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 C. 앨리슨: 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

 

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 - 10점
데일 C. 앨리슨 지음, 김선용 옮김/비아

서문
간략한 개관

1. 신학적 유용성의 문제
2. 논쟁적 문제들
3. 어떻게 연구를 진행할 것인가
4. 곤란한 결론들
5. 개인적 단상들

 


38 역사적 예수를 다루기 위해서는 특정 학자가 그린 역사적 예수, 라이트의 예수, 크로산의 예수, 샌더스의 예수를 다룰 수밖에 없다. 학자들이 저술을 통해, 학회에서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부분을 두고 논쟁하기에 '신약학계가 제시한 예수', 혹은 '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예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세미나가 문제였던 이유는 그들이 내린 결론 때문이 아니다(이 분야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주장을 이미 접했다). 예수 세미나의 진짜문제는 자신들의 결론을 마치 학계 전체가 합의한 내용인 양 대중에게 선전했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예수 세미나에서 어떤 구절이 '예수가 실제로 한 말'인지를 두고 투표한 결과는 학계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 그저 한 학파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어 떤 개인도, 단체도 학계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 게다가 예수 세미나 역시 최신 유행은 아니다.


101 역사에 관한 질문도 마찬가지다. 역사에 관한 질문은 관찰자에 의존하며 관찰자에게 있는 형이상학적, 역사적 가정을 반영한다. 네 복음서 저자들이 무엇을 믿었는지를 판별하는 문제는 우리가 그들처럼 믿을 수 있는지 혹은 믿어야 하는지라는 문제와 반드시 연결되지는 않는다. 후자의 경우 추가적인 고려 사항이 있다. 개인의 역사에 대한 식견, (기적 이야기의 경우처럼) 철학적 성향,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열번째 재앙을 두고 고민했듯) 도덕적 감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얼마나 역사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개인의 가정, 세계관, 신학에 따라 다르다고 말이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뻔한 답이지만, 세 가지 사항을 덧붙인다면 이 답이 꼭 무미건조한 답이라 할 수는 없다. 첫째, 특정 이념 집단이나 전통에서 자란 사람이 그 이념과 전통에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듯 한 사람의 신학, 세계관, 가정이 평생 고정될 필요는 없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기존의 생각을 바꾸는 법을 익힐 수 있다. 삶의 굉장히 중요한 사안과 관련해서도 말이다. 정직한 자기반성은 인식을 바꿀 수 있다.


136 오랫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하고 나서 나는 복음서 자료 대부분이 실제 일어났는지 아닌지 판별하기 어려우며, 자료가 얼마나 역사에 가까운지 정확히 가늠하기조차 어렵다는 결론에 마지못해 이르렀다. 예수가 어떤 말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이 실제 일어났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예수의 실제 말과 행동에서 유래했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한 본문 과 교회에서 유래했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한 자료들의 모음은 전통이 예수의 말과 행동으로 간주한 자료들의 모음과 결코 동일하지 않다. 


160 어떤 관점에서는 내 결론이 보수적으로 보일테고, 어떤 관점에서는 보수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특정 어록이나 이야기가 실제 예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 논증해 보일 수 있다는 주장에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척하는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복음서들은 비유다.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가 실제로 한 말인지 실제로 한 행동인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예수는 이런 식으로 행동했고, 이런 식으로 말했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195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료들은 초기 그리스도론 논쟁을 촉발했다. 그 논쟁들을 살펴보면 위에서 이야기한 논리 전개가 빠짐없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유대-그리스도교인 에비온파는 예수를 하느님이 아닌 인간으로 보았고 이 관점에 맞지 않는 전통을 거부했다(B가 아니라 A라는 논리). 이른바 '권능 중심의 단일신론자'들은 예수가 세례받았을 때, 혹은 부활했을 때 인간 예수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임해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어 하느님이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상충하는 전승을 조화시켰다 (A가 B가 되었다는 논리).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과 혼soul을 가졌지만, 인간의 영spirit은 가지지 않았으며, 대신 이성적인 신적 로고스를 지녔다고 주장했다(부분적으로는 A, 부분적으로는 B라는 논리). 아리우스파는 하느님의 아들이 최초의 피조물로서 하느님 아버지와 인류 사이의 일종의 중간적 존재라고 주장했다(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라는 논리). 마지막으로, 이른바 정통파는 역설적 견해, 즉 예수는 전적으로 인간이며 전적으로 하느님이라는 주장을 옹호했다(A와 B 둘 다라는 논리). 좋든 싫든, 이 중 마지막 해결책인 정통주의 입장이 그리스도교 신학사를 지배해왔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이라면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특정 신약 본문들에 대한 정통주의 옹호지들의 해석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의 신성이 예수의 인성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예수를 사실상 역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들었다. 예수는 가상의 실재가 되었으며 그의 인성은 느낄 수 있는 사실이 아니라 단지 믿어야 할 교리로만 남게 되었다.


226 본래 공관복음은 예수의 실제 말과 행동의 기록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인상impression의 모음집이다. 공관복음은 주로 예수가 말하고 행했을 것 같은 특징과 성격을 지닌 말과 행동을 보도한다. 특히 종말론에 관련해, 위에 열거한 목록의 본문의 상당수가 예수의 특징을 제법 포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전승은 허술한 기억과 허구적으로 덧붙인 내용으로 가득찬 것이기에 역사적 예수 탐구는 헛된 열망으로 남을 것이다. 그럴 경우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새로운 오락거리를 찾아야 한다.


227 두개의 대안 중 나처럼 전자를 선택하는 것은 예수가 종말에 대한 기대를 확고히 갖고 있었고 종말에 대해 자주 말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같은 시대와 장소에 살았던 많은 사람처럼 예수는 고통과 박해 후에 커다란 심판이 도래하고 그 후에 초자연적 인 유토피아, 죽은 자들이 되살아나 거주하는 하느님 나라, 즉 영원히 악이 제거되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밤이 지났고 낮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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