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교화 과정 -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너머북스 |
한국어판 서문
감사의 말
서론 사회와 이데올로기
1장 신유학 수용 전의 과거, 고려 사회의 재구성
2장 신유학, 조선 초기 개혁 입법의 이데올로기적 기초
3장 종법과 계승 문제, 그리고 제사
4장 상장례의 변화
5장 상속, 균분에서 장자 우대로
6장 신유학의 입법화와 여성에게 일어난 결과
결론 종족사회의 출현
저자 후기
옮긴이 개정판 후기
옮긴이 초판 후기
부록1 친족용어 풀이와 개념
부록2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연구 업적
21 한국 사회의 재조직화가 엄청났음을 보여주려면 17세기에 나타나서 20세기까지 존속한 한국 사회의 특징을 간단히 묘사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바로 이러한 사회상이 '전통 한국사회'라는 통념이 되었으며, 이것이 아주 특별한 발달 과정을 거친 최종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종종 잊혀졌다.
21 조선 후기 한국 사회의 특징은 고도로 구조화된 부계 출계집단을 기초로 한 친족제도이다. 이러한 부계 종족은 자신들의 공동 출계를 실제 또는 가상의 부계 조상을 정점으로 한 부계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안동 김이라든지 전주 이처럼 같은 성과 본관으로 자신들의 집단을 동일시하였다. 종족(그리고 가족)은 적실에서 태어난 장자가 형성하는 직계와 적처의 차남 이하 방계로 구성되었다. 첩의 아들인 서자는 부차적 지위 때문에 종족구성원으로서 자격이 불충분했다. 그리하여 종족의 영속성은 장자상속으로 지속되었으며 엄격한 종족 외혼을 지켰다. 이러한 집단의 규모는 자신들의 출계가 그에서 나왔다고 내세우는 조상들의 명성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졌다.
24 족보는 공동 출계를 입증하는 데 중요하였다. 족보는 대부분 1600년경 이후 나타났으며, 1930년대 초기까지도 가장 자주 출간하는 인쇄물이었다. 족보는 공동출계를 입증하는 일이 정부관직을 얻거나 혼인 연대를 맺는 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수도 거주 출계집단이 주도해 편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가까운 친척과 공동 조상의 자손이라는 유대감을 배양함으로써 정치 세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과 권력을 과시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가까운 친척 가운데 일부는 지방에 거주했지만, 지리적 분산이 반드시 같은 종족이라는 정체 의식을 허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98 가장 특징적인 거주 형태—한 가지만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고려의 경우 처가 거주제도였다. 신랑은 신부의 집으로 옮겨갔고 아들 또는 손자까지도 종종처가에서 낳아 성장지켰다. 이러한 제도는 평생 지속되며 항구적이었고, 처가 결국 남편 집으로 옮겨갈지는 확실히 결정지을 수 없었다.
99 고려 여성들에게 경제력의 원천은 남자 형제들과 나누어 갖는 상속권이었다. 상속권을 부여받는 여성은 매력 있는 신부일뿐만 아니라 그 가문의 중요한 구성원이기도 했다.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딸이나 누이가 혼인한다고 해서 가문이 이들을 저버리는 것은 가문에 대한 이해에 맞지 않았다. 오히려 사위나 매부를 신부 가문으로 데려오는 일은 필요하고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118 처의 재산은 오직 자신의 아이를 통하여 남편 가족에게 넘어갔다. 만약 아이가 없다면 재산은 처가 본래 출생한 집단으로 다시 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결코 남편 집안의 구성원이 되지 못했으며, 혼인했음에도 영원한 국외자로 남아 있었다. 이와같은 고려시대 사회생활은 전형적인 공계의 특징을 보여준다. 형제자매는성性과 관계없이 똑같은 지위를 누렸으며, 형제자매의 유대는 혼인에 의한 유대와 반대방향을 향하였다.
177 유학자들은 고유 전통이 지속되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하였다. 이 과정은 중국의 사회제도를 모방하는 데 집중된 초기 사업부터 유교를 한국의 사회 상황에 융합하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는 것까지를 포함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관습'이라는 표현에 포함된 문화적 정체성의 명확한 개념을 정비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결국 사회적 유교의 한국적 형태를 설명하는 틀을 제공해준 것은 바로 이같이 확장된 형태의 신유학철학이었다.
180 한국에서 유교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종법을 사회기반으로 이식하여, 출계집단 안에 부계친 의식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제사보다 더 적절한 방법은 없었다. 제사는 단순히 죽은 사람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친족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종교적 영역이기도 하다.
184 송나라 신유학자들은 강력한 부계친 이데올로기를 공식화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표현이 조밀하게 조직된 단계 출계집단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 집단에 일종의 일체감을 부여하는 공동 행위의 하나가 바로 조상에 대한 의례, 즉 제사였다. 제사를 통하여 그 집단의 기가 활성화되고, 가계는 제사를 통하여 더욱 강화된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후손은 조직화되었고, 같은 선조의 기로 결합되었다. 이 집단은 변화하는 세대의 자연 법칙에 따라 내적 원동력을 발전시키는 반면, 바깥세계를 향한 안정된 하나의 단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송대 신유학자들의 관념은 고대 중국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시대에 뿌리내리는 데도 성공하지 못한 매우 이상적인 체계였다.
193 『주자가례』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것을 장자상속으로 규정한 반면, 고려의 관습은 형제 상속에 바탕을 두었다. 조선초기 입법가들이 가장 해결하기 힘든 과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수평 지향적 사회에 장자상속이라는 수직적 원칙을 이식해야 했던 것이다. 입법가들은 오직 타협만으로 이 일을 성공시켰다.
270 15세기에는 풍수지리에 따라 묏자리를 정하는 일이 점차 늘어났다. 고려시대에도 풍수지리가 널리 이용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를 위해 묏자리의 중요성이 커졌으므로 좋은 묏자리를 잡기 위한 풍수지리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308 장자를 경제적으로 우대해 봉사자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세습 재산의 균등 상속 관행이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남은 재산 가운데 봉사조를 미리 책정한 것이 불균등상속을 이끈 것은 아니지만 17세기 후반의 상속문서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은 장자 상속분의 지속적 증가는 나머지 형제자매들에게 아주 적은 몫에 만족하도록 만들었다.
344 조선시대 고유의 전통의식 중에서 혼례 의식만큼 유교화에 저항한 것은 없었다. 주자의 모델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근원적인 갈등은 고려시대와 새 왕조에서 오랫동안 만연한 부처제 관행이었다.
350 여성에 대한 교육은 교화였다. 교화목적은 중국 고전을 통해 남성 중심 사회의 이상을 여성에게 주입하고, 혼인 생활에 필요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있었다. 유학자들이 제시한 행동 규범은 개인차를 허용하지 않는 완고함이 있었다. 유교사회에서는 특정한 여성을 추앙했는데, 이들은 개성이 아니라 유교 이데올로기가 원하는 틀에 얼마나 완벽했느냐에 따라 선정되었다.
385 서자 차별은 부분적으로 한국의 제사에서 사용되는 규제 방식의 직접적 결과이다. 중국에는 이와 대응하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받더라도 서자는 모친의 지위가 낮아서 계보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 유대가 약했으므로 서자 출계집단은 서자를 주변화했다. 그러므로 서자는 기껏해야 자신의 아버지 계통을 잇는다는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나, 조상을 돌보는 일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395 한국인은 유교의 평등주의적 요소를 분명하게 인식하였으나 이 이념은 그들 사회의 전통적 위계질서와 기본적으로 타협할 수 없었다. 중국과 한국의 차이는 사회조직과 관련해 신유학의 가르침을 읽는방식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중국인은장자상속으로 영속화되는 대종과 소종에 대한 주자의 엄격한 체계를 잊는 방향을 선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송대 사회의 평등주의적 경향과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한국인 고려 사회에서도 공통적이었던 출생에 따른 지위 귀속을 더 좁히는데 적합한 기획으로 신유학의 사회적 청사진을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
399 사대부들은 스스로 하나의 사회집단으로 한정짓기 위해 구성원에게 분명한 위치를 부여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소규모 집단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회체계를 채택했다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중국의 사회적 모델은 모든 이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 모델은 단지 사대부만이 자신들의 이해에 맞춰 해석하고 동화하도록 정해졌다. 심지어 그들에게조차 종족멘탈리티가 또 하나의 특질이 되기까지 여러 세대가 걸렸다. 그렇지만 처음에 사대부들이 숭배한 소규모 집단은 조선 왕조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견지한 세습같은 오래된 사회적 가치에 체계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지지하는 사회 지위와 이것이 수반하는 특권을 다음 세대로 전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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