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 로제 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 10점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지음, 이상길.배세진 옮김/킹콩북

 

서문 생생한 목소리로 6

1장 사회학자의 직능 23
2장 환상과 인식 48
3장 구조와 개인 71
4장 하비투스와 장 91
5장 마네, 플로베르, 미슐레 112

옮긴이 후기 135

 



24 피에르 부르디외: 그렇죠. 저는 사회학이 불편함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자로서 제 경험을 말하자면 박해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피포위 망상을 얼마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박해자들의 공격 간에 이런저런 모순이 있다는 사실 덕분에 그런 느낌이 어쨌든 사그라집니다. 특히 제가 보기엔 사회학에 가해지는 정치적 성격의 비난들에 적어도 하나의 미덕은 있는 것 같습니다. 자가당착에 빠진다는 미덕말입니다. 그 덕분에 이런 비난들이 [그것들을 객관화하는 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을 [역설적으로] 먹여 살립니다. 그래요. 사회학자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샤르티에: 맞습니다. 왜냐하면 사회학은 우리가 보기에 사회세계에 관한 분석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런 성찰성을 최대한 발휘해 사회학을 생산하는 사람, 즉 사회학자를 그 자신이 기술하고 있는 장 안에 다시 기입하는 학문이라서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학자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이는 사회학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도 종종 견딜 수 없는 자기 이미지를 돌려주는 탓에 그렇기도 하지만, 사회학자를 [사회학적] 분석 안에 연루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 바로 그렇죠. 저는 그와 같은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학자가 아닌 사람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사회학을 설명할 때, 저는 두 가지 가능한 전략 사이에서 갈라지곤 합니다. 그중 하나는 사회학을 역사학이나 철학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러니까 학구적인 분과 학문으로 소개하는 전략입니다. 이 경우에 사람들은 흥미를 보이긴 하지만 정확히 틀에 박힌 반응을 보입니다. 반면에 다른 전략에서는 사회학의 고유한 효과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청중을 자기분석의 상황에 집어넣으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때부터는 제 자신이 청중의 조력자인 동시에 희생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37 피에르 부르디외: 무언가 실재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댜 예를 들어 '정치'는 아주 최근에야 역사적으로 구성된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정치 장이라고 부르는 세계는 사실상 19세기에 발명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분명 토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너무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군요. 지금 제 앞에 엄청난 역사학자[샤르티에]가 버티고 있잖아요. 아무튼 역사를 사유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 단어, 개념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산물입니다. 제가 볼 때는 분명히 그래요.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확실히 역사학자는 시대착오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학자는 요즘 널리 쓰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 단어가 아예 없었거나 다른 의미로 사용된 과거의 실재를 조명합니다. 아마도 유행에 따르거나, 자기 작업에 흥미를 더하려 하거나, 아니면 그냥 모르고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이런 오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찰성이 더욱더 중요한 것이죠.

49 피에르 부르디외: 방금 하신 말씀과 관련해, 제가 한 문장으로 답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 자유, 주체, 인간 등등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이들이 사회적 행위자를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가둔다는 점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들의 기대와 달리] 결정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경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라는 환상입니다. 더욱이 모든 사회계층 가운데 자유라는 환상에 특히 경도된 집단이 있습니다. 지식인들 말입니다.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이런 사회학적 역설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아마도 제 작업이 지식인들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을까 합니다.

56 피에르 부르디외: 사회학자의 문제는 그가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들을 말하려 애쓴다는 점입니다. 특히 사회학자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즉 시간적 여유와 문화 자본이 있는 이들]은 알려 하지 않는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활동이 저를 때때로 괴롭게 합니다. 사회학자로서 제 존재의 정당성에 관해 자문하고 과학적 작업의 기능에 관해 고민에 빠지는 것이죠. 이를테면, '사회 세계에 관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정말로 좋은 일인가? 비밀이 없는 사회세계는 정말로 살 만한 곳인가?'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문화가 무엇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노동이 무엇인지 등에 관해 우리가 좀 더 정확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면, 그래서 [인식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수많은 종류의 고통과 비참이 언제나 마르크스주의의 거대한 탄식 아래서 잊히는 대신에, 급격히 개선되고 사라지거나 적어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62 피에르 부르디외: 사실 거기에도 두 가지 질문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사회학은 상징적 공격, 또는 상징적 조작에 저항하는 자기 방어의 도구를 제공합니다. 이런 도구는 무엇보다도 전문가들이 생산하는 담론에 저항합니다. 제가 여러 번 말했듯이, 사회학자가 상징생산에 종사하는 사람, 예를 들어 언론인, 주교, 교수, 철학자를 믿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상징생산의 종사자들은 사회세계가 이렇다고 그럴싸한 담론을 제공하면서 말로 먹고 삽니다. 사회학자는 이런 담론의 외양을 애써 조심합니다. 우리 사회학자가 하는 일 가운데 많은 것은 실상 사회세계에 관한 일상적 담론, 헛똑똑이들의 수사학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는 상징적 호신술의 교사입니다. 문제는 사회학차가 생산하는 이런 자기 방어의 도구들이 도용되고 심지어는 악용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회학이 광고의 일부, 마케팅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옮긴이 후기 
139 한마디 덧붙이자면, 원제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인 이 책이 본래 라디오 방송 내용을 근간으로 한 텍스트라는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나는 프랑스가 인문사회과학의 세계적 권위를 누릴 수 있는 저력이 그 사회 특유의 지성적 풍토에서 나온다고 본다. 지성주의의 형성과 유지에는 당연히 교육제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겠지만, 프랑스퀼튀르 같은 공영미디어 역시 크게 이바지해 왔다. 사실 샤르티에는 프랑스퀼튀르에서 오랫동안 「역사의 월요일」을 맡아 진행한 경력이 있다.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신간이나 주제를 놓고 사회자와 역사학자가 함께 토론하는 이 프로그램은 1966년부터 2014년까지 50년 가까이 방송되었는데, 샤르티에 말고도 자크 르 고프, 미셸 페로, 아를레트 파르주 같은 일급 역사학자들이 사회를 보았다. 

이처럼 프랑스에는 지식인들을 스튜디오에 데려다 놓고서 시사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이나 잡담을 늘어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현재 진행하는 연구의 전문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토론하게 만드는 프로그램들이 있고 채널들이 있다. 대단한 청취율, 시청률을 올리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프로그램들이 중요한 콘텐츠로 여겨지며 꾸준히 제작되고 방송되는 현실은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지식인들을 그들의 역할과 기능에 걸맞게 대접하면서 그들이 연구 결과를 널리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 작업의 의의를 그들 자신에게나 일반 공중에게 거듭 일깨워 준다. 그것은 지성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이해관계에 부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지성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하고 사회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로서 보전한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식 지성주의의 '환상'이 작동하는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환상 없이는 인문사회과학의 지성이 실제로도 전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부르디외가 생전에 프랑스 방송의 상업화 추세를 가차 없이 비판하고 공영 문화채널과 역사채널 둥을 옹호하는 활동을 했던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았을 터이다. 약간 엉뚱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이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과 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식, 그리고 그 밑에 깔려 있는 반지성주의를 한 번쯤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면 그 또한 의미있는 일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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