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악령(하) ━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2. 9. 14.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 전8권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홍대화 외 옮김/열린책들 |
제2부
제7장 일당의 모임에서
011 비르긴스키는 무라비이나야 거리에 있는 자기 집, 다시 말해 아내의 집에 살고 있었다. 집은 단층의 목조 건물로 다른 거주자들은 없었다. 주인의 생일을 빙자해 열다섯 명 가량 되는 손님이 모였다. 그러나 이 모임은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명축일 파티와는 전혀 달랐다. 비르긴스키 부부는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영명축일에 손님을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게다가 〈기뻐할 이유도 전혀 없다〉고 서로 단호하게 결정지었던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은 어떻게든 스스로를 사회에서 완전히 단절시켜 왔다. 그는 능력도 있는 데다 〈무슨 불쌍한〉 사람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두 그를 은둔 생활을 즐기고 말투가 〈오만한〉 기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담 비르긴스카야는 산파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사회 계층에서 가장 낮은 곳에 속해 있었으며, 남편의 장교직 관등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아내보다 낮은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신분에 걸맞은 겸손함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기꾼인 레밧킨 대위와 무슨 원칙에 따라 대단히 어리석고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공개적인 관계를 맺은 이후에는 우리 중 가장 관대한 부인들조차 눈에 띌 정도로 경멸하며 그녀를 외면해 버렸다. 그러나 마담 비르긴스카야는 바로 그런 것을 필요로 했다는 태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주목할 점은 바로 그 엄격한 부인들도 임신을 하게 되면 우리 도시의 다른 세 명의 산파를 제쳐 두고 가능한 한 아리나 프로호로브나(즉 비르긴스카야)를 찾았다는 것이다. 지주의 아내들을 위해 군에서조차 그녀를 부르러 보낼 정도로, 사람들은 모두 결정적인 경우 그녀의 지식과 운, 능란함을 신뢰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가장 부유한 집에서만 산파 일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탐욕스러울 정도로 돈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을 완전히 실감하자 그녀는 결국 자기 성격을 조금도 억누르거나 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일부러 그러는 듯 명문가에서 진료를 보는 중에는 전대미문의 허무주의자처럼 예의범절을 망각한다든지, 또는 〈신성한 것〉이 가장 필요할 수도 있는 바로 그 순간 〈모든 신성한 것들〉에 대한 냉소를 드러내어 신경이 약해진 부모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제8장 이반왕자
055 두 사람은 떠나갔다.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되돌아가서 〈회의〉의 혼란을 가라앉히려다 그런 일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 모든 일을 그대로 둔 채 2분 뒤 이미 길을 나서 앞서 떠난 두 사람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달려가다가 필리포프의 집까지 더 빨리 갈 수 있는 골목길이 생각났다.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탕을 헤치며 그는 골목길을 따라 달려서 실제로 스타브로긴과 키릴로프가 문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도착했다.
「벌써 왔나?」 키릴로프가 그를 알아보았다. 「잘됐군, 들어오게.」
「자네는 혼자 산다고 하지 않았나?」 스타브로긴은 현관에 미리 준비되어 끓고 있는 사모바르 옆을 지나면서 물었다.
「내가 누구와 살고 있는지 곧 알게 될 걸세.」 키릴로프는 중얼거렸다. 「들어들오게.」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베르호벤스키는 곧바로 주머니에서 아까 렘프케 집에서 가져온 익명의 편지를 꺼내 스타브로긴 앞에 내놓았다. 세 사람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스타브로긴은 말없이 편지를 읽었다.
「그래서?」 그가 물었다.
「이 불한당은 편지에 쓰여 있는 대로 할 걸세.」 베르호벤스키가 설명했다. 「그는 자네 통제하에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게. 분명히 말하지만, 그는 내일이라도 렘프케에게 달려갈지 모르네.」
제9장 가택 수색을 당하는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075 그러는 사이 우리 쪽에서도 나를 놀라게 하고,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를 동요케 한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아침 8시경에 선생 댁 나스타시야가 주인 나리가〈가택 수색을 당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나한테 달려왔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관리들이 〈가택 수색〉을 했다는 것, 즉 와서 종이들을 가져갔으며, 군인들이 그것을 전부 묶어 〈손수레에 싣고 갔다〉는 것만 알아들었다. 그것은 정말 기괴한 소식이었다. 나는 곧바로 스테판 트로피모비치에게 달려갔다. 내가 가보니 그는 아주 놀라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냉정을 잃고 엄청 흥분해 있었지만, 동시에 의심할 바없이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방 한가운데 있는 탁자 위에서는 사모바르가 끓고 있었고, 차를 따라 놓았지만 잊었는지 손도 대지 않은 찻잔이 하나 있었다.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는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듯 탁자 주변과 방안 구석구석을 어슬렁거렸다. 그는 마찬가지로 붉은색 누비 재킷을 입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서둘러 조끼와 프록코트를 그 위에 입었다. 그런데 이전에는 가까운 사람들이 이처럼 누비 재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더라도 결코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뜨겁게 내 손을 잡았다.
제10장 해적들, 운명의 아침
095 우리가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 역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순서대로 말해야만 한다. 나와 스테판 트로피모비치가 거리로 나서기 한 시간쯤 전 시피굴린 공장 노동자 70명 정도가, 아니면 그보다 좀 더 많은 한 무리의 군중이 도시를 따라 행진하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주목했다. 그들은 거의 말없이 보란 듯이 질서를 지키며 차분하게 행진하고 있었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이들 70명은 9백 명에 이르는 시피굴린 공장 노동자들 중 뽑힌 사람들로, 공장주가 부재중인 상황에서 공장 관리인을 처리해 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지사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관리인이 공장 문을 닫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과정에서 뻔뻔하게도 그들의 급료를 속였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다.
제3부
제1장 축제, 제1부
141 <시피굴만> 사태 당시 벌어졌던 온갖 의혹에도 불구하고 축제는 성사되었다. 만약 그날 밤 램프케가 사망했다고 하더라도 축제는 어쨌든 다음 날 아침 성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정도로 율리야 미하일로브나는 그 행사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사회 분위기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에 가서는 이 경축일이 어떤 거대한사건 없이, 누군가 미리 악의를 품고 표현한 대로 〈파국〉 없이 지나가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심하게 찌푸리고 뭔가 정치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사회적으로 추문에 가까운 혼란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러시아인들을 극도로 즐겁게 만드는 법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는 추문에 대한 단순한 갈망보다 훨씬 더 진지한 무언가가 있었다. 전반적인 격앙 상태,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악의에 찬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모든 일에 극도로 염증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전반적으로 모순에 찬 냉소주의, 지나치게 팽팽해 보이는 과도할 정도의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부인들만은 일관된 태도를 보였는데, 그것도 율리야 미하일로브나에 대한 가차 없는 증오라는 점에서만 그러했다.
제2장 축제의 종말
194 그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방안에 틀어박혀서 뭔가 쓰고 있기만 했다. 내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그를 부르자 문 안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친구, 나는 모든 걸 끝냈네. 누가 내게 뭘 더 요구할 수 있겠나?」
「당신은 아무것도 끝내지 않았어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과정에 일조했을 뿐이지요.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제발 말장난 그만하고 문 좀 열어 주세요. 대책을 강구해 봐야지요. 사람들이 계속 당신을 찾아와서 모욕할 수도 있다고요…….」
나는 내가 무엇보다 엄격하고 심지어 까다롭게 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더 정신 나간 짓을 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평소와 다른 단호함에 부딪혔다.
「자네야말로 먼저 나를 모욕하지 말게. 지난 모든 일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고맙게 생각하네만, 다시 말하지만 나는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모두와 끝을 냈단말이네. 나는 지금까지 용서받기 어려울 정도로 잊고 있었던 다리야 파블로브나에게 편지를 쓰는 중일세. 자네만 괜찮다면 이 편지를 내일 전해 주게나, 하지만 지금은 merci(고맙네).」
제3장 끝버린 연애사건
248 스크보레시니키의 큰 홀(바르바라 페트로브나와 스테판 트로피모비치의 마지막 상봉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곳)에서는 화재 현장이 손바닥 보듯 환하게 보였다. 동틀 무렵 새벽 5시경에 리자는 오른쪽 끝 창문 앞에 서서 꺼져 가는 불빛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그녀 혼자였다. 그녀는 어제 낭독회에 갈 때 입었던 밝은 녹색의 화려하고 온통 레이스로 장식된 그 파티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이미 마구 구겨져 있고 서둘러 되는 대로 걸친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가슴 위 단추가 제대로 잠겨 있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서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어제 방에 들어오면서 안락의자에 던져 두었던 붉은색 스카프를 집어 목에 둘렀다. 마구 헝클어진 풍성한 곱슬머리가 스카프 밑으로 빠져나와 오른쪽 어깨 위로 드리워졌다. 그녀의 얼굴은 피곤하고 근심스러워 보였지만, 눈은 찌푸린 눈썹 밑에서 활활 타올랐다. 그녀는 다시 창가로 다가가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갖다댔다. 문이 열리고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가 들어왔다.
제4장 최후의 결정
289 이날 아침에 표트르 스테파노비치는 많은 사람에게 목격되었다. 그를 본 사람들은 그가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는오후 2시에 겨우 하루 전 시골에서 올라온 가가노프의 집에 들렀는데, 집은 이미 방문객들로 가득 차서 최근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 풍부하고 열띤 대화를 하고 있었다. 표트르 스테파노비치가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우리 사이에서 항상 <마리가 좀 이상한 수다쟁이 대학생〉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율리야 미하일로브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최근의 전반적인 혼란상황 덕분에 이 주제는 곧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최근까지 그녀가 가장 친밀하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측근이었던 터라, 그녀에 관한 의외의 새로운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많이 알려 주었다. 그는 무심코(물론 신중하지 못하게) 이 도시의 저명한 인물들에 대한 그녀의 개인적인 평가도 몇 가지 들려주었는데, 그것은 이곳에 있던 사람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가 하는 말은 마치 영리하지는 않은, 그러나 정직한 사람으로서 산더미 같은 의혹을 단번에 해명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단순한 머리로 그 거북함 속에서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말처럼 애매하고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제5장 나그네 여인
333 리자에게 일어난 재앙과 마리야 티모페예브나의 죽음은 샤토프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날 아침에 나는 잠깐 그를 만났는데, 그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그는 전날 밤 9 시경에(즉, 불이 나기 세 시간 전에) 마리야 티모페예브나를 방문했었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그는 아침 일찍 시체를 보러 갔다 왔지만, 내가 아는 한 그날 아침에는 어디에서도 아무런 증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저녁 무렵이 되자 그의 마음속에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확실히 말할 수 있지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것을 알리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 황혼 무렵이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그만이 알고 있었다. 물론 아무 성과도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결과가 될 뿐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번에 발생한 악행을 폭로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으며, 게다가 막연한 추측만 하고 그자신에게만 완전히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말대로〈불한당들을 짓밟을 수만 있다면〉 스스로 파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표트르 스테파노비치는 그에게 어느 정도 이런 발작이 일어나리라고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의 무시무시한 새 계획의 실행을 내일까지 연기한 것은 심한 모험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6장 분주한 밤
391 비르긴스키는 이날 두 시간이나 꼬박 우리 일당을 찾아다니며, 샤토프는 아내가 돌아오고 아이가 태어났으니 아마 밀고 할것 같지 않다는소식을그들에게 알리려 했다. 〈인지상정으로 보면〉 그가 이런 순간에 위험한 인물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혹스럽게도 에르켈과 람신 말고는 아무도 집에 없었다. 에르켈은 분명하게 그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경청했다. 〈그가 과연 6 시에 출발할까?〉 하는 직설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역시 분명한 미소를 지으며 〈물론 갈 겁니다〉 하고 대답했다.
람신은 보아하니 중병에라도걸린 듯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비르긴스키를 보며 깜짝놀라더니 그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담요 밑에서 손을 저으며 가만히 내버려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샤토프에 관한 이야기는 다 듣고 있다가, 모두들 집에 없다는 소식을 듣고는 웬일인지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페디카의 죽음에 대해(리푸틴을 통해) 알고 있었으며, 자진해서 비르긴스키에게 두서없이 급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비르긴스키가 깜짝 놀랐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비르긴스키의 직설적인 질문에 그는 또다시 손을 내저으며 자기는 〈관계없는 사람이고, 아무것도 모르니 가만히 좀 내버려 달라고〉 갑자기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7장 스테판트로피모비치의 최후의 방랑
451 나는 스테판 트로피모비치가 자신의 정신 나간 계획을 실행할 시기가 다가옴을 느끼면서 매우 불안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그가 특히 실행 전날 밤, 바로 그 무서운 밤에 공포로 매우 괴로워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스타시야는 나중에 그가 아주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바로 잠들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것도 증명해 주지 못한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사형 집행 전날밤에도 아주 깊이 잠든다고 하니 말이다. 신경과민인 사람도 항상 어느 정도기운이 난다는 새벽녘이 되어서야(비르긴스키의 친척인 소령은 날이 새면 신에 대한 믿음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역시 길을 나섰지만, 나는 그가 이전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넓은 도로에 혼자 있다는 것을 결코 두려움 없이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스타시와 자신이 지난 20년간 지냈던 따뜻한 집을 버리고 떠나오는 순간 갑자기 외로움을 느꼈겠지만, 그의 상념 속에 깃든 어떤 절망기 처음에는 그에게서 갑작스러운 고독의 무서운 감정을 틀립없이 완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려나 상관없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공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더라도 어쨌든 큰 길로 나와서 그 길을 따라갔으리라! 여기에는 그 무엇에도 불구하고 그를 매혹시키는 어떤 자부심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오, 그는 바르바라 페트로브나의 풍족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호의 아래 〈평범한 식객으로서〉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8장 결말
515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만행과 범죄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표트르 스테파노비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불행한 마리야 이그나티예브나가 남편이 살해된 날 밤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 남편이 옆에 보이지 않자 그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 옆에는 아리나 프로호로브나가 고용한 하녀가 함께 묵고 있었다. 하녀는 마리야를 좀처럼 진정시킬 수 없어서, 아리나 프로호로브나라면 그녀의 남편이 어디에 있고, 언제 돌아올 것인지 알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시키고서 날이 밝자마자 아리나 프로호로브나를 부르러 달려갔다. 한편 아리나 프로호로브나 역시 근심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이미 남편에게서 지난밤 스크보레시니키에서의 악행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밤 10시가 지나 심신이 끔찍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침대에 엎드려 눕더니 발작적으로 흐느끼면서 자꾸만〈그건 아니야, 아니라고. 그건 정말 아니야!〉라고 말했다. 물론 결국에는 달라붙는 아리나 프로호로브나에게 모든 일을 고백하고 말았다. 그러나 집안을 통틀어 그녀 한사람에게만 말했을 뿐이었다.
536 「나는 저곳으론 가지 않겠다. 무슨 까닭으로 그 아이가 저기까지 올라가겠느냐?」 바르바라 페트로브나는 무섭게 창백해진 얼굴로 하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샤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바르바라 페트로브나는 나는 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다샤가 그녀 뒤를 따랐다. 그러나 다락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우리 주의 시민이 바로 여기, 방문 뒤쪽에 매달려 있었다. 작은 탁자위에 연필로 몇 마디 적어 놓은 종이쪽지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아무도 비난하지 마라. 나 스스로 한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탁자 위에는 망치와 비누 조각,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여분으로 준비해 둔 것이 분명한 커다란 못이 놓여있었다.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가 목을 매는 데 시용한 단단한 비단 끈은 분명 미리 골라서 준비해 두었던 듯 비누칠이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획적이고 그가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우리의 의사들은 시체를 해부한 뒤 정신 착란일 가능성이 절대 없다고 완강하게 부인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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