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10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13강

❧ ‘좋음 자체’와 ‘좋음’의 소산은 차이가 있다. 여기서 논하는 것은 ‘좋음’의 소산이다.

❧ 태양 / 좋음의 관계
태양이 빛이라는 힘(dynamis)을 주어서 사물이 눈에 잘 보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음은 지성에 힘을 주어서 지성이 앎의 대상을 향하게 한다.
태양의 경우에는 같은 대상을 향하지만 빛의 강도에 따라 보이는 정도가 다르지만,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에서는 보는 장소가 다르다. 즉 좋은 인간이 어떤 방향을 향하게 하는가에 작용한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10

오늘은 《철학고전강의》 제13강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 (태양의 비유)를 설명하겠다. 이제 플라톤에서 한 개인에 있어서의 좋음을 얘기할 때, 《파이돈》편에서 읽었는데, 《파이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불멸이라고 이야기했다. 플라톤이 믿고 싶은 것이 바로 영혼불멸이다. 영혼불멸이라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그 모든 다른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칸트의 철학은 나중에 할 때에도 이야기하겠지만 칸트에서도 영혼불멸, 자유의지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영혼불멸에 관한 그 어떤 경험 데이터가 없다. 증거가 없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칸트는 초월적 이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초월적 이념이 없으면 도덕이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 때 착하게 사는게 좋은 것이다 라고 말하는데 이런 말은 사실 돌려막기다. 좋은 것도 증명이 안되고 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기도 어렵다. 그러니까 영혼불멸이라는 것을 바탕에 깔고 갈 수밖에 없다. 플라톤부터 이미 증명이 안된다는 것이 증명되어 버렸다.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좋음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개인에게 있어서 좋음의 설득 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 다시말해서 개인의 삶과 그 개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공동체의 삶이라는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국가》를 다루고 있는 이 부분을 "정치 공동체, 넒은 의미의 인간학"이라고 제목을 달아 놓은 것이다. 정치 공동체라고 하는 것, 이것은 결국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인간의 공동체와 맞닿아 있는 경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대화편이 《국가》인데 폴리테이아는 정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흔히 국가라는 말로 번역되지만 사람들이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라는 의미로 또는 정치 체제 또는 그런 종류의 삶의 방식을 다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가》 전체가 다 형이상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데 그 중에서도 형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보면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가 있다. 《철학고전강의》에서는 태양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를 다루고 있다. 각각의 비유가 좋음에 대한 대표적 비유인데 태양의 비유를 보겠다.

플라톤의 철학에서는 참으로 좋은 것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참으로 좋은 것이 궁극적인 실제다, 진짜다 라고 말해버리면 철학에서는 참으로 곤란한 것의 원인이다.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플라톤도 증명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그래서 아이티아, 진정한 원인에 관한 앎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곤란한 논변의 원인이 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첫번째 부분을 보자. 144페이지에서 글라우콘이 상세하게 말해 달라고 하자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하지만 여보게들! 도대체 '좋음(善)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 상태로 그냥 두어두기로 하세나. 내가 보기에, 현재의 열의로써는 그것과 관련해서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생각에 이르는 것조차도 넘치는 일일 것 같기 때문일세. 하나, '좋음'의 소산 같고 그것을 가장 닮아 보이는 것을 내가 말하도록 함세" 여기서는 기껏해야 좋음의 소산, 좋음 자체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 가장 닮아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즉 플라톤이 국가에서 태양의 비유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에도 좋음 자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좋음의 소산 같고 그것을 가장 닮아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할 때 태양의 비유를 가지고 시작한다.

제13강 143 플라톤에 따르며,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 세계에 대한 확실한 앎이 아니라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입니다.

제13강 144 "하지만 여보게들! 도대체 '좋음(善)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 상태로 그냥 두어두기로 하세나. 내가 보기에, 현재의 열의로써는 그것과 관련해서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생각에 이르는 것조차도 넘치는 일일 것 같기 때문일세. 하나, '좋음'의 소산 같고 그것을 가장 닮아 보이는 것을 내가 말하도록 함세" ━ 《국가》 506c~507a

태양의 비유를 단순하게 말해보자면 우리가 뭔가를 보고자 할 때 태양 빛이 없을 때는 잘 안보인다. 그런데 태양 빛이 있을 때는 잘보인다. 그래서 빛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뭔가를 볼 때 그것이 잘 보이게 해주는 것이다. 즉 빛은 뭔가를 보는데 있어서 힘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한다. 149페이지를 보면 비슷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태양이 대상들의 빛깔을 비출 때는, 눈이 또렷이 보게 되고, 또한 같은 이 눈 속에도 맑은 시각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 나는 생각하네." 그런 다음에 "마찬가지로" 이 부분이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혼의 경우도 이렇게 생각해보게.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곳, 이곳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이를 지성에 의해 대뜸 알게 되고 인식하게 되어,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 그러나 어둠과 섞인 것에, 즉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의견'(판단:doxa)을 갖게 되고, 이 의견들을 이리저리 바꾸어 가짐으로써 혼이 침침한 상태에 있게 되어, 이번에는 지성을 지니지 못한 이처럼 보인다네." 태양은 우리가 뭔가를 볼 때 힘이 되어 준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를" 보든 태양 빛이라고 힘이 있으면 잘 보인다. 가시계,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방금 전 문장을 보면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곳, 어둠과 섞인 것 즉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에 혼이 고착하고, 이것은 지성이 우리에게 힘을 주어서 "어디를" 보더라도 좋음이라고 하는 것이 지성에 힘을 주면 잘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곳을 보아야 잘보인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작동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우리의 정신이 진리와 실재가 있는 곳에 닿으면 진리를 알게 되고, 생성되고 소멸이 일어나는 장소에 가면 진리를 모르고 의견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태양 빛으로 뭔가를 볼다고 할 때는 어디를 보던 간에 빛이 비치면 잘 보인다. 그런데 정신을 가지고 뭔가를 볼 때는 비추는 장소,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서 의견을 가지게 되느냐 앎을 가지게 되느냐의 차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태양 빛이 작동하는 것은 빛의 세기를 가지고 작동하는 것이고, 좋음이라고 하는 것은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좋음이라고 하는 것은 많든 적든 어디를 향하게 하는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중요한 함축이 여기에 들어있다. 우리가 뭔가를 볼다는 것은 무엇을 보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볼 수 있다. 그것은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런데 진정한 앎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이다. 어디를 향해서 우리의 관심이 향해가느냐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이다. 좋음이라는 형상은 정말로 향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좋음이라고 하는 것을 실현하려면 우리 인간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밀고 가야 하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노력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말이 있다. 나쁜놈들이 꼼꼼하다. 꼼꼼함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태양의 비유를 함축하고 있다. 태양 빛, 뒤나미스의 양도 중요하지만 사실 좋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를 보느냐, 어느 쪽으로 우리의 눈을 향하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태양의 비유에서 얘기한다. 결국을 어디를 볼 것인가가 훈련되어야,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어지는 동굴의 비유가 어느 쪽을 보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교육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13강 150 “그렇지만 태양이 대상들의 빛깔을 비출 때는, 눈이 또렷이 보게 되고, 또한 같은 이 눈 속에도 맑은 시각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 나는 생각하네."
[…]
"그러니 마찬가지로 혼의 경우도 이렇게 생각해보게.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곳, 이곳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이를 지성에 의해 대뜸 알게 되고 인식하게 되어,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 그러나 어둠과 섞인 것에, 즉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의견'(판단:doxa)을 갖게 되고, 이 의견들을 이리저리 바꾸어 가짐으로써 혼이 침침한 상태에 있게 되어, 이번에는 지성을 지니지 못한 이처럼 보인다네." ━ 《국가》 508b

제13강 151 혼이라고 하는 것이 "진리와 실재가 있는 곳"에 가서 닿으면 진리를 알게 되고,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곳]"에 가면 진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소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가지게에서와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계에서는 빛의 세기가 중요하였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 가지계는 대상의 차이이고 가시계는 정도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어쨌든 글라우콘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태양 빛은 태양 자체가 아니라 태양의 소산인 것처럼 소크라테스가 여기서는 아직 좋음 자체에 대해서는 증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라우콘이 약간 비꼬면서 말한다. "굉장한 아름다움(kallos)을 말씀하고 계시군요"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아직 그렇다, 아직 다 말못했다, 남겨둔 것이 있으니 빠뜨리지 않겠다고 얘기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대화편을 다 읽도록 좋음 자체에 대해서는 증명하지 못한다. 이건 그럴 수밖에 없다. 얼마나 그것에 대해서 중요함을 부여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각성 시킬 수 있을지 언정 그것 자체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어떤 방향으로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 주는 것이 플라톤 철학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은, 보는 장소가 다릅니다. 좋음이 주는 힘에 의해서 보는 장소가 다른 것입니다." 좋음을 가진 사람, 좋음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다른 곳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착하게 될 사람은 벌써 의도하는 바가 다르고 자기가 어떤 방향으로 행동을 해나가는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이 좋음이 주는 힘이다. "태양의 비유에서는 힘만이 서로 상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13강 154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은, 보는 장소가 다릅니다. 좋음이 주는 힘에 의해서 보는 장소가 다른 것입니다. 태양의 비유에서는 힘만이 서로 상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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