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안전, 영토, 인구 - 10점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난장

프랑스어판 편집자 서문

1강. 1978년 1월 11일
2강. 1978년 1월 18일
3강. 1978년 1월 25일
4강. 1978년 2월 1일
5강. 1978년 2월 8일
6강. 1978년 2월 15일
7강. 1978년 2월 22일
8강. 1978년 3월 1일
9강. 1978년 3월 8일
10강. 1978년 3월 15일
11강. 1978년 3월 22일
12강. 1978년 3월 29일
13강. 1978년 4월 5일

강의요지
강의정황
옮긴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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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1978년 2월 15일

199 목자의 은유 같은 것은 데모스테네스에게서도 거의 발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 고전기의 정치 어휘라 불리는 것에서 목자의 은유는 희귀한 은유입니다. 

목자의 은유는 희귀합니다. 하지만 명백한 예외, 폴라톤이라는 중대하고 주된 예외가 있습니다. 훌륭한 행정관, 이상적인 행정관이 목자로 간주되고 있는 텍스트가 플라톤에게는 많이 있습니다. 훌륭한 목자라는 것은 훌륭할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참된 목자, 이상적인 목자라는 것입니다. 『크리티아스』에서도, 『국가』에서도, 『법률』에서도, 『정치가』에서도 그렇습니다.

200 『정치가』를 제외한 플라톤의 다른 텍스트들에서 목자에 대한 은유는 세 가지 방식으로 사용됐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 이 은유는 인간이 탄생했을 무렵, 즉 시대의 불행이나 험난함이 인류의 조건을 바꿔버리기 이전에 신들이 인류에게 행사한 특유의 절대적이고 행복한 권력의 양상을 가리켰습니다. 신들은 원래 인류의 목동, 목자입니다. [인간들]을 양육하고, 인도하며, 식량을 제공하고, 품행의 일반 원칙을 부여하며, 인간들의 행복과 안락을 보살핀 것은 신들이었죠 이런 용법은 『크리티아스』에서 볼 수 있는데 『정치가』에서도 발견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차차 알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현재의 행정관, 험난한 시기의 행정관, 신들이 주재하는 인간의 지고한 복락이 끝나고 난 이후의 행정관 역시 목자로 여기는 텍스트들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이 행정관-목자는 결코 도시국가의 창설자나 핵심적인 법률의 입법자가 아니라 단지 중요한 행정관으로서만 간주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점은 『법률』에서 매우 특징적이고 명백하게 나타나는데, 사실상 행정관-목자는 종속된 행정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행정관-목자는 경비견, 심하게 말하면 경찰과 도시국가의 진정한 주인이나 입법자 사이에 있는 어중간한 자입니다. 『법률』의 10권을 보면, 한편으로 행정관-목자는 자신의 가축 무리에서 멀리 떼어 놓아야만 하는 포식동물과 대조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국가의 수뇌인 주인들과도 구별됩니다. 물론 그는 관료-목자이지만 단지 관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에 의해 표상되는 것은 정치적 기능의 본질도, 도시국가 내 권력의 본질도 아닙니다. 여기서 목자는 『정치가』에서 보조적이라고 불린 기능, 즉 측면적 기능으로 표상될 뿐입니다

202 『정치가』라는 중요한 텍스트가 논의하는 바가 바로 이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중요한 텍스트는 도시국가의 이러저러한 행정관이 아니라 탁월한 행정관을 확실히 특징지을 수 있는지, 혹은 도시국가 안에서 행사되는 정치적 권력의 본성 자체를 자신의 무리에 대한 목자의 행동과 권력이라는 모델에 근거해 확실히 분석하는 것이 가능한지의 문제를 정면에서 직접적으로 제기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정치는 목자-무리의 관계라는 형식에 부합되는 것일까요? 바로 이것이 『정치가』의 근본적인 물음, 적어도 근본적인 차원 중 하나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텍스트 전체가 "아니다"라고 답하고 있는데, 이 부정은 제가 보기엔 들라트가 상투어라고 잘못 부른 것,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에서는 낯익은 주제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을 완전히 반박할 수 있을 만큼 꽤 상세해 보입니다. 도시국가의 수장은 무리 [군중]의 목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바로 그 주제 말입니다.

203 명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게 되는데, 이 분석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행해집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명령하는 방식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명령을 [다른 사람에게] 명령할 수도 있는데 사자, 전령, 노잡이의 통솔자, 예언자 등이 그렇게 합니다. 이와 달리 자기 자신의 명령을 전달하는 일이 있습니다. 정치가가 하는 일은 분명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내리는 이 명령, 자기가 자신의 이름으로 내리는 이 명령은 무엇에게로 향할까요? 명령은 무생물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건축가가 하는 일, 즉 자신의 의지와 결정을 목재나 석재 같은 무생물에게 부과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생물, 본질적으로 생명존재에게도 명령을 부과할 수 있습니다. 건축가와 달리 정치가는 바로 이쪽에 속합니다. 정치가는 생명존재에게 명령할 것입니다. 

204 마지막으로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이든지 생명존재에게, 혹은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으로서의 생명존재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정치가는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동물이건 인간이건 생명존재의 무리에게 명령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무리의 목자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정치가는 인간의 목자, 즉 도시국가에서 인구를 구성하는 생명존재 무리의 목동이라고 말입니다. 분명 어설픈 것이긴 합니다만 결국 이 대화편[『정치가』]은 상투어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낯익은 의견을 기록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이 낯익은 주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문제삼고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205 요컨대 '행정관=목자'를 정의의 불변항으로 둔 채 목자의 권력이 관계[관여]하는 대상을 다변화한다면 물에 사는 동물, 그렇지 않은 동물, 다리로 걷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 갈라진 발가락을 가진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 등 가능한 모든 동물을 분류할 수 있을테고 일종의 동물 유형론까지 얻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물음은 전혀 진전시키지 못하는 셈입니다. 지시술[명령하는 기술]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원래] 물음에 관해서는 말입니다. 불변항으로서의 목자라는 주제는 전적으로 무용하고, 동물의 범주에 속해 있는 가능한 가변항들만을 참조토록 만들 뿐입니다.

206 목자의 단독성·단일성의 원칙에 대한 반론이 바로 이 대목에서 곧장 제기됩니다. 플라톤이 왕의 경쟁자, 양치기와 관련한 왕의 경쟁자라고 부른 존재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왕이 양치기라고 정의된다면, 인간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농민이나 빵을 만들어 식량으로 공급하는 빵집 주인 역시 양의 무리를 초원으로 인도해 풀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는 목자만큼이나 인간의 목자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농민이나 빵집 주인은 왕의 경쟁자, 인간의 목자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병자들을 돌보는 의사도 목자이고, 양치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동의 적절한 교육, 건강, 신체의 활력과 능력을 돌보는 체육교사나 교육자도 인간의 무리와 관련해서는 목자입니다. 누구나가 자신을 목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가의 경쟁자는 그만큼 많아지게 됩니다.

207 분석의 세 번째 단계에서는 어떻게 정치[가]의 본질 자체를 파악할 것인가가 문제시됩니다. 여기서 신화가 개입됩니다. 『정치가』가 제시하는 신화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원래 세계는 올바른 방향, 그게 아니라면 행복한 방향,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돌고 있지만 그 시기가 끝나면 정반대 방향으로 회전하게 되어 역경이 온다는 생각 말입니다. 세계의 축이 원래 방향으로 돌 때 인간은 행복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것이 크로노스의 시대입니다. 플라톤은 이 시대를 "지금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속하지 않고, 이전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속한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세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수많은 종의 동물이 있고 그 각각의 종이 무리가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종의 동물 중 특수한 무리가 있는데 그것이 인간의 무리입니다. 이 무리의 선두에 목자가 있습니다 이 목자는 모든 종의 동물을 지배하는 목자의 화신입니다. 이 목자는 누구일까요? '신 자신'이라고 플라톤은 말합니다. 현재 진행중인 세계의 구축에 인간이 아직 속하지 않는 이 시기에 인간 무리의 목자였던 것은 신 자신입니다.

208 이 목자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진실로 신은 무한하고, 만사를 망라하며, 용이한 일을 합니다. 용이한 이유는 자연 전체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식량은 나무가 제공해주고, 기후는 온화해 인간이 집을 지을 필요 없이 총총한 별 밑에서 잠을 잘 수 있으며, 죽자마자 다시 살아났습니다. 식량도 풍족하고 늘 새롭게 살 수 있는 이 행복한 무리, 위협도 곤란도 없는 이 무리를 신이 지휘합니다. 신은 이 무리의 목자입니다. "신이 목자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치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라고 플라톤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정치는 세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돌고 있던 이 최초의 행복한 시간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정치는 세계가 역방향으로 돌 때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세계가 역방향으로 돌 때 신들이 후퇴하고 역경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물론 신들은 인간을 완전히 버리지 않지만 불이나 [기예] 등을 주는 식으로 간접적으로만 인간을 돕습니다. 신들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최초 단계에서 그랬듯이 진정 편재적 · 무매개적으로 존재하는 목자가 아닙니다. 신들은 후퇴해버렸고 인간은 서로서로를 인도해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제 인간에게는 정치와 정치가가 필요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플라톤의 텍스트는, 이제 다른 인간들을 담당하게 되는 이 인간들[정치가들]은 신들이 인간들의 위에 있었던 것처럼 다른 인간들의 무리 위에 있을 수는 없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정치가]들 자체는 인간의 일부이지 목자로 간주될 수는 없다는 것 입니다.

209 인류의 예전 구성이 사라졌을 때, 즉 신-목자의 시대가 끝났을 때에야 정치, 정치적인 것, 정치가가 등장한다면 정치가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해야 좋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이 기술은 무엇으로 이뤄질까요? 목자 모델을 대신해 [훗날의] 정치 관련 문헌에서 영원히 유명해지는 모델, 즉 직조 모델이 제기되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정치가는 직조공입니다. 직조 모델은 왜 좋은 모델일까요? 이미 잘 알고들 계실테니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먼저 직조 모델을 사용하면 도시 국가 안에서 이뤄지는 정치행위의 상이한 양상을 일관되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목자라는 불변하며 포괄적인 주제는 인류의 예전 상태, 또는 인간의 목자라고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로 귀결될 뿐입니다. 이와 달리 직조공이라는 모델을 사용하면 인간들에게 명령한다는 것과 관련해 도시국가 안에서 펼쳐지는 모든 과정 자체의 분석적 도식을 얻을 수 있죠. 우선 정치를 보조하는 기술 그러니까 사물을 인간에게 부과[명령]하는 형식이면서도 딱히 정치적이지는 않은 형태의 기술을 [정치술에서] 따로 분리해낼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정치가의 기술은 직조공의 기술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술은 목자가 무리 전체를 돌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총괄적으로 돌보는 기술이 아닙니다. 정치는 직조공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보조적이거나 예비적인 몇몇 행위에 근거해야만, 그리고 그런 행위의 도움을 받을 때에만 전개될 수 있습니다.

210 왕의 기술은 결코 목자의 기술이 아니라 직조공의 기술, 사람들을 "융화와 우애에 기초한 공동체로" 결합시키는 기술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치적인 직조공, 직조공-정치가는 다른 기술과는 전혀 다른 특유의 기술을 통해 모든 직물 중에서도 가장 멋진 직물을 만들어냅니다. 플라톤은 "이 경이로운 직물의 주름속에 노예와 자유인을 비롯해 국가의 모든 주민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마침내 한 나라가 될 정도의 행복으로 인도됩니다.

211 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사목이라는 주제가 완전히 배제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플라톤 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설령 사목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도시국가에]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사목은 도시국가에 필요할 수는 있을지언정 정치적인 차원과 관련해서는 종속적일 뿐인 활동, 예를 들면 의사·농부·체육교사·교사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목자와 비교될 수 있지만, 정치가는 그가 행하는 특별하고 특수한 활동 때문에 목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211 결국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종교적이고 교육적인 소규모 공동체에서나 기능할 수 있는 사목의 형태를 도시국가 전체의 수준에서 활용하려는 착오를 저지른 셈입니다. 왕은 목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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