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하이네: 노래의 책

 

노래의 책 - 10점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이재영 옮김/열린책들

제2판 머리말
제3판 머리말
제5판 머리말

젊은 날의 아픔 1817~1821
-꿈의 영상들
-노래들
-로만체
-소네트

서정적 간주곡 1822~1823

귀향 1823~1824

하르츠 여행에서 1824

북해 1825~1826
-첫 번째 연작시
-두 번째 연작시

역자 해설: 치명적 사랑과 노래의 구원

하인리히 하이네 연보

 


 

역자 해설: 치명적 사랑과 노래의 구원


『노래의 책』이 출판되기까지
이 시집은 하이네가 만 30세가 되던 1827년에 함부르크에서 발표되었다. 당시 하이네는 직전에 발표한 기행문 『여행 화첩 』 1권이 크게 성공을 거두어 독일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당초에 시인으로서 성공을 거두고자 했으나 그때까지 시인으로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하이네는 1826년, 『여행 화첩』의 성공에 기대어 시인으로도 인정 받기 위해 자신이 이미 발표한 시들을 모두 묶어 한 권의 시집으로 발표하고자 작업을 시작했고, 이 작업의 결과가 『노래의 책』이었다. 1826년 11월에 친구 프리드리히 메르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몇몇 친구들은 내가 내 시들을 연대순으로 엄격하게 선별하여 시 선집을 편찬해야 한다고 재촉하고 있네. 그리고 이 선집을 출판하면 뷔르거나 괴테, 울란트의 시집들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끌 것이라고 믿고 있어.〉 그는 이 시집이 자신의 〈주요 저작〉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기를 기대했다. 즉 그는 전문 독자만을 상대로 하지 않고 교양이 부족한 독자들에게도 널리 읽히는 민중적 시인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새롭게 쓴 시들이 아니라 이미 다른 책에서 발표한 시들을 단순히 모아 놓은 시집으로 이런 대중성을 얻고자 하는 그의 포부는 과도하거나 적어도 매우 대담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책으로 출판되기 이전에 이미 신문과 잡지, 연보 등에 먼저 발표되었던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시들은 『노래의 책』을 통해 세 번째로 인쇄되는 것이었다.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 시인이 기존 시들을 모아 다시 시집으로 발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미 발표된 시들을 다시 출판하는 데 대해 회의적이었던 출판업자 율리우스 캄페도 설득해야 했다. 그 얼마 전에 하이네를 만나 이후 평생을 그와 다투며 그의 책을 출판하게 되는 캄페는 시 작업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이미 잘 팔리고 있는 『여행 화첩』의 연속 편들을 쓰는 데 집중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하이네는 캄페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1827년 초에 출판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여행 화첩』 2권이 발표되기 전인 4월 초에 시의 선별 작업이 끝났다. 이전에 발표되지 않은 시는 단 7편뿐이었다. 그리고 이것들 마저도 하이네가 이미 과거에 써놓은 것들이었다. 하이네가 한 작업은 기존의 시들을 일정하게 개작하고 새롭게 배열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1827년 10월 30일 친구 모제스 모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 『노래의 책』은 이미 발표된 내 시들을 전부 모아놓은 것일 뿐이네.〉

  첫 번째 연작 「젊은 날의 아픔」의 모든 시들은 1821년 11월에 발표한 『H. 하이네의 시집』에 수록된 것들이었다. 그는 이 시집의 시들 가운데 18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들을 일정하게 수정했다. 「꿈의 영상들」과 「로만체」의 시들은 문체상의 결함을 제거하고 운율을 다듬고 각운을 개선하는 등의 작업을 거쳤다. 「돈 라미로」와 같이 하이네가 아주 초기에 쓴 작품들은 상당히 개작되었다. 두 번째 연작 「서정적 간주곡」에는 1823년에 출판된 『비극들과 서정적 간주곡』에 수록된 시들을 담았다. 이 시들 가운데 새로 발표하는 시는 한 편뿐이었다. 이 시들은 대부분 1821년에서 22년 사이에 집필된 것들이므로 하이네가 연작의 제목에 1822~1823 이라고 기록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귀향」에서는 에로틱한 내용을 담은 시 6편을 빼고 미발표작 6견을 추가했다. 그리고 여기에 다섯 편의 장시들을 덧붙였다. 네 번째 연작 「하르츠 여행에서」에는 『여행 화첩』 1권에 수록되었던 5편의 시들을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 연작인 「북해」는 『여행 화첩』 1권과 2권에 수록되었던 두 편의 연작시들로 구성되었다.

  시집의 제목은 대중적인 수용에 유리하도록 단순하고 쉽게 기억되는 〈노래의 책〉으로 정했다. 그해 여름 하이네는 영국 여행을 떠났고, 그가 영국에 있던 8월 말에 인쇄 작업도 끝났다. 그리고 9월에 출판되었다.


『노래의 책』과 당대의 문학
당시 민요란 18세기 말에 이 개념을 독일에 도입한 헤르더를 뒤좇아 낭만주의가 수용한 가능한 한 오래 전승된 작자 미상의 노래들을 말했다. 반대 개념은 예술 가요였다. 이와 달리 〈민중적 노래〉란 근래의 알려진 작가들이 민요의 표현 수단과 문체 수단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여 만들어 낸 문학적, 음악적 텍스트들을 말했다. 이런 어조는 아마추어 그룹들 사이에서 유통되는 노래들의 특징이었다. 하이네는 스스로 〈독일 민요들은 아주 일찍부터 내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듯이 이런 전통과 일찍부터 접촉했다. 유모들은 그에게 전설과 동화, 유령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김나지움 시절에 이미 그는 민요에 대한 문학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가 만년에 집필한 『회상』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 민요를 잘 아는 소녀 〈붉은 제프헨〉으로부터 민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꿈의 영상들」에서 나타나는 황량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년대에는 도보 여행을 하면서 민중들로부터 직접 민요를 들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많은 민요를 알게 되었고, 가변적인 운율을 지닌 민요의 절들은 『노래의 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민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모범이 된 시인들은 3명의 낭만주의자들이었다. 첫째 하이네는 1813년에 낭만주의 시인 푸케의 시들을 읽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그의 시들을 필사했다. 이 시집의 「돈 라미로」와 「돈나 클라라」는 푸케의 작품으로부터 형식적, 내용적 영향을 받은 시들이다. 민중적이고 고풍스런 소재들을 취한 루트비히 울란트의 시들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울란트가 1815년에 발표한 『시집』은 하이네에게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빌헬름 뮐러의 운율과 어조에서 하이네는 순수함과 단순성을 배웠다. 하이네는 민요의 가치를 그 순수성, 자연성, 유기성, 진실성에서 찾았다. 민요에 대한 이런 관념은 헤르더와 낭만주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하이네가 민요에 대한 찬양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괴테를 정점으로 하는 이른바 〈예술 시대〉의 끝에서, 그리고 현대가 시작되는 시기에 성찰 없이 민요의 전통을 잇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산물인 민요를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은 마치 공산품을 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요에 대해 거리를 취하고자 했고, 1826년 6월에 빌헬름 뮐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시들은 형식적으로 어느 정도 민중적이지만, 내용은 당대의 것을 취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이네는 전통적인 민요의 형식과 시민 사회 사이의 대립을 자신의 시들의 구조에 생산적으로 반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하이네는 산업 혁명이 시작된 시기에 노래 Lieder의 시대는 끝난 것으로 보았다. 〈증기 기관 차량〉과 시는 서로 어울리지 않고, 〈석탄 연기는 노래하는 새들을 쫓아내며, 가스 등의 악취는 안개에 싸인 달빛을 망친다〉는 것이었다.

  민요외에도 괴테의 노래와 발라드들, 사랑 시들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이네는 괴테에 대해 애증이 섞인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그의 서정시는 언제나 높이 평가했다. 1819년에 발표된 『서동시집』을 그는 독일어의 기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시작(詩作)은 조금 하는 데 그쳤지만 운율학자였던 야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도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이네는 그에게서 시상의 집중과 시의 논리적 엄격성, 그리고 운율 운용의 능숙함 등을 배웠다.

  페트라르카주의 문학도 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페트라르카주의 문학은 그것이 묘사하는 기본 상황을 중세의 연애 가곡 민네장에서 넘겨받았다. 여기서 등장하는 남자는 한탄하고 슬퍼하는 노예로서 끔찍한 사랑의 고통에 빠져있고, 그의 가슴은 사랑의 불길에 소진되는 중이어서 사실상 살아 있는 망자나 다름없다. 반면 여자는 그를 잔인하게 냉대하고 그에게 관심이 없다. 하이네의 시에서도 충족되지 못하는 사랑, 대립적인 상태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랑이 현저하게 나타나며, 이는 페트라르카주의 시와 비슷하다. 그러나 하이네는 여기에 아이러니를 통한 굴절을 더하여 창조적 변형을 이루어 냈다.

 당시 세계고(世界苦)를 유행시킨 영국의 시인 바이런도 영향을 미쳤다. 하이네는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의 권고를 받고 바이런의 시들을 번역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베를린에서 〈독일의 바이런〉이라고 불렸으며, 그 자신이 바이런을 〈나의 사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824년, 친구 루돌프 크리스티아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이네는 바이런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실로 이 사람은 위대했네. 그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세계들을 발견했지.〉 이런 평가는 하이네 자신의 시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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