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성
- 책 밑줄긋기/책 2023-24
- 2023. 12. 11.
성 -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창비 |
1장 도착
2장 바르나바스
3장 프리다
4장 여주인과의 첫 대화
5장 촌장의 집에서
6장 여주인과의 두번째 대화
7장 학교 선생
8장 클람을 기다리다
9장 심문에 대한 저항
10장 길거리에서
11장 학교에서
12장 조수들
13장 한스
14장 프리다의 비난
15장 아말리아의 집에서
16장
17장 아말리아의 비밀
18장 아말리아의 벌
19장 탄원
20장 올가의 계획
21장
22장
23장
24장
25장
작품해설 / “낯선 타향”- 혼돈과 미망의 불가해한 세계 경험
작가연보
발간사
1장 도착
7 K가도착한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성이 있는 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와 어둠이 산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곳에 큰 성이 있음을 암시하는 아주 희미한 불빛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국도에서 마을로 이어진 나무다리 위에 서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밤을 보낼 숙소를 찾아 나섰다. 여관에는 사람들이 아직 깨어 있었다. 손님을 받을 빈방이 더는 없었지만, 여관 주인은 밤늦게 찾아온 손님에 적잖이 놀라고 당황한 터라 K 에게 식당에 짚을 넣은 매트리스를 놓고 재워주겠다고 했다. K는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식당에는 아직 농부 몇몇이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으나, K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다락방에서 매트리스를 직접 꺼내 와서 난로 가까이에 깔고는 몸을 눕혔다. 식당 안은 훈훈했고, 농부들은 조용했다. 그는 지친 눈길로 그들을 잠시 살펴보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도회지풍 옷을 입고 실눈에 눈썹이 짙은 배우 같은 얼굴의 젊은이 하나가 여관 주인과 함께 곁에 서 있었다. 농부들도 아직 그곳에 남아 있었는데, 일부는 그 광경을 더 잘 보고 듣기 위해 의자를 돌려 앉았다. 젊은 이는 K를 깨운 것에 대해 매우 정중하게 사과하고는, 자신을 성 관리인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면서 용건을 말했다. "이 마을은 성의 영지입니다. 따라서 여기 거주하거나 숙박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성에 살거나 숙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백작님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거죠. 그런데 당신은 그런 허가증이 없거나 적어도 그것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K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머리를 단정하게 매만지고 나서, 두사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길을 잃은 모양인데 여기가 무슨 마을인가요? 이곳에 성이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젊은이는 천천히 말했고,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K의 무지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베스트베스트 백작님의 성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숙박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K는 조금 전에 들었던 상대방의 말이 행여 꿈속에서 들은 것이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물었다.
"그럼요, 허가가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팔을 쭉 뻗으면서 여관 주인과 손님들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는데, K를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면 허가를 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나도 가서 허가를 받아와야겠군요." K는 하품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이불을 걷어 젖혔다.
"그래, 도대체 누구한테서 받는다는 거죠?" 젊은이가 물었다. "백작님한테서 받아야겠죠" K 가 말했다. "다른 방도가 없는 것 같군요."
"이 한밤중에 백작님의 허가를 받아오겠다고?" 젊은이는 이렇게 소리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된다는 거요?" K는 태연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깨운거요?"
이에 젊은이는 화가 치밀어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아주 부랑자 짓을 하는군!" 그가 소리쳤다. "백작님의 관청에 존경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바요! 내가 당신을 깨운 것은 당장 백작님의 영지를 떠나야함을 통고하기위해서요."
"정말 웃기는군." K는 유난하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다시 자리에 누워 이불을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젊은이, 도가 좀 지나치군요. 당신 행동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따질 거요. 혹시 내게 증인이 필요하다면 주인장과 여기 있는 분들이 증인이 될 거요. 그런데 말이 나온 김에 사실을 말하면 나는 백작님의 초빙을 받은 토지 측량사요. 내 조수들은 필요한 도구를 마차에 싣고 내일 도착할 거요. 나야 눈 속을 헤치고 걸어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몇차례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이렇게 늦은 시각에 도착한거요. 나의 도착을 성에 알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라는 건 당신이 가르쳐주기 전에 나 스스로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여기 이런 곳에 투숙하는 걸로 만족한 것인데, 당신은—좋게 말해—그마저 방해하는 무례함을 보인 거요. 내 설명은 이게 다요. 안녕히 주무세요, 여러분." K는 이렇게 말하고 난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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