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악령(상) ━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2. 9. 14.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 전8권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홍대화 외 옮김/열린책들 |
제1부
제1장 서문을 대신하여: 널리 존경받는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의 신변 이야기
11 지금까지 어떤 특별한 일도 없던 우리 도시에서 최근에 발생한 매우 이상한 사건들을 서술함에 있어서, 나는 나의 능력 부족 탓에 이야기를 약간 돌려, 다름 아닌 재능 있고 널리 존경받는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의 몇 가지 신변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전개될 연대기의 서문과 같은 역할을 할 뿐이며, 내가 쓰려고 하는 진짜 이야기는 좀 더 뒤에 나올 것이다.
바로 시작하겠다.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는 우리 사이에서 뭔가 독특한 말하자면 시민적인 역할을 계속 담당하고 있었으며, 그는 이 역할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를 연극배우에 견주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치도 않을뿐더러, 나는 그를 존경하기까지 한다. 이 모든 것은 습관의 문제일 수도 있고 더 정확히 말하면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시민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던 기분 좋은 꿈을 계속 간직하려는 고결한 성향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추방자〉, 그러니까 〈유형수〉라는 자신의 상황을 대단히 사랑하고 있었다. 이 두 단어에는 그를 단번에 사로잡아 오랜 세월 동안 점차 스스로를 더 높이 평가하게 만들고, 마침내 아주 높고 훌륭한 자존심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리는 일종의 고전적인 광채 같은 것이 있었다. 지난 세기 영국의 한 풍자소설에 나오는 걸리버라는 인물은 사람들의 키가 기껏해야 2베르쇼크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인국에서 돌아오자, 자기가 그들 사이에서는 거인이었다는 생각에 익숙해진 나머지, 런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도 자기는 여전히 거인이고 사람들은 작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깔아뭉개지 않도록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마차를 향해 비키라거나 조심하라고 소리치곤 했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보며 비웃거나 욕설을 퍼부었고, 난폭한 마부들은 이 거인을 채찍으로후려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습관은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습관은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역시 거의 같은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훨씬 더 순진하고 무해한 모습을 띠었다.
제 2장 해리왕자, 혼담
68 바르바라 페트로브나가 이 세상에서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못지않게 애착을 갖고 있는 또 한 사람은 그녀의 외아들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스타브로긴이었다.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를 초빙한 것도 아들을 위해서였다. 당시 소년은 여덟 살이었는데, 아버지인 경박한 스타브로긴 장군은 이미 부인과 별거 상태여서, 소년은 오직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자라고 있었다.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는 피양육자가 자신을 따르게 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이 가진 비결은 그 자신이 어린애라는 점이었다. 당시엔 나도 아직 이곳에 없었기 때문에 선생은 계속 진실한 친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는 깊은 생각 없이 이제 막 성장기에 접어든 어린 존재를 자기 친구로 만들어 버렸다.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되자 둘 사이에는 조금의 거리도 없어졌다. 그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채 그저 자기의 모욕받은 감정을 눈물과 함께 호소하거나 자기 집안의 비밀을 털어놓기 위해 열 살, 열한 살 정도의 친구를 한밤중에 깨우기 일쑤였다. 그들은 서로 상대의 가슴에 몸을 던지고 흐느껴 울었다. 소년은 어머니가 자기를 몹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은 어머니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그를 구속하는 일도 별로 없었지만 소년은 어머니의 시선이 항상 자기를 집요하게 뒤쫓고 있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라 부인은 아들의 교육이나 도덕적 발달과 관련한 모든 것을 스테판 트로피모비치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 그때만 해도 부인은 그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교육자가 자기 제자의 신경을 어느 정도 혼란스럽게 해 놓았던 것은 분명하다. 소년이 열여섯 살이 되어 귀족 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는 비쩍 마르고 창백했으며,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나중에는 대단한 육체적 힘의 소유자가 되었지만). 이 두 친구가 한밤중에 서로의 가슴에 몸을 던져 흐느껴 울었다는 것 역시 한낱 가정 안의 일화 같은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는 친구의 가슴 깊숙한 곳의 줄을 건드려 막연하지만 영원하고 신성한 우수의 감각을 처음으로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제3장 타인의죄
138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나자 상황에 약간 진전이 보였다.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하자면, 이 불행한 일주일 동안 나는 혼담 당사자가 된 불행한 친구 곁에서 그의 상담역으로 한 시도 떠나지 못하고 지루함을 참아내야 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이 한 주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틀어박혀 있었는데도 그는 수치심으로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그는 나한테도 수치심을 느꼈으며,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털어놓을수록 그것 때문에 나에게 화를 더 많이 냈다. 의심 많은 성격 탓에 이미 도시 전체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며 클럽뿐만 아니라 친구들 앞에 나서는 것도 두려워했다.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산책을 할 때조차 완전히 어두워진 황혼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갔다.
일주일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약혼자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을 확실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신부와는 아직 만나지도 못했으며, 그녀가 자신의 약혼녀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이 모든 것에 무슨 진지함 같은 것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바르바라 페트로브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를 절대로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가 보낸 편지 중(그는 부인에게 많은 편지를 썼다) 한 통에 대한 답장으로, 부인은 지금 매우 바쁘니 당분간 모든 서신 왕래를 피해 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그에게 알려 줄 중요한 일이 많지만 지금보다 좀 더 여유로운 때를 기다리고 있으며, 시간이 되면 언제 그녀를 방문해도 좋을지 직접 알려 주겠다고 했다. 또한 그가 보낸 편지들은 〈장난스러운 내용〉에 불과할 테니 뜯지도 않고 돌려보낸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 편지를 읽어 보았다. 선생이 직접 내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무례함이나 불확실함은 그의 주된 근심거리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4장 절름발이여인
219 샤토프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내가 메모해 놓은 대로 정오에 리자베타 니콜라예브나의 집을 찾아왔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안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첫 번째 방문이었다. 그들 모두, 즉 리자, 그녀의 어머니, 마브리키 니콜라예비치는 큰 홀에 앉아서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리자에게 피아노로 어떤 왈츠 곡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녀가 왈츠를 치기 시작하자마자 어머니는 그 곡이 아니라고 우겼다. 마브리키 니콜라예비치는 단순한 성격답게 리자를 퍈들면서 그 왈츠가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노부인은 악에 받쳐 눈물까지 흘렸다. 그녀는 병이 들어 힘들게 걸어다니는 상황이었다. 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며칠 동안 변덕을 부리고 사람들에게 시비만 걸었다. 그러나 리자만은 약간 두려워했다. 그
제5장 현명한 뱀
278 바르바라 페트로브나는 벨을 울리고 창가 안락의자에 앉았다. 「여기 앉아요, 아가씨.」 부인은 마리야 티모페예브나에게 방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원탁 옆 자리를 가리켰다.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 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자, 여기, 이 여자를 보세요, 이게 대체 무슨일일까요?」
「저는…… 저는…….」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는 더듬거렸다. 그때 하인이 들어왔다. 「커피 한잔가져오너라, 지금 당장 가능한 한 빨리! 말은 마차에서 풀지 말고.」 「(친애하는 선량한 친구여, 저는 근심 속에서)……」 스테판 트로피모비치가 꺼져 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 프랑스어다, 프랑스어! 상류사회라는 것을 분명히 알수 있어!」마리야 티모페예브나는 손뻑을 치고 기뻐하면서 프랑스어 대화를 들어 보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르바라 페트로브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리는 모두 어떤 결말이 올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샤토프는 고개를 들지 않았고,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는 모든 것이 자기의 죄인 양 당황스러워했다. 그의 관자놀이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리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한쪽 구석에 샤토프와 거의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바르바라 페트로브나에게서 절름발이 여자에게로, 그리고 그 반대로 주의 깊게 오가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는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는데 좋은 미소는 아니었다.
제2부
제1장 밤
367 그 후 8 일이 지나갔다. 모든 일이 지나가고 내가 기록을 하고 있는 지금은 우리 모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며, 당연히 여러가지 일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나와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는 처음 한동안 집 안에서 투푼분출한 채 멀리서 두려움을 안고 지켜보기만 했다. 다만 나는 가끔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들은 여러 가지 소식을 전처럼 선생에게 전해주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선생은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도시 전체에 아주 다양한 소문이, 즉 따귀 사건, 리자베타 니콜라예브나의 기절, 그리고 그 일요일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관한 소문들이 떠돌았던 것은 말할나위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놀란 것은 대체 누구를 통해 이 이야기가 그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드러났는가하는 점이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사건의 비밀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거나 그로 인해 이익을 얻는다거나 할 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때는 하인들도 없었다. 레밧킨만은 뭔가 떠들어 댈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더라도 증오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그는 극도의 공포감 속에서(적에 대한 공포는 증오심도 없애 버리는 법이다) 나가 버렸으니, 아마도 참지 못하고 말해 버렸을수도 있다. 그러나 레밧킨은 여동생과 함께 그 다음 날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필리포프 집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나는 샤토프를 만나 마리야 티모페예브나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문을 걸어 잠그고, 이 도시에서 하던 일도 팽개친 채 8일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 같다.
제2장 밤(계속)
454 그가 보고야블렌스카야 거리를 완전히 빠져나가자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진흙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고 텅 빈 듯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강이었다. 집들은 오두막으로 변했고, 길은 수많은 무질서한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는 강변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울타리 옆을 한참동안 더듬거리며 지나갔다. 그러나 길은 정확하게 찾아갔고, 심지어 길을 찾아가는 것에 크게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완전히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깊은 사색에서 깨어나 갑자기 자신이 비에 젖은 긴 부교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인기척이 없어, 갑자기 팔꿈치 바로 밑에서 정중하면서도 허물없는, 그러나 꽤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이상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것은 우리 도시의 지나치게 세련된 소시민이나 아케이드 시장 출신의 머리가 곱슬곱슬한 젊은 점원들이 허세를 부리며 쓰는 달콤하고 또박또박한 억양이었다.
「죄송합니다만 나리, 우산 좀 같이 쓸 수 있을까요?」 그러고는 실제로 어떤 형상이 우산 밑으로 기어 들어왔다. 혹은 그의 우산 밑으로 기어드는 시늉만 내려 했다. 부랑자는 그의 옆에서 군인들이 쓰는 표현대로 〈일정 간격을 유지하면서〉 나란히 걸어갔다.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는 걸음을 늦추고 어둠 속에서 될 수 있는 한 그를 알아보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 는그리 크지 않은 키에 술에 취한 소시민처럼 보였으며, 춥고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숱이 많은 곱슬머리 위에는 차양이 반쯤 떨어지고 비에 젖은 나사 모자가 얹혀 있었다. 그는 짙은 갈색 머리에 마르고 거무스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은 컸는데, 꼭 집시처럼 새까맣고 심하게 번쩍거렸으며 노란 광택을 띠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이는 마흔정도로, 취한것 같지는 않았다. 「자네 나를아나?」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가 물었다. 「스타브로긴,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 나리죠. 지난주 일요일 역에서 기차가 막 정차하자마자 저한테 알려 주던걸요. 뿐만 아니라 전부터 얘기를 들었습니다.」 「표트르 스테파노비치에게서 들었나? 너···· 너는 유형수 페디카아닌가?」
제3장 결투
498 다음 날 오후 2시에 결투는 예정대로 이루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싸우고 말겠다는 아르테미 파블로비치 가가노프의 굽힐 줄 모르는 염원이 일을 이렇게 빨리 결정지었다. 그는 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미친 듯이 분개하고 있었다. 이미 한 달을 꼬박 제멋대로 그를 모욕해 왔지만, 여전히 그를 화나게 만들 수가 없었다. 결투 신청은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측에서 하도록 해야했다. 그 자신이 결투를 신청할만한 직접적인 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은밀한 동기, 즉 4년 전 가족이 당한 모욕에 대해 스타브로긴에게 가지고 있는 병적인 증오에 대해서는 웬일인지 스스로도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했다. 특히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가 이미 두 번이나 보낸 겸손한 사과의 편지를 고려하면 더더욱 그것이 더 이상 핑겟거리가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니콜라이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겁쟁이라고 혼자 결론 내렸다. 샤토프에게서 그렇게 뺨을 맞고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마침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했고, 그것이 결국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로 하여금 두 사람의 만남을 제안하도록 자극했다.
제4장 모두의 기다림
521 결투 소식은 우리 사교계에 빠르게 전파되었는데, 그 사건이 불러일으킨 인상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발빠르게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표했다는 것이다. 과거에 그의 적이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이가 단호하게 그의 친구임을 천명했다. 사교계의 견해가 이처럼 예기치 않게 변화된 주요 원인은 지금까지 의견 표명을 하지 않던 한 귀부인이 평소와 달리 분명하게 몇 마디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번에 우리 대다수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의의를 이 사건에 부여했다.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었다. 그 사건 다음 날이 현의 귀족단장부인의 명명일이어서 도시 사람 전부가 부인의 집에 모였다. 율리야 페특르나도 그 자리에 참석했는데, 오히려 주도했다고 보는 편이 낫겠다. 그녀와 함께 온 리자베타 니콜라예브나는 아름다움과 평소와 다른 행복함으로 빛나 보였지만, 그런 태도가 이번에는 우리의 많은 숙녀들에게 특히 의심스럽게 보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녀와 마브리키 니콜라예비치의 약혼은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지만, 퇴역했으나 여전히 권위 있는 한 장군이 그날 밤 농담조로 물어 보았을 때 리자베타 니콜라예브나는 자신이 약혼했다고 직접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찌 되었을까? 우리 숙녀들 중 정말 단 한 명도 이 소문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계속 해서 끈질기게 어떤 로맨스, 즉 스위스에서 완성된 운명적인 가족의 비밀 같은 걸 기대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 때문인지 율리야 미하일로브나가 계속 관여했다고 상상했다.
제5장 축제에 앞서
562 율리야 미하일로브나가 우리 현의 가정교사들을 위해 예약제로 계획했던 축제 날짜는 이미 몇 번이나 정해졌다가 연기되었다. 그녀 주변에는 변함없이 표트르 스테파노비치와 그곁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하급 관리 럄신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럄신은 한때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댁에 출입하다가 피아노 연주 솜씨 덕분에 갑자기 지사 댁을 방문할 수 있는 친절을 얻게 되었다. 율리야 미하일로브나가 앞으로 발행될 이 현의 독립 신문 편집자로 예정하고 있는 리푸틴도 그 중 하나였다. 그 밖에 몇몇 부인과 아가씨들, 그리고 카르마지노프도 있었다. 그는 주변에서 얼쩡대지는 않았지만 문학 카드리유가 시작되면 모두를 즐거운 놀라움에 빠뜨리겠다고 득의양양하게 큰소리치고 다녔다. 예약자들과 기부자들의 수가 엄청 많았는데, 모두 도시의 상류 사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돈만 가지고 온다면 최상류층이 아니더라도 참석이 허용되었다. 율리야 미하일로브나는 가끔 계층 간의 뒤섞임도 허용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누가 그들을 계몽하겠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비공식 가족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그곳에서 축제는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결정되었다. 신청자가 엄청나다 보니 지출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뭔가 기막힌 것을 하고 싶어 했고, 바로 그런 이유로 연기되곤 했던 것이다.
제6장 분주한 표트르 스테파노비치
606 축제 날짜는 최종적으로 결정되었지만, 폰 렘프케는 점점 더 침울하고 수심이 깊어졌다. 그는 이상하고 불길한 예감에 가득 차 있어서 율리야 미하일로브나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실 모든 일이 순조로운 상태는 아니었다. 느긋한 전지사는 행정 업무를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로 넘겨주었고, 때마침 콜레라가 닥쳐왔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강력한 가축 전염병이 나타났다. 여름내내 도시와 시골에서 화재가 맹렬하게 번져 나가고 있었는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방화라고 어리석게 투덜거리는 소리들이 점점 더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강도 사건은 이전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복했던 안드레이 안토노비치의 평온한 생활을 깨뜨린 훨씬 중대한 다른 원인만 아니었다면 이 모든 것은 물론 아주 일상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율리야 미하일로브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가 날이 갈수록 말이 더 없어지고, 이상하게도 숨기는 게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숨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사실 그는 부인에게 반대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그녀를 전적으로 따랐다 예를 들어 그녀의 강력한 요구로 지사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매우 위험하고 위법적이기까지 한 두세 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같은 목적으로 몇 가지 불길한 일들이 묵인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재판에 회부해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야 할 사람들이 단지 그녀의 요구만으로 포상을 받기도 했다. 몇몇 고소나 질의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대응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이 모든 일은 나중에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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