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라 기조: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리(理)와 기(氣)로 해석한 한국 사회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10점
오구라 기조 지음, 조성환 옮김/모시는사람들

1장 ─ 한국, 도덕 지향적인 나라
2장 ─ 상승을 향한 열망
3장 ─ ‘리’와 ‘기’의 생활공간
4장 ─ ‘리’와 ‘기’의 문화체계
5장 ─ ‘리’와 ‘기’의 사회구조
6장 ─ 리기의 경제·정치·역사
7장 ─ 리기와 세계·일본

 


20 조선 혹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철학 그 자체가 영토·사람 ·주권으로 응결된 것이 조선 혹은 한국이다. 여기에서 철학이란 '리(理)'를 말한다. 주자학에 의한 국가 통치 이후, 이 반도를 지배해 온 것은 오로지 '리'였다. 항상 '하나임'을 주장하는 '리'였던 것이다. '리'란 무엇인가? 보편적 원리이다. 그것은 천(天), 즉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사회의 도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된, 아니 일치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절대적인 규범이다.

23 우리는 마르크스가 알았다면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를 정도의 가장 순수한 형태의 '철학'이 이 땅에 숨쉬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즉 조선(및 중국)에서 학문이란 세계를 해석하고 동시에 변혁하며 나아가서는 지배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철학이다. 조선에서는 양명학을 단호하게 배척하였다. '성즉리(性卽理)'라는 주자학의 명제를 '심즉리(心卽理)'라는 양명학의 명제로, 단지 글자 하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권력의 중추가 일시에 전복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33 조선 시대의 주자학적 인간관·자연관은 '리' 와 '기'로 설명된다. 먼저 번거롭지만 이 용어를 확실히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리'란 오늘날로 말하면, 진리 · 원리 · 윤리 · 논리 · 심리 · 생리 · 물리 등의 총칭이다. 이것은 '리'가 근대에 들어서 서구의 영향을 받아 분쇄되고 세분화된 결과인데, 그 이전에는 찬연히 일체화된 빛나는 하나의 '리'였다. 그것은 보편적인 규범이자 도덕성이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심리학이나 물리학은 도덕 지향적인 것이어서 서양근대의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리'는 천리로서 유일하고 순선하며, 모든 존재는 하늘로부터 '리'를 부여받고 있다. 주자학은 '성리학'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에서는 인간의 성(性)은 원래 '리'라고 본다. 즉 도덕적으로 완벽한 선이라고 하는 성선설의 철학이다.

34 '리'는 형이상학적 원리이고 '기'는 형이학적 재료이다. 따라서 인간도 '리'와 '기'가 합쳐져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육체는 '기'이고 인간으로서 도덕성은 '리'이다.

75 민족으로서의 한국인은 한국 민족의 역사 · 문화의 정통성 · 정당성을 '리'로 규정하는 교육을 받음으로써 한국인 이외의 사람들과 구별된다. 그리고 이 '민족리'를 부정하는 자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이 나라의 표면에서 배제된다. 또 국민으로서의 한국인은 민족리를 널리 부여받은 '한민족' 중에서 특히 대한민국의 정통성 · 정당성을 '리'로 규정하는 교육을 받아, 그 '리'에 근거한 법률 등의 규범 틀에 머물러 있는 자로, 한국인 이외의 사람들과 구별된다. 이것은 특히 북한과의 배타적인 관계에 의해서 성립되고 있는 '리'이다. '국민윤리' 같은 교육이나 '국가보안법'이라는 법률 등에 의해, 이 '국민리'는 국가권력이 유지하고 있다.

119 한국에서 '물건(物)'은 오랫동안 〈리=보편적 도덕〉으로부터 버려진 천한 존재였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인간도 천하다고 여겨졌다. 일본의 경우에는 상품 하나하나에 정성과 고마움이 담겨 있어 물건을 사는 사람도 선물하는 사람도 그 정성과 고마움으로 교감하는 관계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품에 담겨 있는 것은 정성이 아니라 '한'이었다. 〈리=보편적 도덕〉에서 소외된 자가 〈한=동경과 비애〉를 물건에다 푸는 것이다.

131 한사회의 주역은 무엇이었는가? 첫째도 지식인, 둘째도 지식인, 셋째도 지식인이었다. 이것은 조선 시대부터 1900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사회의 커다란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일본인은 한국의 지식인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131 한국의 유교 연구자 · 역사 연구자 사이에서는 조선 시대의 지식인을 가리킬 때 '양반'이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사대부'라는 말을 애용한다. 또한 한국의 서민들 사이에서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의 유형은 '양반'이 아니라 '선비 '이다.

145 1960년 대 이래의 한국의 민주화운동 · 반독재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사대부 지향과 선비 지향이라는 두 측면의 산물이다. 전자는 군인 정권에 대항하는 문(文)의 정치권력 지향이고, 후자는 독재 부패정권에 대한 도덕적 결벽 지향이다.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전자는 정치 투쟁을 통해서 정치가가 되는 것과 같은 현실적인 권력을 지향하여 마침내는 문민정권을 성립시켰다. 이에 반해 후자는 어디까지나 비판 세력으로서 권력이나 부에는 다가가지 않고 재야에서 몸을 청결하게 했다.

187 변혁이란 낡은 리에서 새로운 리로, 리 자체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일단 변혁이 성공하면 새로운 리로 쓰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곧바로 사회를 구체적으로 바꿔 나간다. 이것이 개혁이다. 개혁은 그 사회의 구성원을 교화시켜 가는 과정이다.

231 한국의 고민 중의 하나는 중국이라는 보편과 일본이라는 특수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이다. 특수에 맞서서는 보편을 무기 심아 능수능란하게 나오고, 보편에 맞서서는 그 보편의 정수를 손 안에 쥐고 순도를 가지고 싸운다. 이것이 종래의 전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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