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런 코플런드: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
- 책 밑줄긋기/책 2023-24
- 2023. 12. 11.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 - 에런 코플런드 지음, 이석호 옮김/포노(PHONO) |
에런 코플런드, 미국 음악의 목소리 _ 레너드 슬래트킨
서문 _ 앨런 리치
도입 _ 윌리엄 슈먼
1939년 초판 저자 서문
1957년판에 부친 저자의 글
감사의 글
1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2 음악을 듣는 방식
3 음악의 창조 과정
4 음악의 4대 요소 - I. 리듬
5 음악의 4대 요소 - II. 선율
6 음악의 4대 요소 - III. 화성
7 음악의 4대 요소 - IV. 음색
8 음악의 텍스처
9 음악의 구조
10 기본 형식 - I. 구획적 형식
11 기본 형식 - II. 변주곡 형식
12 기본 형식 - III. 푸가 형식
13 기본 형식 - IV. 소나타 형식
14 기본 형식 - V. 자유 형식
15 오페라와 음악극
16 현대음악
17 영화음악
18 작곡가에게서 연주자로, 연주자에게서 감상자로
에필로그, ‘그 이후의 이야기’ _ 앨런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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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작곡가에게서 연주자로, 연주자에게서 감상자로
지금까지는 음악을 추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야기를 풀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실용적, 실제적 관점으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거의 모든 음악적 상황은 세 가지 개별 요소를 포함합니다. 작곡가, 연주자, 감상자가 그것입니다. 이들은 마치 삼두 정치 체제처럼 하나로 모일 때만이 비로소 완전한 독립체를 형성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체제인 것입니다. 음악은 작곡가에서부터 비롯되어, 연주자라는 중간 매개를 거쳐, 바로 여러분, 즉 감상자에게서 마침내 완성됩니다. 결국 음악에서는 모든 방향타가 감상자를 향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총명한 감상을 위해서는 듣는 이가 본인의 역할은 물론이요 작곡가와 연주자의 역할까지 이해하고, 음악이라는 경험의 총체에 각각의 축이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우선 작곡가 이야기부터 해봅시다. 어쨌든 우리 문명에서 음악은 작곡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 순서로서 적당하다고 봅니다. 이런 질문부터 해봅시다. 우리가 어느 작곡가의 음악을 듣는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일까요? 작곡가는 소설가처럼 이야기를 들려줄 의무감을 느끼는 존재가 아닙니다. 조각가처럼 자연을 '베껴낼' 필요도 없습니다. 음악가가 쓴 작품은 건축가의 도면처럼 실제적 기능을 지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작곡가가 우리에게 주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제게는 오로지 하나의 대답만이 가능해 보일 뿐입니다. 작곡가가 주는 건 바로 그 자신입니다. 물론 모든 예술가가 빛어낸 작품은 그 자신의 표현일테지요. 하지만 음악의 경우는 작품과 창조자 사이의 관계가 한층 직접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곡가는 외부 ‘사간에 기대지 않고 본인의 본질적인 부분—한 명의 인간으로서 가진, 그리고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경험을 담은 가장 완전하고 깊은 표현―을 떼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
작곡가의 작품에 적용된 음악 양식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듣는 이의 입장에서도 이렇듯 중요하다면 연주자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음악의 거간꾼 노릇을 하는 것이 곧 해석자요 연주자입니다. 감상자가 듣는 것은 작곡가 본인이라가보다는 해석자가 이해한 대로의 작곡가라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이 점이 음악이 문학이나 시각예술과 구별되는 대목입니다. 작가는 글을 통해 독자와 직접 만납니다. 화가의 그림은 어디 잘 보이도록 걸어만 놓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음악은 연극과 마찬가지로 해석, 재해석의 과정 없이는 생존을 담보 받을 수 없는 예술 형태입니다. 작곡가는 공들여 완성한 곡을 연주자들의 손에 맡기고 나면 그때부터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는 것밖에 달리 수가 없는 가련한 존재인 것이지요. 연주자 역시 나름의 음악적 본성과 개성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일반 청자는 우선 작곡가의 의도를 감별해내고 동시에 연주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그 의도를 재현하고 있는지를 판단해낸 다음에야 비로소 해석의 품질을 따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해석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작곡가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가 해석자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지요. 작곡가가 남긴 '메시지'를 이해하고 재창조하는 존재가 바로 연주자이고 해석자입니다. 이론상으로는 어려울 게 없습니다. 하지만 말로 하면 이렇게 간단한 절차를 실제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해명이 필요해집니다.
오늘날 활약하는 일급 연주자의 대부분은 그들이 맞닥뜨린 기교적 숙제를 풀고도 남을 정도로 솜씨가 출중합니다. 그러니까 연주자의 특출한 기량은 으레 따라오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듣는 이가 거기까지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해석에 있어서 첫 번째 문제는 음표 그 자체에서 비롯됩니다. 오늘날 쓰이는 기보법은 작곡가의 생각을 정확히 옮기기에는 한계가 많습니다. 너무도 모호한 영역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주자의 취향이나 선호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재량의 범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애초에 엄밀한 정확성은 한갓 환상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해석자는 인쇄된 악보를 어느 정도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와 평생을 씨름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작곡가도 사람일 뿐입니다. 실수로 잘못된 음표를 적어 넣기도 하고, 누락된 음표가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템포나 셈여림에 관한 의견이 바뀌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연주자는 인쇄된 악보를 수동적으로 맹종하기보다 각자의 음악적 지성을 발휘하여 정보를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한쪽의 극단으로 쏠리는 건 경계해야 합니다. 너무 음표에만 매달려서도 안될 일이요, 음표의 정확성은 안중에도 없는 무절제한 방종도 곤란합니다. 음악을 좀 더 정확하게 기록하는 방식이 고안된다면 어느 정도 문제가 개선될 수야 있겠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손 치더라도 음악은 여전히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지닌 예술로 남을 것입니다.
[···]
연주자와 그가 재창조하는 작품 사이의 관계는 아주 섬세하고도 미묘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주자가 필요 이상의 수준까지 참견을 하면 아무래도 오해가 일어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해석'이라는 용어에 마치 부정적인 의미가 담기기라도 한 것마냥 흘겨보는 분위기가 생기기까지 했지요. 유아독존의 콧대만 높이는 '프리마 돈나' 연주자들이 범하는 과장과 곡해에 몹시 심기가 불편해진 일부 작곡가들이 슬슬 언성을 높이고 있는 겁니다. 그 대열의 선두에 선 스트라빈스키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일갈하기도 했지요. "소위 해석이라는 것, 우리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쓰인 음표만 있는 그대로 연주해달라. 아무것도 더하지 말고 아무것도 덜어내지 말라." 이와 같은 훈계가 나온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왠지 옹고집 작곡가들의 비현실적 태도를 나타내는 것 같아 마음이 썩 편치만은 않습니다. 무릇 그 어떤 곡, 아니 단 하나의 소절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가진 뭔가를 던져 넣지 않은 채로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악보만 따르는 연주를 원한다면 로봇을 불러다 시킬 일이겠지요. 연주에는 해석하는 자의 독자성이 가미되게 마련입니다. 물론 그 독자성은 작곡가의 의도를 왜곡하지 않는 선에 서 적절히 통제되면서 발휘되어야 하겠지요. 말하자면 자기만의 '억양'을 섞어 책을 읽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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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언하자면, 독자 여러분이 듣고 있는 연주에서 연주자가 맡고 있는 역할을 인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선 해당 작곡가의 이상적인 해석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다소간 개념이 서 있어야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연주자가 자신의 개성 범위 내에서 얼마나 그 이상적인 스타일에 다가가는지 감지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물론 실천은 무척 까다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이 아무리 미천하다고 하더라도 목적을 세우고 그 지향점을 흉중에 품는 것이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해가 될 일은 없을테지요. 지금쯤이면 음악이 창조되어 전달되는 과정에서 일반 감상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납득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작곡가와 해석자가 암만 힘을 합쳐서 음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아도 똑똑한 감상자를 만나지 못하면 별 의미가 없을 테니 말이지요.
[···]
감상자로서 여러분 각자가 가진 책임을 무겁게 여기십시오. 음악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건 일반 사람이건 우리 모두 음악 예 술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영원히 노력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계신 당신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일개 음악 감상자일 뿐인데, 하고 스스로를 업신여길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감상자들의 집합된 반응이 곧 작곡 예술과 연주 예술 모두에 심원한 영향을 미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음악의 미래가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은 겁니다.
감상자들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만이 음악 역시도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중해서 듣고, 의식적으로 듣고, 우리 지성을 모두 동원해 들읍시다. 그리하여 인류가 남긴 영광된 유산인 음악 예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데 기여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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