기사항으로 외우게 된다.
다시 《파이돈》으로 돌아와서 aisthēsis와 psychē가 구별이 되는데 psychē를 이용하게 되면 logos에 의지할 수 있게 되고, "내게는 로고스들(logoi)에 의지하여 이것들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진실: alētheia)를 고찰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네"라고 말한다. 진리는 감각에 의해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혼이라고 하는 인간의 기관에서 로고스들에 의지해서 탐구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아낙사고라스의 방법은 soma에서 생겨나는 aisthēsis를 가지고 한 것이었고, 그것 가지고는 자연현상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진짜로 좋음에 대한 탐구는 안되더라 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차선의 방법으로 말하는 것이다.
11강 130 " […] 그러나 나는 이 원인을 얻지 못하고 말았기에, 내 자신이 그걸 찾게 되지도 남한테도 배우게 되지도 못했기에, 내가 그 원인의 탐구를 위한 차선의 방법을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케베스, 자네는 내가 보여주는 걸 바라는가?"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 나 또한 그와 같은 유의 생각하게 되었으니, 육안으로 사물들을 바라보고 각각의 감각(aisthēsis)들에 의해서 그것들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다가, 나의 혼(psychē)이 아주 눈멀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네. 그래서 내게는 로고스들(logoi)에 의지하여 이것들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진실: alētheia)를 고찰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네. […]" ━ 《파이돈》 99c~99e
131페이지를 보면 "세계에 대한 가치 목적론적 원인"을 탐구한다고 얘기한다. 자연 형상은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낙엽이 지는 것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가. 자연현상은 그저 움직여 가는 것에 불과한다. 우리 인간은 좋음을 탐구하고 알고자 한다. 그러면 왜 그러는가. 잘살기 위해서, 훌륭한 삶을 위해서이다. 좋음을 알아서 사람답게 잘살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가치목적록이다. 로고스에 의해서 alētheia를 알아내는 것은 가치목적론적 원인을 알아내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11강 131 세계에 대한 가치 목적론적 원인을 아낙사고라스의 방법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그 원인의 탐구를 위한 "차선의 방법"을 수행하겠다고 나섭니다.
로고스는 무엇인가.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그것 자체로(auto kath' hauto) 존재한다고(einai) … 가정하고서 말일세"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그것 자체로 가정하자. 로고스에 의지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좋음 자체 또는 아름다운 것 자체 이런 것들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사람은 그것을 닮으려고 한다. 그것을 플라톤은 이를 "이것이 그 아름다움 자체에 관여하기(metechei) 때문이지"라고 말한다. 본받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플라톤은 관여한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의 나타나 있게 됨(parousia)이거나 결합(koinōnia)이거나" 관여한다, 나타나 있게 된다, 결합한다 이것이 같은 묶음으로 나타나는 표현이다. parousia는 기독교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다. parousia는 본질적으로 있는 것, 자체적으로 있는 것이 이 현상 세계에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빼다박는 것이다. koinōnia는 결합이라는 말로 변역되는데, 《국가》에서는 공동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여기서 관여한다, 나타나 있게 된다, 결합한다 이 세개가 한 묶음이다.
11강 132 "한데, 내 말은 이런 걸세. 이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다른 때도 늘 그랬지만 이미 지난 논의에서도 끊임없이 말해왔던 바로 그것들일세. […]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그것 자체로(auto kath' hauto) 존재한다고(einai) … 가정하고서 말일세. […]"
[…]
"그러면 그것들 다음의 것들에 대해서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보게. 만약에 아름다움 자체(auto to kalon) 이외에 다른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이것이 아름다운 것은, 이것이 그 아름다움 자체에 관여하기(metechei) 때문이지, 그밖의 다른 어느것 때문도 아닌 것으로 내겐 보이네. […]"
" […] 즉 그것을 아름답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저 아름다움의 나타나 있게 됨(parousia)이거나 결합(koinōnia)이거나 또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건 간에 말일세. 왜냐하면 내가 아직은 이것이다 하고 자신 있게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to kalon)으로 인해서라는 건 자신있게 단언하는 바이기 때문일세. […]" ━ 《파이돈》 100a~100d
psychē를 가지고 무엇을 하면 logos에 의지할 수 있게 된다. logos는 자체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자체 존재를 늘 떠올리면서 뭔가를 하게 되면 우리는 자체 존재에 관여하는 것이고, 자체 존재가 나타나는 것이고, 그 자체 존재와 결합하게 된다는 말이다.
134~135페이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충해서 자기 나름대로 탐구한 것이 나와있다."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것들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자연 전체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지만, 윤리적인 것들에서 보편자를 찾고, 최초로 정의들에 생각의 방향을 맞추었다." 윤리적인 것들, 인간적인 좋음에 대해서 연구했다는 점. 자연 전체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지만, 이게 말하자면 자연학에서 인간학의 전환, 차선의 방법을 선택하게 된 계기이고. 윤리적인 것들에서 보편자를 찾고, 아름다움 자체를 찾는 것. "플라톤은 그런 종류의 있는 것들을 이데아들이라고 불렀고",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말을 자주 쓰지 않고, 에이도스, 자체존재라는 말을 쓴다. 플라톤의 이데이론을 자주 쓰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이데아들이라고 말한 것이 《파이돈》에서 로고스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1강 134 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것들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자연 전체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지만, 윤리적인 것들에서 보편자를 찾고, 최초로 정의들에 생각의 방향을 맞추었다. […] 플라톤은 그런 종류의 있는 것들을 이데아들이라고 불렀고, 모든 감각물은 그것들과 떨어져 있으면서 그것들에 따라서 이름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진리 탐구라는 것이 무엇인가. 참된 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가정하고 우리가 그것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이를 여러가지로 생각해보면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다. 린네의 생물 분류를 생각하면 쉽다. 제12강에 넘어가면 같음과 같음 자체에 관한 논변인데 같음이라고 하는 것은 parousia, 우리가 재현하려고 하는 것, 우리가 닮으려고 하는 것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같음 자체는 불변의 것으로 가정한 것이다.
"이들 같은 것들은 그 같은 자체와는 다른 것들인데도," 분명히 다르다. 자체 존재와 닮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들로 해서 자네는 그것(같음자체)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으며 또한 그것에 대한 앎도 얻게 되었겠지?" epistēmē는 같음 자체에 대한 앎, 최고의 앎이다. 같음 자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본받아서 그것에 관여하면서 결합하면서 또는 나타나있게 됨을 하면 같음이라고 하는 것을 얻게 되는데, 그것을 하다보면 같음 자체에 대한 앎도 얻게 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순환논법이다. 참다운 진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노력한다. 그런데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을 통해서 앎도 얻겠지, 같음을 통해서 같음 자체에 대한 앎도 되겠지라고 말한다. 그러면 애초에 안 것이다. 사실은 말장난이다. 그래서 사실은 여기에 플라톤이 영혼불멸을 깔고 있는 것이다.
제12강 139 "이들 같은 것들은 그 같은 자체와는 다른 것들인데도, 어쨌든 이것들로 해서 자네는 그것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으며 또한 그것에 대한 앎(지식: epistēmē)도 얻게 되었겠지?"━ 《파이돈》 74b~74c
알고 있다. 《파이돈》의 형상논변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사실은 인간의 영혼은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로고이에 의존해서 생각하다보면 자체 존재가 무엇인지를 원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미리 알고 있어서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인식론인 상기설이다. 좋음이 무엇인지 떠올리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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