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상사적 방법, 3. 후대에 넘겨준, 4. 저작들 |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

선생님의 책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 주해에서 발췌.

 

 

2. 사상사적 방법

시대의 역사적 의미는 사상사적 고찰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고찰의 대상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들에 전개된 인간 집단의 삶의 전반적인 모습과 여러 국면이다. 그 시대에 통용되었던 공통관념의 변천, 공통관념과 시대적 맥락의 상호작용, 공통관념이 정치적 사회적 과정에서 작동하는 방식, 아주 구체적으로는 시대의 삶을 규율하는 사회구조와 정치 체제가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사상사는 본래 관념사(History of Ideas) 또는 개념사(begriffsgeschichte)에서 시작하였다. 관념사 연구의 창시자로 간주되고 있는 이는 아서 러브조이 Arthur Lovejoy다. 그의 《존재의 대연쇄: 관념사 연구》(The Great Chain of Being: A Study of the History of an Ideas, 1936)는 존재라고 하는 단위 관념 (Unit Idea)을 연구하고 있다. 사상사에는 관념사나 개념사만이 아니라 교리사(History of Doctrine, Dogmengeschichte) 또는 학설사가 포함되기도 하는데 이는 역사적 시대적 맥락을 탈각하고 추상도가 높은 체계나 교설 이론 자체의 변천을 고찰하는 것이다. 러브조이가 연구하는 단위 관념의 역사는 교리사 또는 학설사와도 겹치는 지점이 있다.

그밖에도 정신사(Geistesgeschichte) 가 사상사에 속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는 특정 시대의 정신적 전체 구조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역사적 추이를 검토하면서도 시대를 표상하는 사태, 즉 시대정신이나 사상事象이 집약된 계기에 집중하는 사상사이다. 정신사의 주요 주장은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의 《정신과학에서 역사적 세계의 건립에서 읽을 수 있다. 딜타이는 문화 현상을 역사적인 생(Leben)의 표출이라고 보며, 이를 관통하는 정신의 작용연관을 전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시대정신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서 그가 발전시킨 학문 영역이 해석학이다. 딜타이의 해석학 전반에 관해서는 《해석학의 성립》을 참조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사에서 파악하려는 시대정신은 과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역사형이상학이 논의하는 것이요, 이는 헤겔이 정립한 일종의 세속적 신학의 한 종류로 간주할 수 있다. 그의 역사형이상학은 대체로 다음 테제로 이루어져 있다. 1) 정신은 모든 것이다. 2) 고차적 존재로서 독자적 존재방식과 생명을 갖는 보편적 정신적 실체는 세계과정(Weltlauf)의 담지자이면서 인도자이며, 역사 과정에서는 '객관적 정신'으로 현현한다. 3) 역사 속의 개체들은 객관적 정신의 본질의 불완전한 각인이다. 4) 이성의 본질은 자유이고 역사의 궁극목적은 자유의 현존, 즉 자유의 자기실현이거니와, 그런 까닭에 세계사에 내재하는 근본법칙은 자유의식의 전진이다. 5) 하나의 통일된 세계정신이 역사적 상像(Bild) 들을 관류하면서 진전한다. 6) 최종 성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역사에서는 과정 자체가 본질적이다. 각 단계는 되풀이되지 않는, 정신의 고유한 상이다 7) 세계정신이 스스로를 실현하는 데 사용하는 수단은 개체들의 열정(Leidenschaft)이다. 이것이 세계정신인 이성의 계략(List der Vernunft)이다. 8) 개체는 공통 정신의 의식으로 스스로를 고양시킴으로써 역사적으로 위대한 존재로 도야(Bildung) 된다. 9) "역사는 변혁할 능력이 없는 것들을 탈락시킴으로써 비판을 수행한다. 역사는 세계심판(세계법정)이기도 하다".

3. 후대에 넘겨준

사상사 연구에서는 전승 또는 계수繼受의 방식이 중요한 계기를 차지한다.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은 《정신적 존재의 문제》(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 1933)에서 들어가서 '뚫고 나옴'(Hineinragen)의 방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소리 없이(stillschweigend) 들어가서 뚫고 나옴: 우리 속에 살아 있지만 이전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 풍속, 예식, 습관, 언어, 사고방식, 편견과 미신. 이러한 것들은 대상이 명시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나 사라지지도 않는다. 2) 분명히 들리게(vernehmlich) 들어가서 뚫고 나옴: 현재의 과거의식 안에 있는 지나간 것의 현재성', 과거에 대한 현재의 의식 속에 있는 과거의 현재성, '현재처럼 생생한 과거'로 의식된다. 기념비, 조각, 건축물 등으로써 상기하고자 하는 것.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의 《지나간 미래들》(Vergangene Zukunft, 1979)을 참조(미래들은 참재적인 복수複數의 형태로 과 거에 침잠해 있으며, 현재는 잠정적으로 드러난 과거의 발현이며, 미발현된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형성과정에 관여한다는 것). 

'소리 없이 들어가서 뚫고 나옴'은 보존된 것이며, '분명히 들리게 들어가서 뚫고 나옴'은 낡은 것을 개조하고 그것을 합목적적으로 새로운 생활형식에 적응시키는 정신의 힘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는 '역사의 기억'이 작동하는데, 기억은 생기生起(Geschehen) 가 역사로 전환되는 계기이다. 다시 말해서 기억이 작동하면서 생기가 성립成立(Entstehen)으로 변형되고 이것이 역사(Geschichte)로 정립되는 것이다.

 

4. 저작들

사상사가 주요하게 다루는(또는 주목해야만 하는) 저작들을 일반적으로 '고전'이라 부른다. 고전 텍스트에는 당대인들의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이 응축되어 들어 있다. 이 체계와 방식은 지리적 조건과 그들의 관습, 가치, 선호, 집단의 구조와 성격, 정치 체제 등에서 형성된다. 고전 텍스트들은 당시에 그것을 읽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어받은 후대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철학적 관상觀想은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사상사적 통찰 위에 구축되는데, 그 관상은 특수한 것들에 대한 앎에 관철되어 있는 보편적 원리를 찾으려고 하는 추상적 사유, 일종의 창발創發(emergence)이다. 텍스트는 인간 존재의 삶의 여러 국면, 즉 우리가 환경이라 부르는 것을 복합적으로 반영한다. 인간 존재는 무엇보다도 자연이라는 토대, 즉 지리적 조건과 물리적 조건 위에서 살아간다. 이 조건은 인간이라는 생물체의 존재 기반이다. 이 기반은 공간적인 것에 존립한다. 인간의 심적인 것 또는 정신적인 것은 비공간적인 것에 있다. 텍스트의 저자들은 이러한 공간적 정신적 조건들에 처해 있다. 그들이 아무리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단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 해도 같은 시대의 인간 집단에 통용되는 공동타당성을 나눠 가진다. 따라서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공동타당성을 실마리로 삼아 텍스트가 만들어진 공간적 비공간적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텍스트에 중첩되어 있는 복합적 사유-체험을 그것들 각각이 자리잡고 있는 지리적 물리적 정신적 충위層位에 따라 검토하는 것이다. 공동타당성을 반영하고 있는 텍스트는 문명(civilization)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물질적인 성취를 '문명'이라 말하고 정신적인 성취에 대해서는 '문화'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구분을 사용하지 않는다. 인간 집단이 역사적 과정에서 이룩한 모든 성취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고 지칭하기로 한다. 둘은 서로 맞물려 있으며, 분석적인 차원에서는 각각을 분리할 수 있겠지만, 그 부분들이 모여서 이루는 종합적 전체는 부분들의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것 자체의 성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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