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하) ━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 전8권 - 10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홍대화 외 옮김/열린책들

제4부 제11권 작은 형 이반 표도로비치
554 그는 〈법률도, 양심도, 신앙도 모두 부정했었고〉, 무엇보다도 내세를 부정했었지. 그러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곧장 암흑과 죽음을 향해 나아갈 거라고 생각했다가 내세를 맞게 되었어. 그런데 한편으로 놀랍기도 하고 화가 치솟기도 한 그는 〈이건 내 신념과 배치된다〉고 말했다는 거야. 그 일로 해서 그는 재판을 받게 되었지······. 여보게, 용서해 주게, 난 다만 내가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 뿐이니까. 이건 단지 전설에 지나지 않아·····. 그에게는 1천조 킬로미터(지금 우리 세계에서는 미터법을 사용하고 있거든)의 암흑 속을 걸어서 통과하라는 판결이 내려졌고, 1 천조 킬로미터의 형벌이 끝나야만 천국의 문이 열리고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거였어·····.」
「그런데 당신들의 저 세상에는 1천조 킬로미터의 형벌 외에 또 어떤 것이 있지?」 이반은 이상할 정도로 생기를 띠며 끼어들었다.
「어떤 형벌들이 있느냐고? 묻지 마. 옛날에는 이런저런 형벌들이 있었지만, 요즘은 한층 더 도덕적인 것들이 시행되고 있거든 이를테면 〈양심의 가책〉같은 시시껄렁한 것들뿐이라고. 그 역시 자네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지, 〈자네들 관습의 완화〉 때문에 말이야. 그로 인해 이익을 얻은 사람이 누군가 하면, 그들은 바로 양심이 없는 사람들뿐이지. 왜냐하면 양심이라곤 전혀 없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거든 그 대신 양심과 명예심이 아직 남아있는 점잖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되었지······. 미처 기반도 닦이지 않은 곳에 타인의 제도를 도입해서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개혁도 해로울 뿐이야! 차라리 옛날의 화형 제도가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런데 1천조 킬로미터의 형벌을 받은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도중에 가로로 벌렁 누워서는, 〈나는 가고싶지 않아, 내 원칙 때문에 가지 않겠어!〉라고 말했다는 거야. 러시아의 교양 있는 무신론자들의 정신에 고래의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견뎌 낸 선지자 요나의 정신을 합하면 바로 도중에 길바닥에 누운 사상가의 성격과 같아지거든.」
「그 사람은 거기에 무엇을 깔고 누웠는데?」
「글쎄 무언가 깔고 누울 만한 것이 있었겠지. 우습지 않나?」
「대단한 사람이로군!」 이반은 여전히 묘한 활기를 띠며 이렇게 소리쳤다. 지금 그는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호기심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 그 사람은 지금도 누워 있나?」
「그렇지 않아. 그 사람은 거의 천 년 동안이나 누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거든.」
「바보로군!」 이반은 신경질적으로 깔깔거리며 소리쳤다. 그는 마치 깊은 생각에라도 잠긴듯한 모습이었다. 「영원히 누워있는 것이나 1천조킬로미터를 걷는 것이나 다를게 뭐 있어? 그럼 10억 년쯤 걸어야 하지 않겠어?」
「그보다 훨씬 더 걸리지. 연필과 종이가 없군, 그렇지 않으면 계산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목적지에 도착했어, 거기서 이야기는 시작되는거야.」
「어떻게 목적지에 도착한 거지! 어디서 10억 년을 가져온 거냐고?」
「자네는 현재의 우리 지구만을 생각하고 있군! 현재의 지구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얼어붙고 갈라지고 부서지고 구성 분자로 분해되고 허공의 물이 되고, 다시 혜성이 태양이 되고,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오는 일을 아마 10억번은 반복했을지 몰라. 바로 이런 발전은 어쩌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일수도 있지. 예전과 똑같은 형태, 똑같은 특성을 띤 채 말이야. 너무 지루한 이야기인가······.」
「아니야, 그런데 그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어떤 일이 생겼지?」 
「천국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어. 2초도 지나기 전에 — 그건 시계를 보고(내 생각에 그의 시계는 이미 오래전에 주머니에서 원소로 분해되어야 했겠지만 말이야) 하는 말인데 ━ 2 초도 지나기 전에, 그 2초를 위해서라면 1천조 킬로미터의 1천조 배 거기에 다시 1 천조 배를 곱한 만큼 걸어서 통과할 수 있다고 소리쳤어! 그는 〈호산나〉를 불러 댔고, 그것이 너무 지나쳐서 그곳에 있던 더욱 고상한 사상의 소유자들은 처음엔 그에게 악수조차 청하려 하지 않았어. 그가 너무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 변해 버렸다는 이유 때문이야. 이게 바로 러시아적 기질이지.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이건 전설이야. 들은 대로 전할 뿐이지. 우리 세계에서는 삼라만상 전설에 대한 그런 식의 개념이 통용되고 있는거야.」

559 「그런 셈이지. 하지만 망설임, 불안, 신앙과 불신 사이의 갈등 따위는 양심적인 사람에게는 때때로 너무 고통스러운 법이니, 자네 같은 사람은 목을 매고 죽는 편이 차라리 낫겠지. 난 자네가 눈곱만큼이나마 나를 믿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일화를 이야기함으로써 철저히 불신으로 몰고 갔던 거야. 나는 자네를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오가게 만들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내 목적이야. 내가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은 이렇지. 자네가 나를 철저히 믿지 않게 되었을 때, 자네는 내가 꿈이 아니라 실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그 눈빛으로도 벌써 믿기 시작한단 말이지, 난 자네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내 목적은 달성되는거야. 그러니 내 목적은 고상하잖아. 나는 자네의 마음속에 신앙의 작은 씨앗 하나를 뿌리겠어. 그것은 자라서 참나무가 되겠지. 그런데 그 참나무는 너무나 거대해서 자네가 그 참나무 위에 걸터앉으면 〈황야의 사도들과 순결한 여인들〉의 대열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생길 거야. 자네는 남몰래 그런 걸 간절히, 간절히 기원해 왔으니, 메뚜기를 잡아먹으면서 황야에서 구원의 길을 걸어가라고!」

567 오 아무것도 모르는 장님들 같으니! 만일 인류가 한 사람씩 하느님을 거부한다면(나는 그 시기가 지질학적 연대와 나란히 찾아오리라고 믿어), 식인 상태를 맞이하지 않더라도 과거의 모든 세계관, 특히 과거의 모든 도덕률은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이 나타나게 되는 거야. 사람들은 인생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생에서 얻기 위해서, 그러나 오직 현세에서의 행복과 기쁨을 얻기 위해서만 하나로 결합하게 되
지. 그러면 인간은 거대한 신적 자존심으로 위대해질 것이며, 인신(人神)이 등장하는거야. 인간은 시시각각 자신의 의지와 과학으로 무한히 자연을 정복하면서 그때마다 그로 인해 커다란 희열을 얻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천국의 희열에 대한 과거의 희망을 보상해 줄 수도 있겠지. 모든 사람들은 인간이 죽으면 다시 부활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하느님처럼 당당하고 조용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 거야. 그리고 인간은 자존심 때문에 인생이 한순간에 불과함을 불평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자신의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겠지. 그 사랑은 순간적인 인생에 만족하겠지만, 사랑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은 무한한 내세의 사랑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했던 과거 만큼이나 그 사랑의 불길을 더 활활 지펴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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