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2. 9. 22.
반항하는 인간 -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민음사 |
옮긴이의 말 9
서론 13
1 반항하는 인간 29
2 형이상학적 반항 49
3 역사적 반항 187
4 반항과 예술 435
5 정오의 사상 479
작품 해설 529
작가 연보 572
22 생활을 통해 겪어 가는 삶, 하나의 출발점, 그리고 실존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 해당되는 것, 이런 것이 부조리의 진정한 성격인데 이 점을 간과한 채 우리가 부조리 속에 버티고 있으려고 애쓰면서부터 이 근본적인 모순은 다른 수많은 모순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부조리란 그 자체가 모순이다.
부조리는 그 내용에 있어서 모순이다. 왜냐하면 산다는 것은 자체가 하나의 가치 판단인데 부조리는 삶을 유지하기를 원하면서도 가치 판단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살아 숨 쉰다는 것, 그것은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삶이란 끊임없는 선택이라는 것은 확실히 틀린 말이다. 그러나 선택이 배제된 삶이란 상상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단순한 관점에서 볼 때, 부조리의 입장이란 행동의 차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표현의 차원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모름지기 의미 부정의 철학은 그 철학이 표현된다는 사실 자체로만 보아도 모순 속에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그 철학은 조리가 없는 것에 최소한의 조리를 부여하고, 그것의 주장에 따른다면 당연히 일관성이 없는 곳에 귀결을 끌어들인다. 말한다는 것은 수정 보완한다는 것이다. 의미 부정에 근거한 유일하게 조리에 맞는 태도는 아마도 침묵일 것이다. 침묵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라면 말이다. 완전한 부조리는 침묵하려고 애쓴다. 만약 부조리가 말을 한다면, 그것은 그 부조리가 스스로에 만족하고 갔거나 혹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스스로를 잠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족과 이러한 자기 판단은 조리한 입장의 뿌리 깊은 애매성을 잘 드러내 준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고독한 모습을 표현한다고 자처하는 부조리는 인간을 거울 앞에서 살도록 한다. 생살을 찢는 것 같은 원초적 고통은 그리하여 안락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상처를 조심해서 살짝살짝 긁으면 드디어 쾌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부조리의 모험가들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위대함은 그들이 부조리에 만족하기를 거부하고 오직 그것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을 잊지 않고 유의했다는 사실을 보고 알 수 있다. 그들은 최하가 아니라 최상을 얻기 위해 파괴한다. 니체는, "뒤엎으려고만 할 뿐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는 자들이야말로 나의 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뒤엎는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하기 위해서다. 그는 '돼지 낯짝’의 저속한 향락자들을 경계하고 청렴·성실을 찬양한다. 자기만족을 피하기 위하여, 부조리의 추론은 그리하여 금욕을 발견한다. 부조리의 추론은 흩어져 없어지기를 거부하며 자의적인 헐벗음으로, 침묵의 결심으로, 반항이라는 기이한 고행으로 나아간다. 랭보는 "거리의 진흙탕 속에서 빽빽거리는 알량한 범죄"를 노래하며 하라르로 달려가서는 기껏 그곳에서 가족도 없이 산다고 투덜댄다. 삶이란 그에게 "만인이 연출하는 하나의 익살극"이었다. 그러나 임종의 자리에서 그는 누이를 항하여 이렇게 외친다. "나는 땅속에 묻힐 텐데 너는 햇빛 환한 세상을 걸어 다니겠구나!"
삶의 법칙으로 간주되는 부조리는 그러므로 모순적인 것이다. 부조리가 우리에게 살인의 정당성을 결정지어 줄 만한 가치들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해서 놀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특별히 선택된 어떤 감정을 토대로 하여 하나의 태도를 설정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부조리의 감정이란 다른 많은 감정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양차 대전 간의 그토록 많은 사상, 행동들에 색조를 부여했다는 사실은 단지 그것의 영향력과 그 정당성을 증명할 따름이다. 하나의 감정이 강력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보편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시대 전체의 오류는 하나의 절망적인 감정 ―감정으로서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은 스스로를 극복하는 것이건만— 을 바탕으로 하여 보편적 행동 규칙들을 시하거나 혹은 제시되었다고 상정한다는 데에 있었다. 큰 고통들은 큰 행복들이 그렇듯 어떤 추론의 발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매개체다. 그러나 추론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그 매개체들을 반복하여 마주치거나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조리의 감수성을 고려하고, 자신과 타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병을 진단하는 것이 정당한 행위라 할지라도, 이 감수성 속에서, 그리고 이 감수성이 전제로 하는 허무주의 속에서 하나의 출발점, 체험한 하나의 위기, 혹은 실존적 차원에서의 방법적 회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고정된 거울의 유희는 깨뜨려 버리고 거역할 수 없는 운동 속으로 접어들어 그 운동을 통해서 부조리 자체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거울이 깨어지고 나면 이 세기의 질문들에 대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방법적 회의로서의 부조리는 모든 것을 백지 상태로 환원시켰다. 이제 그것은 우리를 막다른 궁지에 남겨 놓았다. 그러나 회의로서의 부조리는 스스로를 돌아봄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탐구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추론은 앞서와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된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모든 것은 부조리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외침만은 의심할 수 없고 적어도 나 스스로의 항변만은 믿지 않을 수 없다. 부조리의 경험의 테두리 내에서 이처럼 내게 주어진 최초이자 유일하게 자명한 것은 다름 아닌 반항이다. 모든 앎을 상실한 채 살인을 하거나 혹은 살인에 동의하게끔 내몰린 처지의 내가 의지할 것이라곤 오직 이 자명한 것뿐이다. 이 자명한 것은 내가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인하여 한층 강화된다. 반항은 부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조건 앞에서 이 어이없는 광경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나 반항의 맹목적 충동은 혼돈 가운데서 질서를 요구하고 흩어져 사라져 가는 것 가운데서 통일을 요구한다. 추문은 끝나야 한다고, 지금까지 끊임없이 바닷물 위에 쓰이고 있던 저 변화무쌍한 것들이 이제는 마침내 불변의 것으로 고정되어야 한다고 반항은 외치고 주장하고 바란다. 반항이 고심하는 바는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변형시킨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인데, 행동한다는 것은 장차 살인으로 변할 것이다. 반항으로서 살인이 정당한 것인지 어떤지 알지도 못하는 데 말이다. 반항은 다름 아닌 여러 가지 행동들을 낳는데 그 행동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소임은 바로 반항의 몫이다. 그러므로 반항은 그것 자체로부터 그 근거들을 도출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그 근거를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항은 행동 방식을 터득하기 위하여 자기 점검에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형이상학적인 것이든 역사적인 것이든 두 세기에 걸친 반항이 바로 우리의 성찰 대상이다. 오직 역사가만이 차례로 등장하는 여러 교리들과 운동들을 세부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거기서 전체를 꿰는 하나의 흐름을 찾아내는 것은 가 능할 것이다. 이 시론에서 우리는 단지 몇몇 역사적 지표와 해독을 위한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려 할 따름이다. 또 이가설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 가설로 모든 것을 다 밝혀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부분적으로나마 우리 시대의 진행 방향을 그리고 거의 전체적으로 우리 시대 특유의 기상천외함을 설명해 준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놀라운 역사는 유럽의 오만의 역사다.
어쨌든 반항은 그것의 태도, 주장, 성과에 대한 검토가 마무리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그 타당성을 제시해 줄 수 있었다. 아마도 반항이 얻어 낸 결실 가운데는, 우리가 부조리로부터 얻어 낼 수 없었던 행동 규범, 적어도 살인할 권리 혹은 의무에 대한 하나의 지침 그리고 끝으로 창조에의 희망이 담겨 있다. 인간은 생긴 그대로이기를 거부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문제는, 이 거부가 과연 인간을 오로지 자신과 타인들의 파괴로만 몰고 가는가, 반항은 반 드시 법세계적인 살인의 정당화로 마감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와 반대로, 가당치 않은 무죄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대신 납득이 될 만한 어떤 유죄의 원리를 찾아낼 수는 있는가 하는 점을 알아보는 데 있다.
31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농(non)'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반항의 첫 충동을 느끼는 순간부터 '위(oui)'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일생 동안 주인의 명령을 받기만 했던 노예가 돌연 새로운 명령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 '농'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이를테면 '언제까지건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여기까지는 따랐지만 이제 더는 안 된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라는 뜻이며 나아가서는 '넘어서면 안 되는 선이 있다.'라는 의미다. 요컨대 이 '농'은 어떤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상대편이 경계를 넘어서까지 자신의 권리를 확장하여 그것과 정면으로 맞서 있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제한하게 될 때, '이건 너무 심하다.'라고 느끼는 반항인의 그런 감정 속에서 우리는 그와 똑같은 한계의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반항의 충동은,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어떤 침해의 단호한 거부와 동시에 당연한 권리라는 막연한 확신,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건 내 권리잖아.'라고 하는 반항인의 느낌에 근거해 있다. 반항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어딘가 옳다는 감정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바로 그런 점에서 반항하는 노예는 '농'과 동시에 '위'라고 말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경계선을 시인함과 동시에, 그가 경계선의 이쪽 편에 있다고 짐작하고 경계선의 이쪽 안에 간직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긍정한다. 그는 자기속에 '그렇게 할 가치가 있는' 어떤 것, 사람들이 유의할 필요가 있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집스럽게 증명하려 든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는 그를 억압하는 명령에 맞서서 그가 인정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억압받지 않을 일종의 권리를 대립시킨다.
모든 반항에는 침해자에 대한 반감과 동시에 인간 자신의 어떤 부분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전적인 긍정이 담겨 있다. 반항하는 인간은 그러므로 암암리에 모종의 가치 판단을 개입시키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위험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지킨다. 그때까지 반항하는 인간은 적어도 침묵한다. 설령 부당하다고 판단된다 할지라도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 절망 상태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침묵한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아무것도 판단하지도 욕망하지도 않는다고 믿도록 버려두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 절망이란, 부조리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는 모든 것을 판단하고 원하지만 개별적으로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침묵이 그 점을 잘 말해 준다. 그러나 반항하는 인간이 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부터, 그 말이 '농'일 때도 그는 원하고 판단한다. 반항하는 인간이란, 어원적으로 갑자기 뒤로 돌아서며 돌변하는 자다. 그는 주인의 채찍질에 못 이겨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돌연 몸을 획 돌려 주인과 맞선 것이다. 그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에다가 바람직한 것을 대립시킨다. 모든 가치가 다 반항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반항의 운동은 암암리에 하나의 가치를 내세운다. 그런데 그것이 적어도 어떤 가치이기는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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