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바턴: 성서의 형성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2. 2. 19.
성서의 형성 - 존 바턴 지음, 강성윤 옮김/비아 |
들어가며
서론
1. 성서의 내용
2. 책을 쓰다
3. 책을 모으다
4. 책에서 경전으로
5. 정경을 확정하다
결론
용어 해설
인물 해설
존 바턴 저서 목록
결론
이 책에서 우리는 서로 별개이지만 여러 지점에서 맞물리는 두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오늘날 성서를 형성하는 다양한 책들이 저술된 과정입니다. 둘째는 이 책들이 거룩한 경전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다른 모든 책과 구별되는 과정입니다. 두 과정 모두 한없이 복잡하지만, 일반적 경향과 원리 몇 가지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 속한 책들이 기록된 과정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만들어 낸 모든 문화권에서는 글을 읽고 썼습니다. 이러한 능력이 널리 퍼져 있지는 않았으나 오늘날 사람들처럼 읽고 쓰는, 상당히 전문화된 대규모의 엘리트 집단이 있었으며, 이들은 동시대인이 읽을 정교한 문서를 만들어 냈습니다. 구약과 신약 시대 모두 전문적인 의미에서 서기관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정확히 어떠한 일을 했는지 상세한 정보는 없지만, 단순히 고대의 워드 프로세서 같은 존재는 아니었으며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저작을 생산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구약 본문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사람들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졌고, 이 같은 본문은 최고 수준의 문학적 탁월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가지 점에서 고대 세계는 오늘날 세계와 명백한 차이를 보입니다. 첫째, 고대 세계는 문자보다 입말을 통해 전달되는 사상, 이야기, 시, 격언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읽고 쓸 줄 아는 문화에서는 글을 통한 전달에 비하면 구전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오늘날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고대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에서는 정확한 기억에 의거해 막대한 양의 축적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잘 훈련된 기억에 견주면 글쓰기는 차선책이라는 믿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특히 이러한 입장을 보였지요. 때로 그들은 복음서를 경전보다는 설교자나 교사가 예수 이야기를 기억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료 보관소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 저지들은 복음서를 부정확하게 인용하곤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두루마리보다 코덱스를 선호했습니다. 이는 당시 신자들이 복음서를 격식 있는 책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기록물, 메모 비슷한 문서로 여겼다는 사실을 반영하는지도 모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역사에 관한 기억들은 누군가가 기록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졌을 것이며,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처럼 전설에 가까운 자료들은 특히나 그러했을 것입니다.
둘째, 고대 저술가들은 독창적인 창작에 관해서 우리와 달리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저작 중 상당수는 여러 시대에 속한 저자들과의 협력의 산물입니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는 문서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고, 문서를 자신의 고유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변경하고, 새로운 판본을 만들고, 일부를 잘라 내 다른 부분들과 새롭게 합치고, 우연히 접한 구전 자료를 접목했습니다. 이 같은 문화에서 만들어 낸 책은 우리가 아는 책과는 종류가 다릅니다. 우리는 책이라고 하면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기승전결이 있으며, 시종일관 같은 문체로 기록되고, 특정한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구상된 물체를 떠올리지요. 고대 세계의 책을 오늘날의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받은 여러 이메일을, 이것들이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왔음을 숨기고 하나로 묶어 단일한 형식으로 인쇄한 모음집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분명히 구별되는 책들이 나타났습니다. 제목이 붙고 저자가 누구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경전의 몇몇 책들(바울 서신이 대표적이지만 구약에서도 룻기, 요나 등 일부는 이에 해당합니다)은 처음부터 특정한 한 명의 저자가 특정 의도를 가지고 교훈을 전하려 쓴, 오늘날 기준의 책이었습니다.
개별 책들을 더 큰 선집으로 모으는 과정, 그리고 이 선집이 독특한 종교적 지위를 가진다는 생각이 형성되는 과정 역시 매우 복잡했습니다. 보통 이 과정의 전부 혹은 일부를 성서의 정경화라고 부르지만, 이 책에서는 이 과정의 마지막 단계를 가리키는 데만 이 말을 썼습니다. 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일정한 목록에 포함된 책 외에는 그 어떤 책도 성서로 인정하지 않으며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선언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분명 여러 단계가 있었습니다.
먼저, 책을 수집해야 했습니다. 이를테면 모세의 책들은 모여서 오경 혹은 토라를 이루었으며 바울의 편지들은 바울 선집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나온 개별 작품이 아니라 동일한 신학을 일관되게 표현하는 모음집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 다음, 신자들은 이러한 모음집을 세속의 책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를테면 우의로 해석하거나 보편적 인 유효성을 지닌 것으로, 혹은 감춰진 풍부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했지요. 마지막으로 유능한 권위자가 나서서 경전의 범주가 가득 찼음을 선언하고 선집에 관한 논의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로써 선집은 '성서'로 탈바꿈합니다.
이 가운데 마지막 단계는 오해의 여지없이 정경화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 단계는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대교에서는 히브리 경전의 정확한 범위를 규정한 권위 있는 기록이 전혀 없고, 이러 저러한 책의 권위가 의심된다는 산발적인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집회서는 정경이 아니라고 판정되었음을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책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여러 명의 초기 저자들이 신약 정경 목록을 제시하지만, 이 목록에 적힌 책의 대부분은 당시 신자들은 당연히 경전으로 여기던 문헌들이었습니다(기원후 4세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정경이라는 주장은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책인 경우 그들은그 책의 지위가 불확실하다고만 적을 뿐 그지위를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서 단하나만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마지막 이야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날 성서에 포함된 책들의 지위가 논란에 휩싸인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주변부에 있는 몇몇 책은 교회에서 지위가 불분명했고, (이론상으로는 아닐지언정) 여전히 불분명합니다. 구약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개신교에서 외경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논쟁과 긴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은 외경에 속한 책을 엄밀한 의미의 구약에 속한 대다수 책만큼 중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외경인 솔로몬의 지혜는 초기 그리스도교 저자들이 매우 좋아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정경이지만 짧고 주변부에 있는 나훔보다 더 중시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를 더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초대 교회는 외경도 거룩한 경전으로 여겼지만 많이 활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약정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요한의 묵시록에 관한 논쟁이 있었으나, 이 책들을 정경에 포함시키는데 동의한 이들도 저 문헌들을 마태오의 복음서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만큼 자주 활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논란은 언제나 성서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발생했습니다. 유대교든 그리스도교든 구약과 신약의 중심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특정한 책들을 신자들이 거룩한 책으로 받아들이면서 형성되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차후에 이유를 발견(혹은 발명)하기도 했지요. 어떤 책을 거룩한 책으로 여길 경우 사람들은 저술 연대, 원저자 등에서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책들이 거룩한 책이 된 이유는 그 책들이 아득한 옛날부터 읽혔다고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 이는 참입니다. 이를테면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는 실제로 그리스도교 역사 중 가장 초기에 나온 문헌이며 시편의 상당 부분은 다윗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 이는 사실과 들어맞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사도 베드로가 쓰지 않았으며 1 세기 말 혹은 2세기 저자가 위명으로 썼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아니라 (아마도) 기원전 7세기와 5세기 사이에 활동했던 저자들이 썼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그러한 생각 덕분에 성서예 속한 책들은 범접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이런 저런 책을 정말 경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닌지를 적극적으로 묻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오랜 기간 거룩한 책으로 여겨져 왔던 책들을 거룩한 책으로 읽었습니다. 성서는 어떤 규정의 산물이 아닙니다. 식물이 자라듯, 성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라나 성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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