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D. 앨틱: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12. 22.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 - 리처드 D. 앨틱 지음, 이미애 옮김/아카넷 |
옮긴이 서문
머리말
제1장 최장기간의 치세 (1837~1901)
제2장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 배우들과 관객
제3장 시대정신: 시간과 공간 그리고 변화
제4장 공리주의 정신
제5장 복음주의적 성향
제6장 종교운동과 위기
제7장 민주주의와 산업 그리고 문화
제8장 예술의 성격과 사회에서의 위치
제9장 평판의 추이
연대기
권장 도서
옮긴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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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최장기간의 치세 (1837~1901)
21 1901년 2월 2일에 윈저 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 행렬을 보려고 상장이 늘어진 런던 거리에 줄지어 서 있던 남녀노소의 군중들 가운데 빅토리아 여왕이 아닌 다른 군주가 영국의 왕좌를 차지했던 날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군중들 대다수는 오로지 빅토리아 여왕의 신민이었다. 역사적으로 순수한 의미에서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었다.
존 골즈워디의 『포사이트가(家) 이야기』에서 여왕의 서거를 묘사한 장(章)에는 "한 시대의 경과"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실로 그것은 한 시대였다. 하지만 63년이 넘는 그 긴세월을 하나로 묶은 것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을 통치한 군주 한 명의 존재일 뿐이었다. 사실상 빅토리아 시대는 하나의 시대가 아니라 여러 시대였다. 그 시대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해석해보면,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한 중기의 "시대정신"은 초기의 시대정신과 확연히 달랐고 후기의 시대정신과도 두드러진 차이가 있었다. 이제 백 년의 시차를 두고 빅토리아 시대를 돌이켜볼 때, 그 시대의 양쪽 극단은 분위기가 대단히 상이한 시기들과 혼합되어 있었고, 그 극단의 한쪽은 회고적으로, 다른 쪽은 선행적으로 그 초기와 후기가 각각의 독특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1837년 6월에 열여덟의 나이로 여왕에 즉위했고, 분명 그 해는 그 여왕의 이름을 달고 있는 시대의 출발점으로 기록하기에 편리한 연도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영국의 정치사에서 획기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던 제1차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된 18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빅토리아 시대를 잡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떻게 보더라도 1830년대는 전환기였으므로 어느 연도를 선택하는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학사에서 이 시기는 때로 공백 기간으로 불리는데, 낭만주의의 에너지가 분출된 후 "빅토리아 시대"라고 식별할 수 있는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면서 곧 등장할 신선한 활기를 기다리던 휴지기였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빅토리아 시대의 초기는 낭만주의 시대를 직접 이어가는 연속선상에서 낭만주의의 몇 가지 속성을 흡수하고 동시에 다른 속성을 거부하거나 반발하면서 역사에 쉽게 자리매김했고 그렇게 묘사되었다.
워즈워스는 연로하면서 천재적인 재능을 상실했지만 아직 호수 지방에 거주하며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명성은 접점 더 많은 대중에게 퍼져 나갔다. 초반에는 부진했지만 그 이후 그는 대문호가 되었고, 그의 입지는 1830~1840년대의 종교적 풍조로 인해서 더욱 확고해졌다. 그 시기에 그의 새로운 시풍에 영국 국교주의가 명백히 드러나면서 그는 교회 성직자들의 호감을 얻었고, 그의 자연종교는 어떤 신앙을 가진 독자에게도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낭만주의의 주요 시인들 가운데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워즈워스였다. 존 스튜어트 밀, 존 러스킨, 매슈 아널드, 조지 엘리엇 같은 다양한 인물들이 모두 그의 자연시에 매료되었다.
워즈워스의 친구인 콜리지는 1834년에 사망했다. 콜리지의 시적 영감은 여러 해 전에 쇠퇴했지만, 그는 자기를 보살펴준 의사의 런던 교외 저택으로 자신을 찾아온 숭배자들에게 형이상학에 관한 강의를 끊임없이 모호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영감의 쇠퇴를 일면 보상할 수 있었다. 콜리지는 명민한 독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성을 누렸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명성은 더욱 커졌다. 그렇지만 그가 빅토리아인들에게 물려준 유산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련의 종교적 · 사회적 관념들이었고,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여러 차례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더 젊은 세대의 낭만주의 시인들 가운데서 다른 이들의 명성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빛나는 명성을 생전에 누렸던 바이런은 1824년에 사망한 후에도 살아 있는 그의 친구들이 그의 전기 저술과 관련된 문제로 신랄한 언쟁을 벌였기 때문에 10여 년간 계속해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여러 해 동안 그의 시가 누렸던 인기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영웅적 상황(그는 터키에 대항하는 그리스의 독립 전쟁을 지원하려고 준비하던 중 그리스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에서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1830년대에 그의 명성에 대한 반발이 일었고, 그것은 토머스 칼라일이 바이런에 대해서 찬탄하다가 비판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빅토리아 시대에 바이런의 유명세가 사양길에 접어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개혁이 조금이라도 필요하다면 신중하고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개혁을 옹호한 중산층이 지배하던 국민정신에 바이런의 혁명적 열정은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바이런은 매슈 아널드가 후에 "그의 피투성이 가슴의 역사적 장관"이라고 부른 것에 몰입했고 노골적인 고백을 선호하는 성향이 있었으며 지나친 수사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차분한 문학적 취항에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그 시대의 취향은 이미 워즈워스 쪽으로 기울었고, 감식력이 있는 사람들은 앨프레드 테니슨이 1842년에 『시』를 발표한 후 그에게로 선회했다. 또한 안이한 성적 태도와 방탕한 냉소주의 대신 정직과 순결, 진지함을 중요시한 도덕적 분위기에서 바이런의 성격과 인생은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문학사에서 이따금 일어나듯이, 다수의 사람들이 바이런의 시를 모방하고 수상쩍은 증언들로 바이런의 평판에 먹칠을 하면서, 원전에 대한 희구는 얼마간 사라지고 말았다. 기숙학교에 다니던 여학생들은 잠자야 할 시간에 바이런의 보다 관능적인 시들을 남몰래 계속 읽었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충실한 추종자들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런 추종자들 때문에 그의 평판은 1850년대에 최저점에 이르렀다.
셸리는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와 과시적으로 주장한 무신론때문에 대체로 혐오스러운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의 시가 표현한 "유해한" 신념을 예술로서의 그의 시와 분리하여 비평할 수 있었던 비평가는 그의 생전과 1822년의 사망 이후 10여 년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소수에 불과했다. "그 셸리란 작자는," 칼라일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불한당이었소. 교수형에 처했어야 마땅한 인물이었소." 칼라일과 마찬가지로 예리한 문학비평가가 아니었고 칼라일 못지않게 빅토리아 시대의 많은 편견을 충실히 반영했던 찰스 킹슬리 목사는 동일한 논조로 "그 부드럽고 민감한 채식주의자의 외설"을 비난했다. 느지막이 1880년대에 셸리의 며느리가 그의 공적 이미지를 세척하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대부분 바쳤다. 사적인 오명과 시적 재능을 구별할 수 있었던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셸리의 명성은 꾸준히 높아졌다. 바이런의 사망 소식이 외진 링컨셔에 전해졌을 때 "바이런이 죽었다"고 바위에 새겨 넣은 열다섯 살의 테니슨은 시를 사랑하는사춘기 소년으로서 특히 예리한 감성으로 그 사망 소식을 받아들였겠지만 그것은 온 국민의 슬픔을 반영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신의 첫 번째 시 「폴라인」(1833)에서 열광적으로 "태양을 짓밟은 자"라고 셸리를 불렀던 스물한 살의 로버트 브라우닝은 결국 빅토리아 시대의 취향을 선도하게 될 시인의 지위에 스스로 올라설 것이었다.
하지만 바이런과 셸리 두 사람을 우상처럼 숭배한 집단이 있었다. 바로 급진적인 노동자들이었고, 이들의 열광은 그 발단에 있어서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이념적인 바탕에 근거하고 있었다. 바이런이 정치제도를 공격한 『돈 주앙』과 『심판의 비전』 및 그밖의 다른 작품들이나, 정부의 박해 때문에 비밀리에 유통되는 판본으로만 구할 수 있었던 셸리의 『매브 여왕』은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런 맥락에서 이런 용어를 쓸 수 있다면) 진실한 성서로 여겨졌고, 두 시인의 정조는 1820년대에서 1840년대의 대중적 급진주의를 불붙이는데 기여했다.
위대한 낭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던 키츠는 제일 먼저(1821) 사망했다. 낭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고 1827년에 죽었으며 그를 알던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롭지 않은 괴짜이자 몽상가로 기억된 블레이크만큼은 아니지만 키츠 역시 명성을 누리지 못했다. 빅토리아 시대 초기에 키츠는 그저 테니슨이 속했던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의 '사도(Apostle)'와 같은 소규모 동아리에서 찬탄을 받는 정도였다. 바이런이 『돈 주앙』에서 표현했듯이 키츠는 "비평 한 편에도 떨어져나가 죽을" 정도로 약골이었다는 전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시집 여러 권이 유력한 비평지에서 받은 신랄한 논평에 극심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헌신적인 벗들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의 시를 선전했으며, 비록 그의 시를 널리 알리지는 못했더라도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리처드 몬크턴 밀른스가 집필한 키츠의 첫 번째 전기(몹시 부당하게도 칼라일은 이 전기를 "죽은 개고기를 대단히 맛있게 요리함으로써 우리에게 먹이려는 시도"라고 폄하해버렸다)가 1848년에 출판되고, 거의 같은 시기에 단데 가브리엘 로세티와 그의 라파엘 전파 동료들이 키츠를 재발견한 후에야 비로소 그의 명성은 조금 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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