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 10점
김경현 지음/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_ 머리말: 1700년 만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제1부 | 시대배경: 서기 3세기의 로마 제국
제2부 | 서부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제3부 | 황제의 신앙과 종교정책
제4부 | 제국과 교회의 통일
제5부 |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최후와 유산

_ 저자 후기·297
_ 참고문헌·302
_ 찾아보기·313

 


머리말: 1700년 만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9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년-서기 14년)와 콘스탄티누스(서기 306-337년), 이 두 황제는 현대세계에서 매우 각별한 대접을 받아왔다. 가장 긴 재위 기간 동안 획기적 위업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체제 전환의 기틀을 다졌고,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를 기독교 제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20-21세기에 걸쳐 그들의 생몰연대, 혹은 획기적 업적을 이룬 해들이 기념되었으니,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에는 2000주년이었고, 콘스탄티누스의 경우에는 1700주년이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고대의 영웅들을 논할 때면 늘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를 손꼽게 되지만, 그들은 정작 두 황제와 같은 영예는 누리지 못했다.

2014년은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서거 2000년이었다. 한 해 전부터 유럽, 미국, 호주 등 15개국에서 박물관 전시회, 학술대회, 기념강연 등100여 건이 넘는 행사가 기획되었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전문연구의 연륜이 짧은 대한민국에서도 학술제가 열리고 기념서적이 출간되었다. 학술적이었던 서거 기념제와 달리 탄신 2000주년(1937년) 기념제는 사뭇 정치적이었다. 때마침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아우구스투스와 그 시절 로마제국의 영광을 파시즘의 선전수단으로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국민이 자신을 영도자(duce) 로 삼아 '새 제국'을 꿈꾸게 하려던 속셈이었다. 

10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한 현대인의 기억에 그처럼 어두운 구석이 있는 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밝다. 무엇보다 그는 제국을 기독교화한 황제로 기억된다 최초로 기독교 신앙을 공인한 밀라노 칙령(313년), 그리고 삼위일체를 정통교리로 확립해 교회를 통일한 니카이아 종교회의(325년)는 모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도한 것으로, 그의 대명사 같은 사건들이다

11 게다가 이 종교적 전환은 로마사를 넘어 세계사적인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된다. 그러한 전환이 없었다면, 뒤이은 천년의 기독교 시대, 즉 중세 서유럽의 세계는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근 프랑스 고대사학자 뿔 벤느는 『우리의 세계는 언제 기독교가 되었나?』라는 책에서 심지어 그것의 인류사적 의의를 역설하기까지 했다. "내가 보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크게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회심을 통해 자신이 초자연적 서사시로 여겼던 사건에 참여하고, 그리하여 인류의 나아갈 바와 안녕을 보증할 수 있었다. 그 안녕을 위해, 자신의 치세가 종교적으로 엄청난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시대라 느꼈다. ··· 그는 로마제국의 안녕을 위한 천년 대계 속에서 신이 정한 역할을 하게끔 선택되었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역사적 의의는 그에 미치지 못하지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콘스탄티누스의 위업이 있다. 동쪽으로 제국의 수도를 이전한 사실이다(330년). 그는 흑해 입구의 작은 그리스 도시 비잔티온을 개조해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 그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옛 수도 로마를 대체한 이 사태는, 장기적으로 제국의 중심이 서부에서 동부로 옮겨 가는 구조변화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장기적 여파로 동서의 운명이 갈렸다. 서부제국은 오래지 않아 라인-다뉴브강 너머에서 침입한 야만족에게 무기력하게 유린당하기 시작해 결국 쇠망한 반면, 동부 로마제국은 천년을 더 존속했다. 동부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창건자로 여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13 이같이 성대한 현대의 콘스탄티누스 기념제는 여러모로 이례적인 현상이다. 다른 역사적 인물 가운데 유례를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특히 현대 이전에 콘스탄티누스가 기억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 18세기 이래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변변한 평전 하나 출간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 비판 혹은 이교주의(paganism)의 성향이 강했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는 그런 인식이 잘 드러난다.

15 18-19 세기의 역사가들이 이처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인물과 업적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은 그저 시대정신 탓만은 아니었다. 사료 여건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사료가 있었다. 하나는 동시대의 것으로 주로 기독교 측 사료였다 특히 팔레스타인의 도시 카이사레아의 주교였던 유세비우스의 『콘스탄티누스 전기』와 『교회사』,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맏아들의 수사학 교사였던 기독교 작가 락탄티우스가 쓴 『박해자들의 죽음』이 중요하다. 다른 종류는 후대의 이교 작가들의 것으로, 기록내용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4세기 말의 『황제사』와 5세기 말 조시무스가 쓴 『새 역사』가 대표적이다. 중요한 점은 이 두 종류 사료에서 아주 대조적인 경향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측 사료는 최초의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우상화하는 반면, 이교 측 사료는 대체로 황제의 어두운 성격과 비행을 부각시켰다.

18-19세기까지 수 세기 동안 발전해 온 '역사학적’ 방법(회의주의와 문헌비판)에 비추어, 형식과 내용에서 '성자전'의 전형으로 보이는 기독교 측 사료는 신뢰를 얻기 어려웠다. 특히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대한 불신이 심각했다. 기번은 역사가의 자질이 부족한 유세비우스가 황제에 대한 아침과 맹신 때문에 기독교도조차 믿지 않을 이야기를 썼다고 했다. 

16 이런 비판적 태도 때문에 18-19세기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전기를 쓰지 못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양이 많고 상세한 기독교 측 사료를 불신하고, 빈약한 이교 측 사료에 의존해서는 역사책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대신 유세비우스와 락탄티우스의 왜곡과 날조를 드러내는 사료비판이 연구의 대세를 이루었고, 그것은 20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벨기에의 비잔티움 역사가 앙리 그레과르의 연구는 '우상파괴'적이었다. 그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이나 '밀라노 칙령'으로 알려진 종교관용 칙령 등은 모두 허구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연구동향에 반전이 일어났다. '런던 파피루스 878번'으로 알려진 대영박물관 소장의 작은 파피루스 조각에 관한 짧은 연구노트는 일종의 변곡점 같은 것이었다. 그 파피루스 조각은 『전기』에 인용된 한 공문서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 그 연구보고의 핵심이었다. 그 결과 역사가로서 유세비우스에 대한 신뢰가 빠르게 회복되었고, 『전기』를 둘러싼 오랜 위작 논란도 자취를 감추었다 오히려 그 사료의 신빙성을 논증하는 연구들이 속출했다. 이윽고 전문가들이 쓴 콘스탄티누스 평전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1981년에 나온 티모시 반즈의 『콘스탄티누스와 유세비우스』는 20 세기 중반 이후의 새로운 경향을 대표하는 이정표로서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기초한 간결한 콘스탄티누스 전기와 유세비우스의 역사서술과 신학에 대한 해설을 곁들인 책이었다.

그러니까 서두에 소개한 21세기 초의 성대한 콘스탄티누스 기념제는 바로 이러한 반전 덕분에 비로소 가능했던 현상이었다. 최근에 속출한 수십 종의 콘스탄티누스 평전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간혹 책 제목에 쓰이기도 한 '혁명' 혹은 '전환' 같은 키워드로 잘 대변된다.

18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영적 '전환', 즉 기독교로의 회심(conversion)이 곧 로마제국의 기독교화, 아니 인류의 구원이라는 세계사적 '전환'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전환'의 역사인식을 떠받치는 결정적 근거는 바로 유세비우스와 락탄티우스의 기록들이다. 비록 세부묘사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은 공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부제국의 통일 전쟁(312년) 중에 극적 회심을 겪었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근현대의 연구동향을 좌표 삼아, 본서가 서 있는 지점과 서술방향을 이야기할 차례이다. 본서는 20세기 후반 이래 최근까지의 연구경향을 거스르는 입장을 취한다. 즉 콘스탄티누스의 전환이란 개념, 또 그것의 핵심근거인 유세비우스와 락탄티우스의 증언을 불신하고 비판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본서 저자의 역사관 때문이다. 저자는 현실정치 속의 한 인물을 특정 이념 혹은 신앙의 맹목적 수행자 혹은 순교자로 보는 시각에 매우 회의적이다. 그런 시각은 전근대의 통치자, 특히 로마황제들의 행태와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부르크하르트의 역사관이 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콘스탄티누스는 세계가 지속되는 한, 정력적인 야심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원칙에 따라 일관되게 행동했다. 매우 재능 있는 야심가들은 신비적인 힘 뿐 아니라, 행위와 숙명의 놀라운 연쇄에 이끌리게 된다. 정의감을 내세워 봐야 소용이 없으며,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수의 신(Nemesis)에게 소리쳐 기도해 봐야 별 수 없다. 위인이란 종종 무의식적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부터의 명령을 완수하며, 자신이 시대를 지배하고 그 성격을 규정한다고 믿지만, 실은 시대가 그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에 의하면,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넘어서 세계의 종교가 되는 인류사적 전환,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극적회심이 아니라, 시대정신, 그의 야심 혹은 현실정치적 계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둘째, 저자는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유세비우스와 락탄티우스의 기록이 종교, 정치적 관점에 의해 크게 왜곡되었다고 확신한다. 콘스탄티누스는 다른 통치자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의로운 자'로 묘사되며, 그의 불우한 출생이나 냉혹한 친족살해 등 우상화에 부적절한 사실들은 거의 무시된다. 그리스-로마의 역사책에 익숙한 연구자라면, 그들의 기록에서 불편한 느낌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본서는 그 기록들을 신뢰하기보다 의심하고, 나아가 분해하여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말하자면 『전기』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주해'이며, 그것을 통해 '역사적 콘스탄티누스'를 드러내는 시도이다. 이는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시도들이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을 다루는 태도 및 방식과 흡사하다. "사도행전의 서술은 바울이 사망한 후 20 여 년이 지난 다음에 쓰인 터라, 호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어 확실한 사실을 유추해 내는 데 무리가 따른다.

20 한편 고대 후기(Late Antiquity)의 종교사 영역의 연구에서 눈에 띄는 진전이 있었다. 특히 종교적 혼합주의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가 본서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 연구에 의하면, 서기 2-3세기 이래 영적 혹은 사상적 영역에서 일신론화의 흐름, 즉 다신교가 '단일신교' 혹은 '일신론적 다신교'로 변화하는 경향이 매우 거셌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유대교, 신플라톤주의,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서로 섞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차별화하려 한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인연이 깊었던 '불패의 태양신' 숭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혼합주의적 전제하에서, 예컨대 태양신 숭배의 기원, 예수(혹은 기독교)와 태양의 연관, 로마 황제의 권위 또는 신성(혹은 그것의 표상으로서 발광형 왕관)과 태양신의 연관 등에 대한 상세한 연구들이 속출했다.

이런 연구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앙이나 종교정책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이 유익함을 시사한다. 첫째, 이 숭배와 저 신앙이 서로 엄밀하게 구별되기보다 부분적으로 겹치거나 혼재된 상태여서 황제는 경우에 따라 이것에서 저것으로 비교적 쉽게 옮겨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따라서 황제가 취한 종교적 변화는 어느 순간의 '극적 전환'이 아니라, 긴 세월에 걸친 '점진적 변화'로 보아야 한다. 본서는 특히 3부와 4부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전환하는 과정을 가능한 한 치밀하게 묘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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