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08 / 제5강(2)
- 강의노트/라티오의 책들 2021-24
- 2021. 8. 16.
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제5강(2)
❧ 페르시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최종 승자
- 페르낭 브로델, “페르시아의 황금”
- 빅터 데이비스 핸슨, “페르시아의 꿈이 이루어진 전쟁”
❧ 전쟁의 원인
- 아테나이와 스파르테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 사이의 긴장
- “희랍 세계의 먼 구석에서 생긴 사소한 사건이 위기를 조성했고... 스파르테 동맹의 구성원들이 말려들기 시작하여”
❧ ⟪옥스퍼드 세계사⟫, 2장(2)
2021.08.10 역사 고전 강의 — 08
오늘은 《역사고전 강의》 제5강 후반부를 읽는다. 전반부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가 어떤 목적으로 쓰여졌는가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서술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퀴디데스의 용어을 빌리면 참된 원인 또는 진정한 원인과 직접적으로 벌어진 사건들을 구별, 구분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것들인데 구별은 서로 겹칠 수도 있는 것들,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86페이지를 보면 도널드 케이건이 정리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큰 흐름, 그 사람이 쓴 목차를 제시하면서 밝혀보이고 있다. 제1부를 보면 전쟁을 향하여이다. 전쟁을 향해가는 사건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제1장이 치열한 경쟁, 이것이 말하자면 깊은 원인 또는 진정한 원인에 해당한다. 그 다음이 제2장 "머나먼 나라에서 벌어진 분쟁"은 에피담노스와 케르퀴라에서 벌어진 분쟁을 얘기할텐텐데 이런 것들이 직접적 원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에 아테나이가 개입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제2부가 페리클레스 전쟁으로 되어 있다. 이때 대부분의 책에서는 이를 '페리클레스 전쟁'이라고 하지 않고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케이건은 '페리클레스 전쟁'이라고 불렀으니 그가 이 사태를 바라보는 하나의 구도가 있기 때문에 그 구도에 따라서 전통적으로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라고 불리던 것을 그는 '페리클레스 전쟁'이라고 부른 것이겠다. 아르키다모스는 스파르테 왕의 이름이고,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의 집정관, 장군이었다. 케이건이 이것을 '페리클레스 전쟁'으로 부른 까닥은 이 전쟁의 목표, 전쟁이 결정되었을 때 비록 스파르테가 아테나이를 침공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전쟁이 짜여진 구도는 페리클레스가 짜놓은 구도에 따라 움직여 갔으니 '페리클레스 전쟁'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짐작해볼 수 있다. '페리클레스 전쟁'이 끝나고 제3부를 보면 15장을 보면 평화의 도래, 그리고 거짓된 평화, 둘째 부분이 니키아스 평화, 즉 페리클레스 전쟁이 끝난 다음에 이때부터가 니키아스 평화가 둘째 부분이다. 니키아스 평화시대가 있고, 시켈리아 전쟁이 있고, 데켈레아 전쟁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대체로 이 구분은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가 제시한 구분을 따라간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이 한가지 있는데 이 부분은 후대의 평가이다. 후대의 평가를 살펴보자면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최종 승자는 '페르시아의 황금'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주의하여야 한다. 계속 읽어 보면 "전쟁이 20년 넘게 진행되면서 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때 페르시아 황금이 유입되어 ━ 아테나이가 약할 때에는 아테나이에게, 스파르테가 약해지면 스파르테에게 전쟁 자금을 주어 ━ 아테나이와 스파르테가 끊임없이 싸움을 계속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두 나라 모두 지리멸렬해졌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가 패배했다. 그런데 진정한 패배는 아니었던 셈이다. 페르시아는 여전히 페르시아는 동방의 강대국이었고 결국 아테나이와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에 비하면 약한 나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케도니아가 결국에는 흥성하게 된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보면 무상하다. 페르시아 전쟁에 이겨서 아테나이와 스파르테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 같은데 그게 보니 아니었다. 역사가 무상하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빅터 데이비스 핸슨은 《고대 희랍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이 전쟁을 '페르시아의 꿈이 이루어진 전쟁'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페르시아가 결국 최종 승자였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제5강 90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최종 승자는 '페르시아의 황금'이었습니다. 전쟁이 20년 넘게 진행되면서 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때 페르시아 황금이 유입되어 ━ 아테나이가 약할 때에는 아테나이에게, 스파르테가 약해지면 스파르테에게 전쟁 자금을 주어 ━ 아테나이와 스파르테가 끊임없이 싸움을 계속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두 나라 모두 지리멸렬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빅터 데이비스 핸슨은 《고대 희랍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이 전쟁을 '페르시아의 꿈이 이루어진 전쟁'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91페이지를 보면 "아테나이 인과 그들의 동맹자들", 이때는 벌써 아테나이 인과 그들의 동맹자들이 있고, 스파르테와 그들의 동맹이 있다. 처음에 페르시아가 침략했을 때 희랍의 여러 폴리스들이 힘을 합했고 그들이 힘을 합해서 페르시아에 맞서서 싸웠다. 그때는 정치적이고 군사적 동맹 단계까지는 아니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동일한 신을 숭배하고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하는 일종의 막연한 문화적 동질감이었는데 페르시아라고 하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니 이때부터는 희랍의 폴리스 사이에 정치적 분열이 일어났고 아테나이와 스파르테라고 하는 강대국을 중심으로 여러 폴리스들이 결집하였다. 그중에서 아테나이 폴리스는 어떤 방식으로 결집했는가. 함대를 중심으로 했다. "독자적인 함대를 포기하는 대신 공동 금고에 돈을 지불하는 편을 택했다" 이게 바로 아테나이 쉬마키아가 움직여간 방식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여러 폴리스들이 아테나이에 전시작전권을 넘기고 가맹비를 지불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에게해에서 자국의 상선들을 어떤 식으로 보호하는가. 상인들의 배를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그 동맹에 가입한 나라도 보호해주는 것 이것이 아테나이 쉬마키아가 움직여가는 방식이다.
제5강 92 "독자적인 함대를 포기하는 대신 공동 금고에 돈을 지불하는 편을 택했다" 구체적인 방식은 이것입니다. 여러 폴리스들이 아테나이에 전시작전권을 넘기고 가맹비를 지불한다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헤게모니아를 쥐고 있으려면 군사적 측면, 시장, 문화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말해서 아테나이 쉬마키아에서는 군사력이 함대이다. 그 함대는 상인들의 배를 보호하고 동맹에 속하는 나라의 상인들도 보호한다. 그런데 되면서 군사력과 교역이 연결되고, 일종의 기축통화가 쓰이기도 했다. 이것을 보니 스파르테가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연이어 일어나게 되면 두려움이 구체적인 사건으로 터져 나가게 된다. 그것은 에피담노스와 케르퀴라에서 벌어진 사건들이다. 이것을 투퀴디데스는 공공연하게 드러난 원인이라고 본다.
제5강 92 아테나이의 세력이 커지니까 스파르테가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로부터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은 에피담노스와 케르퀴라에서 벌어진 사건들입니다.
케이건은 이렇게 말한다. "희랍 세계의 먼 구석에서 생긴 사소한 사건이 위기를 조성했고, 이 위기는 이제 희랍 세계 전체의 안정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에피담노스와 케리퀴라만이 관련되었을 때에는 문제는 순전히 지역적인 것이었다. 둘 중 누구도 희랍을 지배하는 두 국제 동맹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코린토스가 개입하고, 스파르테 동맹의 구성원들이 말려들기 시작하여 케르퀴라가 아테나이에 도움을 요청하자, 중대한 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말려들기 시작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다. 스파르테 동맹의 구성원들이 말려들기 시작했을 때 케르퀴라가 아테나이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고, 아테나이가 개입한다. 그러면 스파르테 동맹의 구성원들, 즉 펠로폰네노스 동맹이 말려들기 시작했는데 케르퀴라가 아테나이에 도움을 요청한 것은 '개입'이다. 한쪽은 말려드는 것이고, 한쪽은 개입이다. 즉 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입은 자신이 명시적으로 아는 사태인데 말려드는 것은 알아내기 어렵다.
제5강 93 희랍 세계의 먼 구석에서 생긴 사소한 사건이 위기를 조성했고, 이 위기는 이제 희랍 세계 전체의 안정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에피담노스와 케리퀴라만이 관련되었을 때에는 문제는 순전히 지역적인 것이었다. 둘 중 누구도 희랍을 지배하는 두 국제 동맹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코린토스가 개입하고, 스파르테 동맹의 구성원들이 말려들기 시작하여 케르퀴라가 아테나이에 도움을 요청하자, 중대한 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 케이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1쪽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했을 때 그 누구도 그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번져 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책 옆에 몽유병자들이라고 책 제목을 적을 것.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을 읽어야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 아테나이는 당시 화페 단위로 약 6천 탈란트 ━ 오늘날로 치면 30억 달러, 즉 3조원 정도 ━ 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넉넉한 전쟁 비용이 있었다. 그래서 이 전쟁이 페리클레스가 구상한 것처럼 장기전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케이건은 페리클레스 전쟁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일 것이다.
제5강 93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 아테나이는 당시 화페 단위로 약 6천 탈란트 ━ 오늘날로 치면 30억 달러, 즉 3조원 정도 ━ 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넉넉한 전쟁 비용을 비축해 두고 있었습니다. 전쟁비용이 많다는 것은 장기전에 돌입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페리클레스가 구상한 것이 바로 이러한 자금을 바탕으로 한 장기전이었습니다.
《옥스퍼드 세계사》 제2장 두번째 절 서사로서 예술을 읽겠다. 동굴 벽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예술적 기교는 성숙한 전통이었으며, 노련하고 전문화된 손길이 이미지를 생산했다." 소묘도 있고 조각상도 있다. 그런데 이런 소묘와 조각상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학계에서는 그것이 진짜임을 인정하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다. 너무나 현대적이기도 하고 피카소 같은 추상화와 다를 바 없는 것이 그려져 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그런 작품들이 남아 있게 된 이유는 깊은 공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세계사》 2장 79 예술적 기교는 성숙한 전통이었으며, 노련하고 전문화된 손길이 이미지를 생산했다.
《옥스퍼드 세계사》 2장 81 빙하시대 유럽의 그림 작품들이 잔존한 이유는 거주자들이 기후에 쫓겨 들어간 피신처에서, 그리고 분명 접근할 수 없어서 선택한 깊은 공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아주 명백하게 빙하시대의 작품이었음이 확인된 다음에는 예술로서 삶이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즉 예술은 삶의 모방이다라는 말이다. 모방이라고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것럼 꼭 드라마나 서사시나 음악이나 무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방으로서의 예술은 빙하시대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삶의 모방,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것이 아니다. 오래된 개념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인간의 성격과 감정과 행동을 모방한다. 그런데 행동은 성격과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니까 행동을 모방한다고 규정했을 뿐이지 모방으로서의 예술 개념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82페이지의 "예술로 삶을 재현한다는 생각의 기원에 대한 단서", 즉 예술로 삶을 재현한다는 것이 모방이다. 역사책을 읽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배운 것을 알 수 있다. 시학을 읽을 때에도 도움이 된다. "예술은 분명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마술적·의례적 쓰임새를 가지고 있었다." 예술은 쓸모는 첫째 이야기를 들려준다. 후손들이 그것을 보고 예술을 통해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마술적·의례적 쓰임새 역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예술은 이야기다. 그리고 "사냥꾼의 기억술", 기억이라는 것은 기억해두었다가 이야기하는 것, 모두 서사로서의 예술이다. 83페이지의 "예술적 미적 효과는 그 어떤 실용적 기능도 넘어선다." 서사는 하나의 쓸모다, 실용적 기능인데 이 실용적 기능을 넘어서는 것이 "정신을 자극하고, 상상을 담아내고, 행동을 고무하고, 관념을 나타내고, 사회를 반영하거나 사회에 도전하는 새로운 종류의 힘.", 이것이 추상적 관념이라고 하는 힘이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를 하게되면 그 이야기가 하나의 추상적 관념이 된다.
《옥스퍼드 세계사》 2장 82 예술로 삶을 재현한다는 생각의 기원에 대한 단서, 즉 2만 년 전에 사람 손과 도구를 스텐실 기법으로 그린 작품들이 오늘날 케니프의 암석 표면에서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다.
《옥스퍼드 세계사》 2장 82 예술은 분명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마술적·의례적 쓰임새를 가지고 있었다. 가령 마치 상징적인 제물인 양 동물 이미지 위에 여러 차례 금을 긋거나 상처를 냈다. 동굴 벽화를 사냥꾼의 기억술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타당한 논거도 있다.
《옥스퍼드 세계사》 2장 82 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적 미적 효과는 그 어떤 실용적 기능도 넘어선다.
《옥스퍼드 세계사》 2장 83 예술은 정신을 자극하고, 상상을 담아내고, 행동을 고무하고, 관념을 나타내고, 사회를 반영하거나 사회에 도전하는 새로운 종류의 힘이었다.
서사로서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두가지다. 기억이기도 하고, 동시에 추상적 관념이기도 하다. 중요하다. 그런 추상적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학문이다. 그것이 집단에게 기억을 통해서 계승된다. 그렇게 계승되어서 추상적 관념의 위력이 생긴다. 그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재미있는 것은 "예술가들이 먹은 짐승의 지방", 예술가들이 음식을 먹어서 지방이 있는데 그 지방이 있기 때문에 삶의 여유가 생기고 그런 여유로부터 미적인 감정적인 지적 생활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보면 음식, 지방질로부터 미적·감정적·지적 생활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선적인 지나친 일반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추론을 더 해보면 삶의 풍요로움과 추상적 활동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음식(지방) → 미적·감정적·지적 생활(삶의 풍요와 추상적 활동의 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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