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 전8권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홍대화 외 옮김/열린책들 |
제2부 제5권 찬반론
516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결심했지, 얘야, 내가 만일 그것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신을 이해하겠는가 하고 말이야. 겸허하게 고백하던데 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어떤 능력도 없어, 내 지성은 유클리드적인 지상의 것인데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을 해결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래서 네게 충고해 두는 바이지만, 내 친구 알료샤야, 이런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신에 대한문제, 다시 말해서 신은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더욱더 그렇고. 그런 문제들은 3차원의 개념만으로 창조된 지성으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는거야. 그래서 나는 기꺼이 신을 인정할 뿐 아니라 게다가 우리가 도저히 간파할 수 없는 신의 지혜와 목적까지도 인정하며, 인생의 질서와 의미를 믿고 또 우리를 하나로 합치게 할 듯한 영원한 조화를 믿기도 하며, 전 우주가 지향하고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또 그 자체가 신이기도 한 그 말씀 등등을 믿으며 종국에 가서는 무한성을 믿는 거지. 그것에 관해서는 많은 말이 만들어져 있잖니. 그렇다면 나도 좋은 길을 걷고있는것 같은데, 어때?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의 이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래, 아예 용납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렴. 난 신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게 아니야, 이 점을 알아둬, 난 그가 창조한 세계를, 신의 그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야.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어. 단서를 달아두자면, 그 고통은 점차 아물어 사라지며 인간적 모순의 온갖 모욕적 희극도 애처로운 신기루처럼, 무력하고 볼품없는 인간의 추악한 허구처럼, 인간의, 유클리드적 지성의 원자처럼 사라지게 되고, 결국 세계의 종말에 가서는, 영원한 조화의 시점에 가서는, 너무도 고귀한 현상이 나타나서 그것이 모든 사람의 가슴에 넘쳐 모든 분노를 해소시키고, 사람들의 모든 악행과 서로 흘렸던 모든 피에 대해 보상하며, 사람들한테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정당화할 수도 있으리라는 걸 나는 확신해 그런 일이,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며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아! 두개의 평행선이 한곳에서 만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할지라도, 두평행선이 만난 것을 목격하여 내 입으로 만났다고 말하게 될지라도 어쨌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바로 이것이 나의 본질이란다, 알료샤, 바로 이것이 나의 명제란 말이야. 난 이 얘기를 너에게 아주 진지하게 털어놓는거야. 나는 고의로 우리의 대화를 더할나위 없이 어리석은 보잘것없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나의 고백에까지 이른 것은 너에게는 오직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너한테 필요한 것은 신의 문제가 아니라 너의 사랑하는 형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지. 그래서 하는 이야기란다.
536 내겐 응보가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난 자멸하게 될 테니. 응보는 무한 속의 언제 어디선가가 아니라, 내가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 땅 위에 필요한 거야. 나는 그렇게 믿고 있고 또 보고 싶지만, 그 시간에 내가 죽고 없다면 나를 소생시켜 주어야 할 거야. 만일 내가 없는 가운데 그것이 일어난다면 너무나 모욕적이기 때문이지. 나 자신의 악행과 고통을 통해 누군가에게 미래의 조화를 안겨 주기 위해서 내가 고통을 겪었던 것은 아니니까. 난 사슴이 사자 곁에 누워 있고 피살된 자가 벌떡 일어나서 자신을 살해한자와 포옹하는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싶어. 사람들 모두가 그때 그 일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갑자기 알게 되는 순간에 함께 있고 싶은 거라고. 지상의 모든 종교는 그런 희망을 근거로 세워져 있는 것이고 나도 신앙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럴 경우 어린애들은, 그 애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것이 내가 풀지 못하는 문제야. 백 번이고 되풀이하지만, 많은 문제 중에서 아이들의 예를 택했던 것은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거기에 분명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지. 내 말을 들어 봐. 고통으로 영원한 조화를 사기 위해 모두가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아이들이 어째서 거기에 있어야 하는 거지? 어디 한번 말해 봐? 어째서 그 애들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어째서 그 애들의 고통으로 조화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냐고? 어째서 그 애들이 밑거름이 되어서 누군가를 위한 미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말이야? 인간들의 죄악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성을 이해해. 응보의 연대성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죄악과 아무 연관도 없어. 만일 진실로 그 애들이 자기 조상들의 악행과 연결되어 있다면, 물론 그런 진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니 난 이해할 수 없어. 어떤 익살꾼은 아이들도 자라나면 죄를 지을 테니 마찬가지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여덟 살짜리 소년은 미처 다자라지도 않았는데 개들한테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잖아. 오, 알료샤, 난 신을 모독하려는것이 아니야!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자들과 이전에 살았던 자들이 천상과 지상 위에서 일제히 찬양의 목소리를 높여 〈주여, 당신이 옳았나이다. 이는 당신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라고 할 때 우주가 얼마나 진동할 것인지 난 알고 있어. 그리고 그 어머니가 사냥개에게 자기 아들을 물려 죽게 한 가해자를 부둥켜안고 세 사람이 함께 눈물을 홀리며 〈주여, 당신이 옳았나이다!〉라고 절규할 때 이미 인식의 승리가 도래하고 모든 것이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고. 그러나 바로 여기에 장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난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단 말이야. 내가 지상에 머무는 동안에 난 서둘러 나만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알료샤, 어쩌면 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순간까지 살아남거나 아니면 다시 소생 해서 자기 자식을 살해한 가해자를 포옹하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모든 사람과 함께 〈주여, 당신이 옳았나이다!〉하고 소리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때도 난 그렇게 외치고 싶지 않단말이야. 시간이 있는 동안 나는 서둘러 나 자신을 지키겠어. 그리고 고상한 조화 따위는 완전히 포기하고 말겠어. 그런 것 따위는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구린내 나는 화장실에서 보상받지 못할 눈물을 홀리며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린 그 고통받는 어린애의 눈물 단지 그것 하나만의 가치도 없는 것 아니겠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왜냐하면 그 애의 눈물은 보상받지 못한 채 버려졌기 때문이야. 그 애의 눈물은 보상받아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조화란 불가능할 테니. 하지만 너라면 무엇으로, 무엇으로 그걸 보상할 수 있겠니? 그게 정말 가능할까? 그 눈물에 대한 복수가 될 수 있을까? 내겐 그 눈물에 대한 복수도, 가해자의 지옥도 아무 의미가 없어. 그들이 고통을 겪은 후에 지옥이 무엇을 바꿀 수 있겠니? 그리고 지옥이 있다면 조화란 있을 수 없는거야. 난 용서하고 싶고 포옹하고 싶어.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원치 않아. 그리고 만일 어린애들의 고통으로 진리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고통의 모든 금액을 보충해야 한다면, 나는 미리 단언해 두는바이지만, 진리 전체도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거야. 그리고 그 어머니가 사냥개들을 풀어 자기 아들을 물려 죽게 한 그 가해자를 포옹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그 어머니도 그자를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 만일 용서하고 싶으면 자기 몫만 용서하면 되고, 어머니로서의 끝없는 고통에 대해서만 가해자를 용서하면 되는거야. 그러나 그녀는 갈기갈기 찢겨 죽은 아이의 고통에 대해서는 압제자를 용서할 권리도 없고, 감히 용서할 수도 없는거야. 그 애 스스로가 그 자를 용서한다고 치더라도 말이야!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만일 그들이 용서할 수 없다면 조화란 어느 곳에 있을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존재하는 걸까? 나는 조화를 원치 않아, 인류에 대한 사랑때문에 원치 않는 단 말이야. 난 차라리 보상받지 못한 고통과 함께 남고 싶어. 〈비록 내 생각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보상받지 못한 고통과 해소되지 못한 분노를 품은 채 남을거야. 게다가 조화의 값이 너무 비싸서 내 주머니로는 입장료를 도저히 지불할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서둘러 입장권을 되돌려보내 주는 거야. 만일 내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가능하면 빨리 그걸 돌려보내야 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야, 알료샤. 난 그저 입장권을 정중히 돌려보내는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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