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우드러프: 최초의 민주주의 ━ 오래된 이상과 도전

최초의 민주주의 - 10점
폴 우드러프 지음, 이윤철 옮김/돌베개

바치는 글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
서문
일러두기

제1장 서론: 민주주의와 이의 대역들
제2장 민주주의의 생生과 사死
제3장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그리고 참주가 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제4장 조화
제5장 법nomos에 따른 통치
제6장 본성에 따른 자연적 평등성
제7장 시민 지혜
제8장 지식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추론
제9장 교양 교육paideia
제10장 맺는 말: 우리는 민주주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부록
지도: 민주주의 시기의 그리스
연표
인물 소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간략한 소개
고대 문헌 자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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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민주주의와 이의 대역들

23 사람들에 의한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정치 체제인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이념이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를 약속하는 동시에 우리의 가장 나쁜 성향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민주주의 안에서 마땅히 모든 성인들은 서로 동의할 자유가 있으며 또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를 논하는 대화에 참여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누구도 오만함과 남용으로 귀결되는 무분별한 권력을 누릴 자유는 없다. 그러나 다른 많은 훌륭한 이념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역시 대역*들을 갖고 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민주주의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그 그림자들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대역들이란 일견 진짜로 혼동될 정도로 진짜의 모습에 가까운 나쁜 이념들을 말한다. 민주주의는 많은 대역들을 가지며, 그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다수결의 원칙이다.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이란 단지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정치 체제일 뿐, 그 자체로 민주주의는 아니다 민주주의를 고안했던 고대의 아테네인들은 이 사실을 가혹한 대가를 지불해가면서 배웠다. 몇 차례의 계급투쟁을 겪은 후, 그들은 모든 시민들을 포괄하고 사회 전반에 이득을 제공하는 정치 체제를 성립하기 위한 실천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들은 거의 200 년 동안이나 민주주의의 체계를 고치고 보완했다. 심지어 마케도니아의 압도적인 권력이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몰락시키고자 했을 때에도 완전한 민주주의 체계의 성립을 위한 아테네인들의 이 작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버지인 필리포스 왕으로부터 전제정치 체제를 물려받았으며, 자신 역시 이 체제를 후대의 계승자들에게 물려주었다. 후대의 계승자들은 전제정치 체제를 수 세대 동안 유지했다. 훗날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바로 마케도니아의 전제정치 체제였다.

25 헌법은 그것을 제정한 자들이 직면하는 문제들을 푸는데 있어서 최고의 해결책이기는 했다. 하지만 헌법이 그 자체로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아울러 헌법이 지닌 실질적이고도 신성한 권한은 사실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진화의 과정 앞에 놓인 하나의 장애물일 뿐이다. 헌법이 가진 신성한 권한은 어쩌면 좋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헌법을 제정한 지들은 공화정 체제가 민주정보다 우리에게 더 나은 것들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주장은 어떤 점에서는 옳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혼동을 피하고자 한다면, 올바른 이름으로 그 정치 체제들을 불러야 한다. 공화정 체제가 필연적으로 민주정 체제인 것은 아니다.

26 아테네의 실패로 인해 과거 많은 사상가들은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외면해왔다. 그 당시의 역사가들과 철학지들은 아테네 정치 상황의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에 더 주목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민주주의 이념들의 어두운 면을 비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심한 악취를 풍기기만 하는 정치 체제라는 그들의 비판은 이후 2,000여 년에 걸쳐 후대 사상가들의 생각을 지배했다. 19세기 다시 민주주의의 부흥이 일기 전까지 비평가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매력적인 이념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것을 현실의 삶에서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은 우리를 재난의 길로 이끌었을 뿐이다. 아테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역사를 보라."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해석은 옳지 않았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아테네의 역사 역시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아테네에 있었던 규범으로부터의 일탈과도 같은 몇몇 예외적인 경우들에만 주목했을 뿐이며, 이 예외적인 경우들이 규범 전체를 대표한다고 잘못 판단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민주주의의 대역만을 보았을 뿐이며, 그 대역이 얼마나 해로운가에 주목하면서 민주주의의 불가피한 결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28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더 이상 논쟁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거의 모든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경쟁 상대를 댈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정치 체제이며, 개선된 농업 기술이나 종교와 함께 우리가 세계 변방에 전해주어야 할 정치 체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과거 민주주의가 언제나 그처럼 이해되었던 것도 아니고 오늘날 세계의 모든 곳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전통적인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곳의 지도자들은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현대의 방식, 즉 미국식의 무분별한 자유에 의해 야기된 문화적 유린에 억지로 짜맞추어진 일종의 위장 장치가 아닌지 지금도 의심하고 있다.

35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점은 결정 사안들이나 후보들이 어떤 선택 절차를 거쳐 투표에 회부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시민들 모두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경우에는 평범한 시민들이 투표로 부칠 사안들에 대해 전혀 발언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도시국가라고 보기 힘들었다. 반면 아테네에서는 그와 같은 사안들에 대해 시민들이 직접 발언권을 가졌다. 엄밀히 말해 스파르타의 원칙은, 마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트로이 외곽에 주둔한 그리스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민회에서 투표는 할 수 있으나 발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반대자들은 평범한사람들이 정책에 대해 발언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지하다는 근거를 들어, 스파르타의 그러한 원칙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평범한 시민들이 그러한 정치적 사항들을 다루는데 필요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35 투표를 둘러싼 쟁점은 20세기 독재의 역사로부터 우리에게 친숙해진 것이 틀림없다. 독재지들은 국민들에게 투표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강요했다. 그러나 그런 투표들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투표 용지 위에 적혀 있는 바를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민주적이라고 여겨지는 현대의 국가에서조차 우리는, 시민들이 무엇을 찍을지에 대한 선택권을 빼면 실제로 스스로가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37 민주주의와 참주정 체제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거의 모든 이들이 종종 민주주의를 그것의 대역인, 그리고 흔히 다수결의 원칙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여겨지는 ‘중우정치'와 혼동한다. 중우정치는 확실히 참주정의 일종이다. 중우정치는 소수를 위협하고 배제하며 다수의 절대적 권력 아래 소수를 종속시켜버린다. 그리고 다수에 의한 독재는 여타의 독재 체제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끝장낸다. 만약 당신이 자유를 얻기 위해 다수에 참여해야만 한다면 이는 더 이상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은 다수의 권력 행사, 특히 법에 의한 지배에 제약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다수가 법 위에 선다면 이는 독재 권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민주주의는 전체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의 조화를 위해 어떠한 소수의 이익도 결코 무시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장해 줄 실천적인 방법들을 찾고자 해왔다.

38 최초의 민주주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참주정을 피하고자 했다. 민주주의가 대부분의 정책 사항들과 지도력을 논하기 위해 투표 행위를 허용했음에도, 결코 스스로를 다수결로 정의 내리지 않았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초의 민주주의가 가진 본질적인 특징은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모든 시민들의 평등한 정치 참여다. 이 둘은 늘 함께 이루어진다. 다수결의 원칙을 포함하여 참주정은 그것이 어떤 종류든 간에 언제나 일부의 시민들을 정치 활동으로부터 배제시킨다.

41 민주주의는 사람들에 의한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정치 체제다. 물론 이와 같은 설명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시작점이 될 수는 있겠지만, 민주주의의 정의定義는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민주주의일까? 앞으로 이 책에서 다룰 일곱 가지의 이념들을 이행하고 실현시키려는 정치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다. 그 일곱 가지 이념들이란,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 조화, 법에 따른 통치, 본성에 따른 자연적 평등성, 시민 지혜, 지식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추론, 그리고 일반교양교육이다. 민주주의 성립을 위한 덕목으로 이 이념들 외에 정의正義(Justice) 와 경의敬意(Reverence) 를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미 그 자체로 마땅히 인정받고 따라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것들을 통해 정치 체제를 식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43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데 있어 아테네인들은 오랜 시간 자신들의 정치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한 예로 그들의 배심원 선출 방식은 현재 우리의 방식보다도 부패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민주주의를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이념들에 대해 분명한 시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그와 같은 정치적 진보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분명한 시각을 갖고 있지 못한 듯하다. 민주주의의 이념들에 대한 우리의 혼동은 깊기만 하다.

45 만약 민주주의를 한낱 꿈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 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린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것들에 대해 주의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들이 우리가 실제로 실천하는 것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이념들에 대한 시각이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한다. 어쩌면 그것들은 애초부터 비현실적이게끔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현실직이 되라!"는 구호는 사람들을 침체와 안주라는 실패로 이끌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민주주의를 향한 더 나은 방안들을 생각하고 이를 구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시민들이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치에 대한 이해와 방법을 제공할 수 있는 공공교육을, 그리고 더욱 신뢰할 만한 정의를 제시하는 사법기관을 항상 찾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이상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스스로 원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길 희망할 수 있겠는가?

46 민주주의의 적들은 바로 두려움과 무지다. 무지는 두려움을 양육하고, 두려움은 다시 무지로 이어진다. 우리 주변의 많은 위험들에 대해 우리는 두려움에 떨면서 우리의 자유를 단지 안전해 보이는 것과 기꺼이 바꾸려고 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이념인 자유를 스스로 팔아 치우면서 그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선거나 소송에서의 승리로 인해 흥분에 휩싸인 채, 민주주의가 말 그대로 '모든 사람', 즉 경쟁에서 이긴 자들뿐만 아니라 진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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