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09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제6강(1)

❧ 아테나이의 비기는 전쟁과 페리클레스 연설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의 공격에 맞서 ‘비기는 전쟁’을 시도하고, 적에게 ‘약탈당하지 않았다’는 심성으로 살아온 앗티케의 농민들은 도시로 피난을 간다. 전쟁 첫 해가 지난 후 치러진 장례식에서 아테나이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장엄한 연설을 한다. 그의 연설에는 ‘희랍의 학교’로서의 아테나이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 흐른다.”


❧ 전쟁 방식의 변화, 아테나이 농민들의 심성

 

❧ ⟪옥스퍼드 세계사⟫, 2장(3)

 

2021.08.14 역사 고전 강의 — 09

오늘 《역사고전 강의》 제6강에서는 그 당시 아테나이 민주정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페리클레스의 장례식 연설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옥스퍼드 세계사⟫는 영혼세계, 그리고 사회와 가치에 대한 논평으로서의 빙하 시대 예술을 하겠다.

제6강 95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의 공격에 맞서 '비기는 전쟁'을 시도하고, 적에게 '약탈당하지 않았다'는 심성으로 살아온 앗티케의 농민들은 도시로 피난을 간다. 전쟁 첫 해가 지난 후 치러진 장례식에서 아테나이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장엄한 연설을 한다. 그의 연설에는 '희랍의 학교'로서의 아테나이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 흐른다.

우선 비기는 전쟁을 시작했다. 제5강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아테나이가 가지고 있던, 전쟁자금이 넉넉했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가게 되고, 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장기전으로 밀고가게 되면 아테나이가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페리클레스의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 계산에 따라 비기는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적에게 '약탈당하지 않았다'는 심성으로 살아온 앗티케의 농민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티케의 농민들이 도시로 피난을 갔다는 부분이다. 농민들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심성상태가 다르다. 심성상태는 우리가 마음가짐이다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마음가짐은 일시적이고 짧은 기간동안 유지되는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은데 심성상태는 장기지속적인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사실이 그러하다. 그래서 심성상태라는 말을 섣불리 멘탈리티, 또는 그것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많이 탐구했던 아날학파의 용어를 빌려서 망탈리테라고 하는데 그것을 마음가짐으로 쉽게 번역을 하기가 어렵다. 

"전쟁에 말려든 스파르테는 앗티케 반도로 침공을 강행합니다." 그러나 "스파르테의 예상과는 달리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의 전략에 따라 장기전으로 돌입했습니다." 이게 이제 페리클레스의 전략이다. 농성전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을 굳게 지켜 스파르테 군을 지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군력을 이용해 게릴라 전을 벌이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해군을 운용하려면 노를 젓는 사람들을 고용해야 하는데 돈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전비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비기는 전쟁이라는 것도 조금이라도 전쟁에 대한 확신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급박한 사태가 벌어지면 전략도 그냥 무너져 내리기 쉽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바로 역병이었다고 본다. 

제6강 95 전쟁에 말려든 스파르테는 앗티케 반도로 침공을 강행합니다. 그러나 스파르테의 예상과는 달리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의 전략에 따라 장기전으로 돌입했습니다.

제6강 96 페리클레스는 한편으로 성을 굳게 지켜 스파르테 군을 지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군력을 이용해 게릴라 전을 벌이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앗티케 반도의 농민을 성 안으로 철수시킨다. 정기적으로 함대를 파견하여 에게 해의 동맹국들을 안심시킨다. 그 다음에 펠로폰네소스 반도 후방으로 3단 노선을 보내 적을 가끔 위협한다. 스파르테의 동맹국들에서 활동하는 민주파를 부추겨 내분을 유발한다. 넷째는 오늘날로 치면 민사작전이라고 한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이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인 전략 두 가지와 소극적인 것 두가지이다.  페리클레스가 이런 장기적인 전략을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돈이 많았고 중장 보병으로 종군할 농민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산업구조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농사를 짓고 먹고 살았는데 이제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상업국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농사를 짓고 사람들은 사실 의식의 변화가 도시에서 상업하는 사람들과는 더디고 달랐을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 시기에는 스파르테와 함께 힘을 합쳐서 페르시아 전쟁에 종군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왜 그들은 스파르테와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농토를 벗어나서 도시놈들과 살아야 하는지 어리둥절한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사실은 아테나이 사람들의 생각지도, 마인드맵인 것이다. 오피셜 마인드는 페리글레스의 연설에서 드러나는 것이고, 공식적인 서사, 연설로 드러나지 않은 농민들의 심정을 살펴봐야 하는데 투퀴디데스는 잘 찾아내서 썼다.

"아테나이 인들은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농촌에서 처자와 가재도구를 시내로 옮기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집에서 목재를 뜯어 오기까지 했다. 양떼와 짐 나르는 가축들은 에우보이아와 이웃 섬들로 건너보냈다. 그러나 대부분 농촌 생활에 익숙해 있던 그들에게 이런 이주는 힘든 경험이었다." 중요한 부분이다. 농촌 생활에 익숙해 있던 그들에게 이런 이주는 힘든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들이 사실은 전쟁을 진전시키는데 굉장한 장애물이다. 그때 아테나이 성 안으로 피난와서 있던 농민들에게 페리클레스가 우리 아테나이가 헬라스의 모범이라고 말할 때 '뭔 소리야' 했을 것이다. 그런것들까지 고려해서 전쟁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98페이지를 보면 스파르테는 "펠로폰네소스 군은 남쪽으로 움직여서 엘레우시스와 트리아 평야를 약탈하기 시작하여, 곡물을 잘라 내고 포도 넝쿨과 올리브 나무를 파헤쳤다." 참으로 나쁜 짓이다. 대단한 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올리브 나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있다.  농민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이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6강 97 아테나이 인들은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농촌에서 처자와 가재도구를 시내로 옮기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집에서 목재를 뜯어 오기까지 했다. 양떼와 짐 나르는 가축들은 에우보이아와 이웃 섬들로 건너보냈다. 그러나 대부분 농촌 생활에 익숙해 있던 그들에게 이런 이주는 힘든 경험이었다. ━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권 14장

제6강 98 펠로폰네소스 군은 남쪽으로 움직여서 엘레우시스와 트리아 평야를 약탈하기 시작하여, 곡물을 잘라 내고 포도 넝쿨과 올리브 나무를 파헤쳤다.

아르키다모스 왕은 장기전으로 들어갈 때 생겨난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페리크렐스의 전략도 전략이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아르키다모스의 태도도 만만치 않다. 뭔가 힘든 경험을 하고 있는 앗티케의 농민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앗티케의 농민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아포르테토스 aporthetos' 우리말로 하면 '약탈당하지 않은'이라는 뜻이다. 당시 앗티케 반도에 살던 농부들은 자신들이 직접 마련한 무기를 가지고 중장 보병으로 참전하여 약탈당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스스로 마련한 무기를 가지고 싸워서 자기 땅을 지키던 사람들은 페리클레스라는 사람이 성안으로 들어와 살라고 하고, 내 땅이 올리브 나무와 포도 넝쿨이 유린당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고통스럽다. 이것이 페리클레스의 실책이다. 물론 사회는 중장보병의 사회가 아니라 해군 수병, 상업의 시대인데, 인간의 심성을 생각해보면 앗티케 농민들은 간단하지 않았겠다.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다. 정치라고 하는 것은 아주 올바른 것을 행위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심성을 어루만지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펠리클레스가 무엇을 놓쳤는가를 봐야한다.

제6강 98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포르테토스 aporthetos'라는 말을 거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말로 '약탈당하지 않은'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앗티케 반도에 살던 농부들은 자신들이 직접 마련한 무기를 가지고 중장 보병으로 참전하여 약탈당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는 것은 그 당시 벌어진 일을 알아내는 것에 일차적 목표가 있겠지만 우리가 이것을 알아서 뭐하겠는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일이다. 튀퀴디데스가 헬라스 세계에서 가장 큰 사건에 대해서 쓴다고 했는데 그것을 쓰면서 과연 어떻게 쓰고 있는가, 무엇을 쓰고 있는가를 보고, 동시에 현재 우리에게 벌어지는 사태를 볼 때 무엇을 유심히 봐야하는 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투퀴디데스의 서술을 읽는 이유이다. "아테나이 인들은 이렇듯 오랫동안 여러 개의 독립된 공동체를 이루며 앗티케 지방의 농촌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앗티케가 통일된 뒤에도 그들은 옛날에도 그랬지만 이번 전쟁이 터지기 전의 근래에도 관습을 따르며 대부분 농촌에서 태어나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살았다." 관습을 따르며, 중요한 말이다. "그런 그들에게 가족을 모두 데리고 거처를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더구나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이제 겨우 가산을 복구했기 때문이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던 집과 통일되기 이전 먼 옛날부터 가족이 늘 찾곤 하던 신전을 떠나자니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다.  생활방식 또한 완전히 바꿀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 각자에게 그것은 조국에서 추방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제6강 99 아테나이 인들은 이렇듯 오랫동안 여러 개의 독립된 공동체를 이루며 앗티케 지방의 농촌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앗티케가 통일된 뒤에도 그들은 옛날에도 그랬지만 이번 전쟁이 터지기 전의 근래에도 관습을 따르며 대부분 농촌에서 태어나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살았다. 그런 그들에게 가족을 모두 데리고 거처를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더구나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이제 겨우 가산을 복구했기 때문이다. 살던 집과 통일되기 이전 먼 옛날부터 가족이 늘 찾곤 하던 신전을 떠나자니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다. 생활방식 또한 완전히 바꿀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 각자에게 그것은 조국에서 추방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권 16장


⟪옥스퍼드 세계사⟫ 영혼세계 절을 읽는다. 이는 지난번 서사로서의 예술과 이어지는 부분이다. 83페이지를 보면 예술은 주관적 관념의 힘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지방을 섭취하고 미적·감정적·지적 생활을 하게 되는 토대가 바로 음식생활의 차이에서 나타났다. 추상적 활동의 대표적인 것이 예술 활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아리스토텔레스가 드라마에 대해서, 예술, 창작에 대해서 연구하게 된 것도 벌써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헬라스 지역은 이미 지방이 풍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적 활동에 덧붙여 보면 "종교적 사유와 정치적 사유"이다. 종교적 사유라는 것이 영혼 세계를 다루는 것이고, 정치적 사유가 다음 절인 사회와 가치에 대한 논평으로서의 빙하 시대 예술이겠다. 

"예술가들은 사유의 두 종류, 즉 종교적 사유와 정치적 사유를 엿보게 해주는 사료를 남겼다. 현대의 통념에는 뜻밖일지도 모르지만, 종교는 회의론과 함께 시작되었다."  여기서 회의론이라는 말은 여기서 커다란 의미의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물질의 유일유이한 실재에 대한 의심, 또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전부냐는 의심을 말한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실재, 비록 감각으로 접근할 수 없지만 다른 수단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실재를 발견했을 때, 영혼은 인간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이게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다. "영혼 영역은 미묘하고 놀라운 개념이었다 ━ 물질계의 제약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삶에서 무한히 변경할 수 있고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자유로 나아가는 약진이었던 것이다." 멋있는 표현이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인간은 아주 뻔한 표현,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던 것이었다. 필자는 영혼을 "미래의 자유로 나아가는 약진"으로 말한다. "생활 환경은 시를 자극하고, 경외감을 자아내며, 불멸성에 대한 추정을 불러일으킨다." 영혼 영역은 미묘하고 놀라운 개념이었는데 거기서 관련되는 개념이 불멸성이다. "불꽃은 꺼지고, 파도는 잠잠해지고, 나무는 뿌리채 뽑히고, 돌은 산산이 조각나지만, 영혼은 계속 살아간다." 불멸성이라는 개념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의 영혼과 연결된다. 육체적으로는 불멸하는 인간은 없다. 그런데 인간에게 불멸의 측면이 있다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 불멸의 측면은 바로 인간이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무엇인가. 거칠게 규정해보면 불멸성의 추구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어떤 방식으로 추구하는가. 불멸하는 것에 대한 숭배이고, 추구인데 그러면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겠다. 마음 속으로만 할 수도 있고, 뭔가를 만들어서 그 앞에서 절을 할 수도 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샤마니즘》을 쓴 사람인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불멸성을 추구하는 것이 종교다. 샤머니즘은 불멸성 추구의 한 형식이다. 홀렌슈타인슈타델의 '사자인간'도 있고 87페이지의 사슴으로 변장한 춤추는 사람도 있다.

《옥스퍼드 세계사》 2장 83 예술가들은 사유의 두 종류, 즉 종교적 사유와 정치적 사유를 엿보게 해주는 사료를 남겼다. 현대의 통념에는 뜻밖일지도 모르지만, 종교는 회의론 ━ 물질의 유일유이한 실재에 대한 의심, 또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전부냐는 의심 ━ 과 함께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실재, 비록 감각으로 접근할 수 없지만 다른 수단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실재를 발견했을 때, 영혼은 인간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옥스퍼드 세계사》 2장 84 영혼 영역은 미묘하고 놀라운 개념이었다 ━ 물질계의 제약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삶에서 무한히 변경할 수 있고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자유로 나아가는 약진이었던 것이다. 생활 환경은 시를 자극하고, 경외감을 자아내며, 불멸성에 대한 추정을 불러일으킨다. 불꽃은 꺼지고, 파도는 잠잠해지고, 나무는 뿌리채 뽑히고, 돌은 산산이 조각나지만, 영혼은 계속 살아간다.

샤머니즘은 종교이기도 하지만 예술의 하나이기도 하다. 88페이지를 보면 이해로서의 예술이 있다. 종교는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이 이해한 세계에 대해서 예술 작품으로 표현한 것, 그게 바로 이해로서의 예술이다. 예술이라고 하는 것도 영혼 세계에 대한 하나의 표현 방식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의 '추상' 예술가들처럼 빙하 시대 선배들은 자신이 관찰한 자연의 핵심 속성과 패턴을 포착하려 했지 자연의 외양을 정확히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자연의 핵심 속성과 패턴을 포착해서 표현하는 것 역시 영혼 세계에 대한 표현과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9페이지를 보면 "적어도 3만 5000년 전에 매머드 상아에 조각한, 세계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 알려진 이 조각상은 당시 훌륭하다고 생각한 여성 신체를 묘사한다." 중요한 부분은 "훌륭하다고 생각한"이다. 훌륭하다고 생각해 라고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추상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빙하 시대의 예술 속 여성은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80페이지를 보면 마술이라는 것도 나타났다. "증거가 모호하긴 하지만, 학자들은 마술을 종교와 과학의 기원으로 제시해왔다." 마술이라는 것도 종교라는 것 또는 과학이라는 것을 살펴보는 것들의 뭉뜬그려진 전체로서 제시해왔다.

《옥스퍼드 세계사》 2장 88 오늘날의 '추상' 예술가들처럼 빙하 시대 선배들은 자신이 관찰한 자연의 핵심 속성과 패턴을 포착하려 했지 자연의 외양을 정확히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옥스퍼드 세계사》 2장 89 적어도 3만 5000년 전에 매머드 상아에 조각한, 세계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 알려진 이 조각상은 당시 훌륭하다고 생각한 여성 신체를 묘사한다.

《옥스퍼드 세계사》 2장 90 증거가 모호하긴 하지만, 학자들은 마술을 종교와 과학의 기원으로 제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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