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13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16강, 제17강

III 아리스토텔레스: 희랍 형이상학의 체계적 완결
앎의 체계와 궁극적 실재 | ⟪형이상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같은 점과 다른 점
둘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형이상학의 규정

❦ 제16강: ⟪형이상학⟫의 구성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와 형이상학의 위치
신학, 형이상학, 존재론

❦ 제17강: 앎의 종류와 단계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
감각을 통한 앎, 기억, 경험, 기술, 학문적 인식
논증적 지식인 학문적 앎과 직관적 앎인 누스nous의 결합에서 얻는 지혜(sophia)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13

《철학고전강의》 16강을 읽는다. 제16강: ⟪형이상학⟫의 구성, 그리고 제17강: 앎의 종류와 단계들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3부인데 "희랍 형이상학의 체계적 완결"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체계적 완결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체계라고 하면 저 맨 위에 아주 추상적인 차원의 제일원리부터 시작해서 그것을 꿰는 맨 아래에 놓여있는 것까지 그 원리에 의해서 놓여 있다고 할 때 대개 체계적이다 라고 말한다. 대개 이런 체계가 잡혀있는 철학으로는 헤겔 철학을 들기도 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들기도 한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이 쓴 책 중에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이라는 짧은 논문이 있다. 그것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이 얼마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 속에 집어넣으려고 했는가를 알 수 있다. 플라톤은 그런 체계를 만든 사람은 아니다. 체계적 완결이라고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큰 업적이다.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틀릴 수 있을지 몰라도.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와있는 앎의 단계들을 보면 오늘날 인지심리학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기는 그만 읽으라고 한다. 현대 자연과학에서 보면 아주 형편없는 것을 외우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과학적 팩트에서 보면 틀린 것일지라도 왜 그 단계를 구성했을까를 사상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앎의 체계와 궁극적 실재 | ⟪형이상학⟫. 앎의 체계와 궁극적 실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의 체계를 만든 것인데 ⟪형이상학⟫은 앎의 체계와 궁극적 실재에 대해서 다룬 책이다. 제16강 ⟪형이상학⟫의 구성에 들어가기 앞서, 짧게 179페이지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에 대해서 같은 점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플라톤에서는 이론학과 실천학의 구분이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플라톤은 '좋음'이라고 하는 것들을 논의했던 것이고 좋음이라는 것이 곧바로 그가 살고 있는데 아테나이 폴리스, 그리고 헬라스 사람 전반에 관여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뭔가를 할 때 이론과 실천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플라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론학이니 실천학이니 이런 것들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좋음'이라고 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문제, 즉 냉정하게 존재의 문제라기 보다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는 좋음의 이데아 이런 얘기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엄밀하게 규정할 수 없다고 봐서 실천학으로 빼버린다. 윤리학이나 정치학에서 다룰 문제이지 그것을 이론적인 학문을 다루는 형이상학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가 그런데 있다는 것,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나이에 유학 온 사람으로 아테나이 시민이 아니다. 또 그 사람이 살아온 경로를 보면 여기저기 많이 떠돌아다니면 산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맺힌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사태를 한발짝 떨어져서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간단히 말하면 플라톤은 인생의 생생한 또는 처절한 국면에서 길어올린 철학이다라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발 떨어져서 학자의 눈을 가지고 차분하게 관망하고 조망해서 정리 정돈한 철학이라는 느낌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형이상학에서 그런 것이 나타난다. 

제16강 179 플라톤에서는 이론학과 실천학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이론과 실천이 중첩되었습니다. 어디까지가 이론의 차원이고 어디부터가 실천의 영역인지를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분명하게 이론학과 실천학과 제작학의 구별이 있습니다.

학문 분류를 보면 이론학과 실천학과 제작학을 나누었다. 우리가 읽게 될 ⟪형이상학⟫은 이론학에 속한다. 그리고 그것에 앞서서 예비학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르가논', 말 그대로 머신이다. 학문의 도구들을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기에 학문의 도구는 논리학이다. 범주론, 명제론, 소피스트적 논박, 변증론, 분석론 이런 것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속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은 바로 오르가논이라는 말에서 가져다 쓴 것이다. 그 다음에 형이상학은 이론학에 속하는데 신학이라고 하기도 하고, 존재론이라고 하기도 하고, 형이상학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궁극적인 실재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형이상학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그런 궁극적인 실재를 신, 테오스라고 불렀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신학이라는 말과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신을 '비롯한' 만물, 신도 그런 모든 만물(ta onta)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존재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이라고 하면 신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고, 형이상학 또는 형이상학의 대상인 신, 그러니까 신학과 신을 포함한 세상의 만물을 다룬다 그러니까 존재론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이나 악의 문제를 형이상학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플라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니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제16강 180 여기서 신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초월적인 인격신에 대한 탐구'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신(theos)은 제1의 원인입니다. 달리 말하면 '첫째가는, 가장 지배적인 원인'이라고도 합니다. 신은 첫째가는 가장 지배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초월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은 존재의 세계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이라 해도 모든 존재들(ta onta)을 다루는 존재론에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신을 논의하는 저작이 ⟪형이상학⟫입니다.

제17강은 앎의 종류와 단계들이다. 출발점은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라는 문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든 누구든 철학자는 증명할 필요가 없는 제일 전제 하나씩 딱 깔고 들어가는데 이게 말하자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라는 것과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는 같은 말이다.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하니까 바로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다. 그런데 누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하는가. 나면서부터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받아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증명할 필요없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깔고 들어간다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ta onta, 존재론을 시도한다고 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존재 또는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포괄적인 앎을 갖고 싶어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앎의 종류와 단계들을 이야기할 때는 모든 존재에 대한 앎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첫째가 감각을 통한 앎, 기억, 경험, 기술, 학문적 인식 이렇게 나뉜다. 단계가 있는 것이다. 감각 aisthesis에서 시작해서 mneme, empeiria, techne, episteme로 올라간다. 감각과 기억은 잘 알텐데 경험과 기술의 차이는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경험은 각각의 개별적인 것에 대한 앎, 이를테면 '저 꽃은 노랗다" 그런데 노랑, 빨강 이런 것은 추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런 것에 대한 앎은 보편적인 것이니까 기술에 해당하고, 기술에 하나 더 추가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할 줄 아는 것은 기술에 속한다. 할줄 아는 것은 그게 왜 생겨났는지 원인을 아는 것이다. 대상 세계에 개별적인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것, 할 줄 아는 것, 그리고 왜 그렇게 되는지 아는 것이 기술이다. 그런데 episteme는 논증적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라서 딱히 발견과 관련되었다기 보다는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에 가깝다. episteme는 논증적 지식이라고 해도 되고 체계적 지식이라고 해도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앎의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은 모든 단계의 앎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플라톤은 그렇지 않다. aisthesis와 같은 감각지는 버려야 한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aisthesis에서 시작해서 episteme까지 다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게다가 episteme와 다른 것이 하나 있는데 제일 원리를 파악하는 직관이라는 것이 있다. nous라는 단어를 붙인다. 플라톤에서는 사실 episteme와 nous, sophia, phronesis가 구별이 안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phronesis는 실천적 지식이라고 해서 아예 형이상학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플라톤에서는 혼용된다. techne politike 정치적 기술인데 이것은 phronesis이기도 하고 episteme이기도 하고 nous이기도 하고, sophia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 원리를 파악하는 직관하고 논증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episteme를 구별하고 이 둘을 결합하여 sophia, 지혜를 알게 된다고 말한다. sophia는 자기목적적 앎이다. 자기목적적이라는 말은 나는 누구일까, 내가 누구인지 탐구하는 것을 자기목적적 앎을 추구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따라서 시초에서 결과에 이르는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앎에 관한 총체적 기획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제17강 185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앎의 단계는 감각에서 시작해서 기억(mneme)과 경험(empeiria)을 거쳐 기술(techne)과 학문적 인식(episteme)으로 발전합니다. 우리의 앎이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에피스테메는 논증적 지식인데, 이 논증적 지식에 누스, 즉 제일원리를 파악하는 직관을 합하면 그것들보다 상위의 앎인 소피아 sophia, 즉 지혜가 됩니다. 물론 논증적 앎과 직관적 앎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같은 차원에 있는 것이지만 종류가 다른 앎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인 앎을 버리고 갑자기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앎도 가지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앎의 종류와 단계들을 따져 물었다고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인 궁금증에 대해서 따져 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점을 유념해 두면 되겠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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