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큉: 음악과 종교 ━ 모차르트 - 바그너 - 브루크너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1. 8. 16.
음악과 종교 - 한스 큉 지음, 이기숙 옮김/포노(PHONO) |
한국어판 서문
서곡: 음악과 종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초월의 흔적들
리하르트 바그너: 구원을 향한 열망
안톤 브루크너: 신앙의 교향악
피날레: 예술과 의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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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초월의 흔적들
57 모차르트의 신앙 태도와 관련된 문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아무리 회의적인 분석가들이 탐정에 버금가는 작업을 하고 정신분석적인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모차르트에게 심각할 정도로 ‘불리한 사실'이나 어떤 추문록을 쓸 만한 자료들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비판자들과 옹호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대 논쟁에 내가 여기서 끼어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하튼 우리가 낼 수 있는 결론은 이렇다. 인간과 신에게 절망하고 '포기'한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 날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66 그 반대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혼자든 혼자가 아니든 음악에 몰입한 특정한 순간에 감수성 예민하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앞에서 내가 말한 이성적 믿음 혹은 이성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활짝 열어 놓는 상황이 주어진다. 그러면 가령 〈클라리넷 협주곡〉의 아다지오 악장에서 완전히 내면으로 침잠하는 순수한 소리, 그러면서도 우리를 감싸 안는 무언의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마음속에서 전혀 다른 뭔가를 예리하게 감지한다. 그것은 무한히 지속되는 아름다움의 소리이고, 우리를 뛰어넘으면서도 '아름답다'는 말로는 결코 본질을 꿰뚫을 길 없는 무한성의 소리다. 그것은 비밀의 암호이자 초월의 흔적이다! 우리는 그 흔적을 인지할 수 있지만, 반드시 인지해야 하는 건 아니다. 여기에 강요란 없다. 내가 마음을 열면 그 무언으로 말을 하는 음악적 사건 속에서 나는 사람의 말소리로는 전달되지 않는 신비와 접촉한다. 음악을 체험하는 그 경이롭고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에 나는 아래를 알 수 없는 깊이와 위를 알 수 없는 높이의 현존을 직접 느끼고, 알고, 경험한다.
103 이 모든 것을 살펴본 결과, 모차르트의 성음악이 비록 신학적인 성찰이 없었다고 해도 음악으로 울려 퍼지는 전례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창의성과 정밀함의 대가인 모차르트가 자신의 음악에서 신학적으로도 뭔가 특별한 것, 참된 보편적인 것을 표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삶의 모든 부정적인 것까지 자신 있게 끌어안고 구원을 확신하는 위대한 긍정이다.
리하르트 바그너: 구원을 향한 열망
145 이것이 〈반지〉의 결말을 물어본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란 말인가? 그러면 리하르트 바그너는 그의 대작 〈반지〉의 파국적인 결말에 이론서로만 답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종교와 예술〉이라는 논문은 독립된 글도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새로운 음악극, 즉 〈파르지팔〉을 이론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쓴 글이다. 〈파르지팔〉은 더도 덜도 아닌 정확히 '무대 신성 축전극'이어야 했으며, 그것도 갱생한 인류를 위한 음악극이어야 했다! 바그너가 생각하기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숭고한 신비'는 '오락'을 위해 평소에 '부도덕'을 제공하는 일반 무대가 아니라 바이로이트에서만 공연되어야 했다.
146 이상향적인 미래상을 보여주는 것은 〈반지〉가 아니라 무대 신성 축전극 〈파르지팔〉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종교만이 아니라 특히 (많은 불교의 색채가 가미된) 기독교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르지팔〉이 원래 의도했던 '마지막 구원'을 보여준다.
198 최종적인 '신들의 황혼'의 가능성에 직면한 지금, 다시 말해 권력의 절대화를 통해 스스로 신이 된 인간의 자기 파괴 가능성에 직면한 지금, 희망의 메시지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권력이라고 해서 반드시 파괴적일 필요는 없고 〈신들의 황혼〉에서처럼 몰락해야 할 이유도 없다. 권력은 연민과 사랑으로 정화될 수 있으며, 지배가 아니라 섬김에 이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파르지팔〉이 주는 '메시지'다. 구원의 이 조건이 반드시 자살(브륀힐데처럼)과 신들의 죽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또 구원은 순전히 내세의 일만도 아니다. 〈파르지팔〉의 내용을 따른다면, 구원은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곳, 고통당하는 인간과 동물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지혜와 참된 깨달음과 이 세상에서의 새로운 섬김으로 이끄는 곳,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안톤 브루크너: 신앙의 교향악
238 전위음악가로서의 브루크너는 구속 없이는 자유도 없으며 역사 인식 없이는 훌륭한 새로운 음악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현대의 작곡가들이 더 이상 베버나 바그너의 오페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또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처럼 형식을 위협하는 주관성과 감성적으로 고양된 표현과 소리의 황홀경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러나 반대로 쇤베르크의 노선에서 발견되는 질서와 객관성과 수학적 특성과 구성적인 것들이 어느덧 전자음악 작곡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으면서 다시 원초적인 소리 및 선율의 체험과 새롭게 이어져야 한다면, 과연 어떤 음악이 나와야 할까?
264 예술 작품은 아주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기도 하지만(공공시설에 설치할 조각과 초상화와 공간 장식을 위한 주문 작품),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해서는 안 된다! 예술 작품은 내적으로 비목적 지향성과 비유용성과 무익과 유희의 요소들이 지배해야만 예술이다. 목적은 없으나 목적에 맞는 것을 우리는 칸트의 역설적인 표현에 따라 '아름답다'고 부를 수 있다. '진실'이 내재적으로만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다. 예술 작품은 존재하기 위해, 마음에 들기 위해, 드러나기 위해 창작된다.
피날레: 예술과 의미
285 자율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뿌리내림을 향해, 새로운 토대를 갖춘 확실성을 향해, 새롭게 자리 잡은 근원에 대한 신뢰를 향해 전진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예술은 끊임없이 허무주의로부터 위협받는 이념적이고 세속적인 예술이 아니라 얼마든지 세속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의미의 근원 속에 내밀한 토대를 갖춘 예술이다. 그런 예술은 (베크만과 슐레머 같은 구상예술이든,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같은 비구상예술이든) 가령 빛과 공간을 형상화함으로써 모든 사물을 감싸 안는 신비의 차원을 예감하게 한다. 또 그런 예술은 신학자 파울 틸리히가 입버릇처럼 말한 "무조건 나와 관련 있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287 나는 더 이상 인본주의적이지 않은 문화에서 예술의 질병과 죽음을 이야기하며 이 글을 시작했다. 이제 인본주의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새로운 인간적인 문화에서 예술의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며 글을 맺고 싶다. 그렇다. 나는 새롭게 약동하며 새로운 삶의 기술에 봉사하는 예술을 믿는다. 더 인간적이고 세로운 삶의 기술에 봉사하는 살아 있는 예술을 믿는다. 삶의 기술에는 완결의 전주곡으로서 죽음의 기술도 포함된다. 나는 확신한다. 오늘날에도 예술은, 그리고 예술 작품은 위대한 의미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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