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힌두교사 깊이 읽기, 종교학이 아닌 역사학으로

 

책머리에
인도 지도
인도 종교사 연표

1부 총론
1. 힌두교란 무엇인가
2. 종교학과 종교사

2부 힌두교 형성사
1. 힌두교의 두 가지 원천
2. 베다후後 시기의 힌두교의 체계화와 불교의 발생
3. 서사시 시기의 종교의 대중화
4. 초기 중세의 종교
5. 후기 중세의 힌두교
6. 근대 힌두교

3부 힌두교의 성격과 의의
1. 여러 전통의 통합
2. 구동 장치로서 바르나(카스트)
3. 관용과 박해 그리고 개종
4. 범신론의 여러 층위
5. 윤회의 시간과 역사로서의 신화

저자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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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6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역사를 일원론과 윤회와 탈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보면 어떨까? 원인과 결과가 과학의 잣대로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는다면, 선과 악이 불분명하고 시간으로서의 선과 후가 뒤섞이거나 돌고 돌아 서로 꼬리를 문다면,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본질을 역사의 근본 원인으로 삼는다면 역사는 어떻게 쓰일까? 한 사람이 역시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집단으로 기술하는 것은 또 어떨까?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고, 팩트가 불분명하고, 해석을 넘어 창작으로 가는 역사학은 또 어떨까?

 


1부 총론
29 힌두교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하면, '힌두'의 종교다. 기독교라는 말은 예수를 기독Christ(그리스도)으로 믿는 사람들의 종교라는 뜻이고 유대교는 유대인의 종교라는 뜻이므로, 힌두교라는 말은 유대교의 용어 구조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힌두’란 무엇인가? '힌두'는 지금의 인더스Indus(산스끄리트어로는 신두Sindhu)강 유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원전 516년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Darius 1세가 인더스 유역을 침략하여 복속시키면서 이 지역이 페르시아인들에게 알려졌다. 그들은 이곳의 강 이름을 따서 이 지역과 주민들을 '신두'라 불렀다. 그런데 발음을 잘못해 '힌두'라 불렀고 이후 '힌두'는 인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712년 무함마드 이븐 카심이 신드Sindh 지역을 정복한 후 아랍 사람들은 이 지역, 즉 인더스강 동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힌두', 그들의 종교를 '힌두교'라고 불렀다.

11세기 이후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세력이 인도를 본격적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그들이 남긴 아랍과 페르시아 문헌을 보면 무슬림 세력은 이 지역을 '힌드' 또는 '힌두'라 불렀다. 즉 그들이 처음 사용한 '힌두'는 지금의 힌두교’라는 종교가 아니라 인더스강 동쪽이라는 지리적 범주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힌두'가 처음으로 특정 종교와 관련된 의미로 쓰인 것은 1030년 페르시아 출신인 알비루니가 쓴 《끼따부-울-힌》에서다. 저자는 불교와도 다르고 자신들의 종교 이슬람과도 전혀 다르다는 의미에서 인도 지역의 종교를 '힌두'라는 말로 불렀다. 이처럼 외부인의 기록을 제외하고는 19 세기 초까지 인도 내에서 산스끄리뜨어로 쓰인 어떤 기록에도 '힌두'를 종교적 의미로 시용한 적은 없었다. 19 세기까지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힌두'교라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힌두'가 현재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특정 종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 영국의 기독교 선교사와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인도의 종교체계는 기독교 같은 단일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기독교에 근거한 종교 개념을 그대로 적용해 인도의 종교들을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종교로 이해하고 하나로 뭉뚱그려 '힌두교'로 불렀다. 거기에 영국의 식민 행정가들이 인구조시를 실시할 때 지금의 힌두교라는 종교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사용하면서 '힌두교'는 특정 종교의 명칭으로 굳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 이전 '힌두교'라는 말은 '인도의 혹은 인도인의 종교'를 의미했고 그 안에는 현대적 의미의 힌두교 외에도 불교, 시크교, 자이나교 등(혹은 심지어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이슬람까지 포함한) 인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가 포함된, 넓은 범주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용어였던 것이다. 설령 힌두교의 개념을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특정 종교의 의미로 한정해 보더라도 그 안에는 너무 많은 하위 범주들이 있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힌두교인지 명확히 규정하기 쉽지 않다.

오늘날과 같은 힌두교 개념이 만들어진 것은 영국인 지배자들이 이 종교를 당시 인도에 있는 여러 종교 가운데 상위 카스트인 브라만Brahman이 남겨 놓은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로 이해하면서부터다. 그 어휘 안에는 이슬람을 배제한다는 뜻이 포함되었다. 여기에 당시 민족주의 발흥에 따라 힌두교라는 용어는 민족주의운동을 일으킨 인도인 선각자들에 의해 민족종교로서의 의미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슬람을 제외한 인도의 종교를 힌두교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한가? 적절하다면, 그 많은 이질적인 요소를 하나의 범주로 묶는 걸 가능하게 만드는 기준은 무엇인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의 공통분모로 꼽는 부분은 고대 인도의 종교 지식과 제례 규정을 담고 있는 베다Veda를 종교의 근본으로 삼는 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힌두교 안에 있는 여러 종교 전통 대부분이 베다를 성스러운 경전이나 기준으로 숭배하는 것은 사실이다. 힌두교의 종교 전통 대부분은 매우 복잡하고 기계적이며 정교한 의례를 기초로 하고 그 의례를 기초로 하여 전개되는 관념적인 우주론에 관한 신학을 가지고 있다. 힌두 신학이 그 기초를 베다에 둔다는 점에서 보면, 여러 힌두교 전통의 공통분모로 베다를 꼽는 것이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35 여기에서 비슈누교/쉬바교/밀교 등이 힌두교라는 큰 범주 안에서 각 종교로서의 정체성과 범주를 갖는 단위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베다 후 시기부터 초기 중세 전까지의 약 1,000년간의 서사시 시기에 형성된 힌두교가 이후 시대의 힌두교와 얼마나 다른 종교냐는 물음에 대해 분명한 답을 내리기는 매우 어렵다. 브라만(교)적 전통 혹은 브라만(교)적 체계/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타당하겠지만, 그것을 힌두교와 따로 구별해서 사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결국 하랍빠 시대(기원전 3300~기원전 1300년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슬람이나 기독교 같은 외래종교를 제외한 인도 아대륙의 모든 종교를 힌두교로 규정하는 게 가장 타당할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현대의 종교 분류에서 별개 종교로 간주하는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등이 들어 있다. 지금은 다른 종교로 분류되지만, 종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이들 종교도 하나의 종교 전통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에서는 이들 종교를 힌두교와 함께 다루기로 한다.

끝으로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의 종파로서 인정받을 수도 있는 쉬바교와 비슈누교라는 이름의 사용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역사학에서는 당대 사람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고대 인도인들은 불교를 '붓다 다르마'라 하지 않고 '붓다를 따르는 자', 즉 불자佛子라는 뜻으로 '붓다Buddha'에서 파생된 명사 어휘인 '바웃다Bauddha'를 써서 '바웃다 다르마'라고 했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불교를 근대 학문의 용어로 옮기면서 고대 인도인들의 생각과 달리 바웃다+이즘Bauddha+ism이 아닌 붓다+이즘Buddha+ism, 즉 부디즘Buddhism이라 했다.

이런 방식의 번역은 근대 이전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인 역시 '불자교'가 아닌 '불교'라 했다. 서양에서 크리스트Christ의 종교를 '기독교'라 명명한 것과 같은 이치다. '기독교'는 라틴어 Christianitas의 영어인 Christianity의 번역어다. 조어법상 형용사+명사형 접미사의 결합이고 'Christian'은 ‘크리스트(의)’를 뜻하는 형용사가 되므로 Christianity는 '크리스트의 종교', 즉 '기독교'가 되는 게 맞다. 서양에서는 이 종교를 기독의 종교라는 개넘으로 보지 기독자의 종교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중국이나 서양에는, 모두 신이나 절대자가 중심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 따르는 자를 중심으로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고대 인도인들의 종교 개념 자체가 없었다. 자기들 개념에 맞춰 번역을 하다 보니 그 번역어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 번역어의 원 대상의 성격에 대해 오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중국과 서양 모두 고대 인도의 사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데다가 다른 문화를 자신의 문화에 맞추어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2부 힌두교 형성사
305 독립 후 하방하여 여러 조직을 갖춘 극우 힌두뜨와 세력은 시민단체로서 권력을 잡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닫고 권력 획득을 위해 인도국민단을 창당한다. 인도국민단은 1977년 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꾼 후 정권 교체를 이루었고 인도국민당으로 재창당한 후 1998년 재집권했다. 그들은 두 번의 집권기 동안 똑같이 역사 교과서 문제를 정치의 중심 이슈로 끌어올렸다.

그들은 단호하게 인도국민회의-회의당 정권의 역사 교과서가 공산주의에 의해 왜곡된 역사라 규정하면서 검인정 교과서 가운데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국립교육연수원 NCERT 간행 역사 교과서를 새로 집필하게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힌두 근본주의 색채를 덧입혔다. 그들은 좌파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애써 민족의 위대함을 무시한다는 논리를 폈다. 1998년 다시 집권하기 전에 그들은 무슬림 사원 바브리 마스지드를 파괴하고 그 위에 라마 사원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자신들이 암살한 간디가 역설하고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마음에 품던 이상향의 정치인 라마라지야의 환상을 구체화하려는 시도로, 종교와 정치가 만날 때 발생하는 극한 모순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들의 역사 왜곡 가운데 중요한 것이 하랍빠 문명의 주인공이 아리야인이라는 주장이다. 하랍빠 문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졌고 그 즈음 그들과 아무 관계없는 아리야인들이 이곳을 거쳐 인도 아대륙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여러 역사적 근거를 통해 밝혀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랍빠문명이 베다문명이고, 근래서 베다가 세계최고의 경전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힌두교가 세계 문명의 젖줄이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이 같은 왜곡의 단초는 《리그 베다》에 나오는 '사라스와띠' 강이 제공했다. 사라스와띠강은 《리그 베다》에서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 역할을 하는 강으로 언급되는데 지금은 메말라 사라져 버렸다. 힌두뜨와 신봉자들은 이 사라스와띠강에서 하랍빠문명이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사라스와띠'를 기존 학설의 '인더스'에 대입시킨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면 궁극적으로는 인더스가 위치하고 있는 파키스탄에 대비하여 인도에 위치하고 있는 사라스와띠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전형적 인 반이슬람 힌두 이데올로기의 역사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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