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슈메만: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 10점
알렉산더 슈메만 지음, 황윤하 옮김/비아

들어가며
1. 죽음이란 무엇인가
2. 최후의 원수
3. 죽음의 기원
4. 몸의 부활
5. 십자가 주간
6. 부활
7. 도마를 생각하며
8. 인간의 본성
9. 구원의 종교
10. 죽음으로 죽음을 짓밟기

부록: 유토피아와 도피 사이에서
알렉산더 슈메만에 관하여
알렉산더 슈메만 저서 목록

 


22 그리스도교의 중심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이 그 힘을 잃었다고 힘차게 선포합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짓밟는다!" 그리스도교는 수 세기 동안 이 전례 없는 선언,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승리의 선언으로 이 세계를 다스렸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교인이란 다른 무엇보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무덤에 있는 지들이 기뻐할 것이라"는 선언을, 죽음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입니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진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 몇몇 그리스도교인들은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그러나 승리에 찬 새로운 관점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점점 플라톤의 생각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삶과 죽음이 서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서로 대적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계'와 '다른 세계', 불멸한 죽은 이들의 영혼이 기뻐하며 살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를 대립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44 우리의 몸이 일시적이고 영구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생물학자들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는 7년을 주기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생리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7년마다 새로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에 무덤에 묻히거나 화장된 그 몸은 이전의 몸과 같은 몸은 아닙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몸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세계에 의존하는 형태이자 이 세계에서의 삶과 활동이 육화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나의 몸은 세계, 또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친교이며 상호 관계입니다. 인간의 몸,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예외 없이 이 관계를 위해, 친교를 위해, 관계 중에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친교의 최상위 형태인 사랑이 성육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몸은 그렇게 나 자신을 고립으로부터 꺼내 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몸은 영혼의 어둠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자유라고 말이지요. 몸은 사랑의 핵심, 친교의 핵심, 생명의 핵심, 모든 움직임의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영혼이 몸을 잃는다면,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면 영혼 역시 그 생명을 잃습니다. 영혼의 죽음이 완전한 소멸이 아닌 안식이나 잠과 같은 것이더라도 몸이 죽으면 영혼도 죽습니다. 실제로 죽음이라는 '수면'뿐 아니라 모든 수면은 유기체의 죽음과 유사합니다. 잠이란 '몸'이 지는 것이며, 그동안 몸은 활동을 멈추기 때문입니다. 이때 몸은 일종의 유예 상태, 비실재 상태로 들어갑니다. 자는 동안에는 '잠’이 있을 뿐 대부분의 생명 현상이 멈춥니다. 이를 받아들이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부활은 뼈와 근육이 소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뼈와 근육은 모두 물질세계에 속한 것이며, 결국 그 구성성분을 파고들면 원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인격적인 요소도, 영속적으로 '나'라고 할만한 요소도 없습니다.


45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몸의 부활은 친교로서 삶의 회복을 뜻합니다.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가운데 사랑을 추구함으로써, 그리고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그 모든 삶의 과정 중에 우리의 영적인 몸은 성숙해집니다. 즉 몸의 부활이란 물질이 영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영화靈化, spiritualization이 되는 것, 그러니까 마침내 세계가 '참된 몸’이 되는 것, 인류가 생명과 사랑으로 온전히 참 생명과 상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덤과 묘비를 숭배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우리 몸이 분해되어 다른 물질의 일부가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가 이야기하는 부활은 사랑으로 가득해진, 생명의 충만함과 완전함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의미입니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궁극적인 힘, 기쁨이 나옵니다.


106 죽음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전례는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여 교회에 안치된 시신 주변에 우리가 둘러섰을 때, 살아있는 이들의 세상에서 예를 갖춰 슬프지만 어쩔 수 없이 죽은 이를 떠나보내려 할 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 주일, 우리가 교회로 모여 "세상의 모든 염려를 뒤로하고" 하늘을 향할 때, 예배하는 매일, 특별히 부활의 기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가 하는 모든 것은 죽음의 성사입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언하고, 그의 부활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죽음-중심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교리가 아름다운 예식으로 꾸며진, 그리고 이를 믿어 어떤 "유익"을 얻고자 하는 "신비스러운 종교집단"이 아닙니다.


107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성을 넘어서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명의 생명이 되시기에 그분은 생명 그 자체이시고, 곧 나의 생명이 되신다는, 우리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요한 1: 4)

그리스도교의 모든 교리, 성육신, 구원, 속죄와 같은 교리는 우리 신앙의 설명이자 결과이지 신앙의 "근거"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타당한", "일관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그리스도에 관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참 생명이시며 생명의 빛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서는 말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