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몽 아롱: 사회사상의 흐름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12. 22.
前篇
역자의 말
서론
제1부 몽테스키외
제2부 콩트
제3부 마르크스
제4부 토크빌
제5부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
後篇
서문
서론
제6부 뒤트켕
제7부 파레토
제8부 베버
결론
역자의 말
4 1789년 프랑스 혁명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프랑스 사회가 공화주의republicanism와 케사르주의Casarismus의 양극 사이에서 간헐적으로 동요하면서 정치적 불안정을 겪은 역사가 있다. 따라서 아롱이 속해있는 프랑스 사회학의 전통에는 권력을 잡기 위한 집단간의 갈등과 정치적 격변에 대한 강력한 혐오감이 있으며, 마르크시스트사회학과는 대조적으로 진정한 사회적 합의와 사회적통합에의 열의가 보인다.
서론
14 19세기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은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즉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할 혁명을 예측했고, 그 혁명을 정당한 것으로 추어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소비에트 사회학은 유익하다고 봤던 혁명을 미래의 일이 아니라 과거의 일로 여기고 있다.
14 혁명적 의도로 탄생한 사회학이 현존 소비에트 사회를 정당화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16 소비에트 사회학자들은 스스로는 보수주의자이고 남들에게는 혁명가들이다.
제1부 몽테스키외
21 오늘날의 추세로는 몽테스키외가 사회학의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
21 몽테스키외가 어디에 <속하는가>에 관한 문제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프랑스 여러 학교에서 교과 과정의 편제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문학부, 철학부, 경우에 따라서는 심지어 역사학부의 독서 목록에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21 몽테스키외를 사회학자로 여긴다는 것은 모든 역사가가 제기해 왔던 다음의 질문에 응하는 셈이 된다. 즉, 어떤 학문에서 몽테스키외 이론이 나왔던가? 어떤 학파에 그는 속하는 것인가?
22 몽테스키외는 베어와 똑같이, 무의미한 사실에서부터 지적 이해가 가능한 질서로 옮겨가기를 원했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태도야 말로 사회학자에게 특유한 태도인 것이다.
37 몽테스키외의 주요 개념은, 그 법률적 의미에 있어서의 권력분립이 아니라, 사실은 여러 가지 사회적 힘의 균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즉 정치적 자유의 조건이었다.
39 엄연한 사실은 몽테스키외가 사회적 힘의 균형 즉, 자유의 조건을 오직 귀족사회의 모델을 기초로 해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제2부 콩트
71 그의 철학에 따르면 절대적 타당성을 가진 사회는 단 하나의 유형뿐이며 모든 인류는 이 모범형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73 콩트에 의하면 사회학의 기능은 역사의 이러한 필연적이고, 불가결하고 또한 불가피한 과정을 이해하여 새 질서의 실현을 촉진하는 일이었다.
76여기서 우리는 콩테스키외와의 비교에서 콩트의 열등성이랄까 혹은 우위성이랄까, 그 차이를 보게 된다(나는 열등성으로 본다).
81 내 의견으로는 19세기 초기의 사람들이 관찰했던 산업의 특징은 다음 여섯 가지였다.
① 산업은 노동의 과학적 조직을 구성한다. 관습에 따라 진행하지 않고 생산은 최대한의 산출을 목적으로 조직된다.
② 노동조직에 과학을 적용한 결과로 사람은 부와 자원의 거대한 개발에 종사하게 된다.
③ 공업생산은 공장과 교외에 노동자들을 집중하게 한다.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 발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노동 대중의 존재이다.
④ 산업 지역에 있어서의 노동자의 이러한 집중은 고용인과 고용주 사이,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 사이에 잠재적 내지 표면적 적대심을 불러일으킨다.
⑤ 노동의 과학적 성격의 결과 부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반면, 과잉 생산의 위기가 또한 증가하므로 이 과잉생산이 풍요 가운데 빈곤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⑥ 노동의 산업적 과학적 측면과 연결된 경제조직은 소위 자유 기업으로서의 특징을 갖는다. 즉 기업가나 상인이 이윤을 추구하게 된다.
83 콩트는 프롤레타리아와 기업가 사이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대립되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부의 분배에 있어서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경쟁이 있을 수 있으나, 자본주의적 경제학자와는 달리, 콩트는 부의 증가가 (말하자면 정의상) 모든 사람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이며, 산업사회의 기본적 법칙이 바로 이 부의 증가이며 그로 말미암은 이익의 궁극적 조화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89 실력주의야 말로 바로 산업사회가 지향하는 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콩트의 생각이었다.
91 사회현상은, 인간 사회의 필연적 진화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엄격한 결정론의 지배를 받으며 이 진화는 그 자체가 이번에는 인간 정신의 진보에 의해 지배된다.
91 「단 하나의 설계에 따른, 인간 역사의 여러 사건의 근본적 연속의 합리적 조정」은 말하자면 콩트의 사회학의 개념에 대한 열쇠이다.
92 이와 같이 우리는 실증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바로 그 사람이 기독교적 또는 신학적 섭리주의의 마지막 제자로도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94 그에 대한 회답은 실증주의가 자발적인 철학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종말론적 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실로 실증철학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밖에 있는 질서를 인정하고, 그것에 관한 최종적 설명을 행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리고 오직 그 질서를 판독하는 일에만 국한하는 철학이다.
제3부 마르크스
123 마르크스의 사상체계에는 사회학 이론, 경제이론 및 역사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고, 때로는 과학적 저술 속에 발견되는 명시적 이론이 역사의 저술 속에서 사용되는 묵시적 이론과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계급이라는 어떤 일정한 개념을 제시했었으나, 그가 1848년과 1850년 간의 프랑스의 계급투쟁, 또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 또는 파리 혁명정부의 역사를 역사적으로 분석했을 때, 그가 인정했었고 또한 그 드라마에서 역할들을 부여한 여러 계급들이, 반드시 그의 이론에 함축되어 있는 계급들은 아니다.
124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자본론》에다 중심적 위치를 부여해야 하며, 《경제학과 철학 수고》 또는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 불완전한 (아마 상당히 독창적이란 것은 사실이겠으나) 초고, 즉 젊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보다는 확실히 헤겔을 더 잘 알고 있을 때에 헤겔과 자본주의에 관해서 사변적 논술을 한 것에 중점을 둘 일이 아니다.
125 마르크스 사상에 있어서는 노동자와 경영자 즉, 마르크스의 용어를 쓰면 무산자와 자본가 간의 갈등은 근대사회의 주요한 사실이며그것이 근대사회의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주고, 그로 말미암아 근대사회의 역사적 발전을 얘기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된 또는 적대적 성격에 관한 하나의 해석이다.
126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문서의 형식으로 그들의 과학적 사상을 약간씩 제시한 선전 팜플렛이다. 그 중심 테마는 계급투쟁이다.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127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이루는 이 적대성의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이다.
129 그의 학문의 목적은 자본주의 사회의 적대적 성격, 적대적 사회의 필연적 자멸 및 근대사회의 적대적 성격에 종지부를 찍게 될 혁명적 폭발을 엄격하게 입증하는 일이다.
136 왜 전체를 포괄하는 데 성공한 이론이 없는 것인가? 아마 그 이유는 이 전체(whole)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즉 역사가 이런 정도까지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136 《자본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 작용과 그 진화를 동시에 분석하고 그 체제 속에서의 인간의 운명을 서술해 보려고 애썼던 방식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139 이 입증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가치설, 임금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잉여가치 이론이다.
첫째 명제: 어떠한 상품의 가치도 대충 그 속에 포함된 평균적 인 간 노동의 양에 비례한다. 이것이 소위 가치설이다.
둘째 명제: 노동 가치는 상품 가치와 똑같은 방식으로 측정이 된다. 자본가가 임금 취득자에게 그가 제공한 노동력의 보상으로 지불하는 임금은 그 노동자와 그의 가족의 생존에 필요 불가결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인간 노동의 양과 동등하다. 인간 노동은 모든 상품에 타당한 일반적 가치 법칙에 합치하여 그 가치대로 지불을 받는다.
세째 명제: 노동자가 임금의 형태로 받는 가치에 동등한 하나의 가 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은 실제 계속되는 그의 노동 시간보다 적다. 노동자가 그 임금 속에 포함된 가치에 동등한 가치는 다섯 시간인데 실제로는 열 시간 일을 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노동자는 자기 시간의 반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나머지 반은 기업가를 위해서 일하는 셈이다. 이 경우 <잉여가치>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그 것은 필요한 노동 시간을 초과하여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의 양을 말 한다. 필요한 노동 시간이란 노동자가 임금 형식으로 받은 가치와 동등한 가치를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 시간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윤의 기원과 또한 모든 것이 그 가치대로 교환이 되는 경제체계가 동시에 잉여가치 즉, 기업가의 수준에서 이윤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그 가치대로 지불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그 가치 이상을 생산하는 상품이 있으니 그것이 즉 인간 노동인 것이다.
143 제2권의 주제는 자본의 유통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설명하려는 것이 그 전체적인 목적이었다.
143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메카니즘이 갖는 경쟁적 무정부적 성격과 자본 유통의 필요성이, 생산과 구매력 간의 부조화의 가능성을 영구화시킨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본질적으로 무정부적인 경제는 여러 가지 위기를 발생시키는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위기가 규칙적인 것인가? 불규칙적인 것인가? 하나의 위기를 폭발시키는 경제적 사정의 결합은 무엇인가? 이런 모든 점에 관해서 마르크스는 정밀한 이론보다도 암시를 줄 뿐이다.
144 《자본론》의 제3권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와 활동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진화에 관한 이론의 개관이 중심이 되어 있다. 제3권의 기본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자본론》의 제1권의 도식에 따르면 어느 주어진 기업 또는 경제의 한 부문에 있어서 노동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잉여가치가 그만큼 더 높다. 또는 그 대신 노동을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으로 규정한다면 총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비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잉여가치도 높아진다. 제1권의 도식에 있어서 <불변자본 constant capital> ━기계 또는 원재료가 ━ 이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일이 없이 재화의 가치로 전환된다. 모든 잉여가치는 가변자본, 즉 임금 지불에 해당하는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불변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관계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불린다. 잉여 가치의 가변 자본에 대한 관계는 <착취율>이라고 부른다.) 이 분석 적 관계에서 우리는 어느 주어진 기업, 또는 부문에 있어 가변자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잉여가치도 그만큼 더 많아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기계화가 증가되면 될수록 잉여가치는 점점 적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분명 하다.
146 평균 이윤은 총자본, 즉 불변자본과 가면자본의 합에 비례한다. 그러나 우리는 잉여가치가 가변자본, 즉 인간 노동으로부터만 공제되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아가서 우리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자본주의 제도의 진화와 생산의 기계화와 더불어 변동하며 따라서 총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비율이 감소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윤율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변하는 데 비례해서, 즉 총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비율이 감소함에 따 라 그것에 비례해서 저하된다고 결론을 지었다.
146 이윤에 기초한 경제의 경쟁적 메카니즘은 자본의 축적, 생산의 기계화, 총자본에 대한 가변자본 비율의 저하를 가져오고 이번에는 그것이 이윤율 저하를 초래하며 결국은 자본주의의 종말에 도달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기본적 패턴에 직면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영향을 매개로 하나 동시에 각 사람의 영향을 초월하여 작용하는 역사적 필연성, 즉 한 체제를 그 활동의 고유한 여러 법칙 때문에 멸망으로 이끌게 되는 역사적 매카니즘이 그것이다.
147 사실 우리가 <입증한 것>은 이윤율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변화의 결과로 저하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윤율이라야 자본주의가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단 말인가? 엄밀히 말해서 《자본론》 속에는 이에 대한 회답이 없다. 왜냐하면 어느 특수한 체제의 기능 작용에 필요불가결한 특정의 이윤율을 어떠한 합리적, 도식적, 이론도 결정할 수 있게 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 자면 엄밀히 말해서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은 자본주의의 기능 작용이, 기계화 또는 생산성의 증가에 비례해서 더욱더 어렵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최후적 파멸의 불가피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그 파멸이 일어나는 순간을 특별히 지정하는 것도 아니다.
148 이러한 명제들은 프롤레타리아화와 궁핍화를 다루는 명제들이다. 프롤레타리아화란 자본주의적 체제의 발전과 더불어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있는 중간계층이 점점 줄어들고 또한 이 중간계층의 사람들의 많은 수가 프롤레타리아에게 흡수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핍화는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서 프롤레타리아가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경향이 생기는 과정이다. 만약 우리가 더 많은 것이 생산되면 될 수록 노동 대중의 구매력이 더욱더 제한받는다는 것을 가정하면 대중이 반항하는 경향을 가지리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가정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자멸의 메카니즘은 사회학적 메카니즘이며 그것은 여러 사회 집단의 행동을 통하여 작용한다.
148 따라서 자멸에 관한 자본주의적 변증법은 두 가지 표현이 가능하다. 변함없이 증가하는 생산력과 대중에게 분배되는 수입을 결정하는 생산 관계 사이의 모순을 새롭게 표현하는 경제적 변증법 및 프롤레타리아화한 노동자들의 불만의 증가와 폭동으로 말미암은 사회학적 변증법이 그것이다.
150 의심할 것 없이 자본주의의 파멸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마르크스 야심의 하나였다. 내 생각으로는 《자본론》에 있어서 왜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 작용이 어려운가, 또는 더 정확히 말해서 왜 그것이 점점 더 어려워가는가(비록 이 마지막 명제를 나는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것으로 생각하지만)의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대중들이 자기들의 처지에 반역하는 폭동이 그 증거가 아닌 바에야 자본주의의 자멸에 대한 증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만약 대중의 처지가 사실상 심한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자본론》은 그 체제의 파멸을 원칙적으로 필연적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
150 자본중의 사회 및 사회 일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은 사회학적이지만 이 사회학이 하나의 철학과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철학이 사회학에 대해서는 갖는 관계로부터 많은 해석적 곤란성이 야기되는 것이다.
159 Entfremdung 은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가 되어 버리는 활동, 또는 과정이다. 그 의미는 어떤 일정한 상태나 어떤 일정한 사회에 있어서 인간에게 부과된 조건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가 되게 하고 자기의 활동이나 또는 자기의 생산물 속에 더이상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165 칸트학도들은 우리가 사실에서부터 가치로, 현실의 판단으로부터 도덕적 명령으로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가 발생하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으로서는 우리는 사회주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그대로 분석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옹호한다는 것은 정신적 차원에 속한 결단인 것이다.
186 그러므로 국가의 소멸은 오직 상징적 의미밖에 갖는 것이 없다. <실제> 소멸되는 것은 문제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인 것이다. 사실상 계급의 경합이 소멸되는 순간부터 이러한 행정적 및 훈령적인 기능들 은 어느 특정 집단의 지배적 의사를 표현하는 대신 전체로서의 사회의 표현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는 우리는 사실상 계급적 성격과 지배와 착취가, 국가 자체로부터 소멸됨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187 계급 대립 없는 사회에 관한 문제는 생산수단의 사유가 없어지는 사 회에 있어서 정의상 이 사적 소유와 결부된 계급대립은 없어지지만 대중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떠한 발전된 사회에 대해서도 없어서는 아니될 행정적 및 훈령적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가 있게 된다. 이런 타입의 사회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있는 사회에서와 같은 계급 대립은 없다. 그러나 경제 적 결정을 수단으로 해서 모든 사람의 조건을 주로 결정하는 국가를 가지는 사회에는 분명히 집단 간의 대립이 존재할 것이며 그 집단은 수평적 집단농민 대 노동자 또는 수직적 집단, 하층 집단과 상층 집단 어느 쪽이건 마찬가지이다.
187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생산수단의 사유가 소멸하고 각자의 조건이 국가의 결정에 의존한다는 그 사실만에 입각하여 대립 없는 사회를 위한 기초를 정립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193 그 두 주역은 카우츠키Karl Kautsky 및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이었다. 그 기본적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자본주의 경제는, 우리가 예측하고 또한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혁명이 계획대로 일어날 수 있게 변동하고 있는 것인가? 베른슈타인은 계급 간의 대립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증가되고 있지 않으며 경제적 집중화가 예기하였던 만큼 그렇게 빨리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발생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그 결과 역사의 변증법이 혁명의 파국과 계급대립 없는 사회를 성취하리라고 믿는 것은 확실한 지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선언하였던 수정주의자였다. 이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의 논쟁은 독일 사회민주 당과 제2 인터내셔널 속에서 카우츠키의 승리와 수정주의자들의 패배로 끝났었던 것이다. 정통적 테제는 유지되었었다.
제4부 토크빌
197 토크빌의 역사적 진단은 콩트나 마르크스 그것과는 다르다. 콩트처럼 산업사회의 현실에 치중하고 거기에 우선적 관심을 기울이거나 마르크스 같이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에 우선적 관심을 주지를 아니하고, 토크빌은 민주사회의 현실에 우선적 관심을 두었다.
200 《구체제와 프랑스 대혁명》은 다음 질문의 회답을 위해 저술된 것이다. 왜 프랑스는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그 진화 과정에 있어서 자유주의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데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202 토크빌에게 민주주의라는 것은 여러 조건의 평등화이다. 구체제에 있어서와 같은 서열이나 계급의 차별이 없고 그 집합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개인이 사회적으로 평등한━되풀이 말하여 사회적으로 평등한━그러한 사회라야 민주주의적이다. 그런데 이 평등이라는 것은 지적인 평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이야기요 또한 경제적 평등을 말하는 것도 아닌데, 그것은 토크빌에 따르면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사회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은 조건들에 관한 하등의 세습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요, 또한 모든 직업, 모든 전문 직업, 모든 칭호 및 모든 명예를 모든 사람이 얻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05 <자유>의 내용을 구성하는 첫 용어는 <안전 security>, 즉 자의적인 정부로부터의 안전보장이다. 권력이 법에 따라서만 행사될 때 개인들은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인간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어느 개인도 부패됨이 없이 절대권력을 휘두를 만큼 충분한 덕을 가지는 것은 아니므로━다시 나는 토크빌을 부연하고 있다━절대권력은 어떤 자에게도 줄 수 없는 것이다.
207 이제 《미국 민주주의》를 고찰하겠는데 토크빌의 다음 질문을 염두에 두자. 왜 미국 민주주의는 자유스럽고 자유주의적인가? 나는 자유민주주의의 결정요인, 또는 변수에 관한 이론도 함께 보여주는 토크빌 자신의 여러 요인의 열거를 인용하고자 한다. 토크빌이 말한 세 가지 종류의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① 미국사회가 처하게 되었던 우연적이고 특수한 상황 ② 여러 법률들 ③ 관습과 예법.
217 전형적인 고대 민주주의는 평등주의적이었고 또한 절제적이었다. 시민들은 평등에 기울어져 있었으나 상업적 고려에 대해서 우위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고대 공화정은 평등주의적이었 으면서도 덕치주의였다. 그들은 평등주의적이었으나 호전적이었다. 토크빌이 본 현대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상업적, 산업적 사회이다. 따라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현대사회에 있어서 지배적 감정이 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실로 현대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자기 이익 추구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몽테스키외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는 토크빌에 따르면 이해관계이지 덕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토크빌의 논의의 맥락에서 알 수 있듯이 이해관계와 덕은 공통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양자의 경우에 있어서 시민들은 그 스스로 하나의 도덕적 훈련에 복종해야 한다. 양자의 경 우에 있어서 국가는 오직 사회 자체가 그 성원에게 행사하는 영향을 통해서만 존속할 수 있다.
221 토크빌은 민주사회라는 추상적 관념에 눈을 돌려, 이 민주사회가 어떠한 정치적 형식을 취할 수 있으며 또한 왜 그것이 여기서는 이런 형식, 다른 곳에서는 저런 형식을 취하는가를 풀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민주주의 사회라는 이상형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가 즐겨 쓰는 말을 사용하면 비교적인 방법으로써, 가장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특수한 것으로의 진행을 통해 여러 원인들의 영향을 드러내 보려고 애를 썼었다. 따라서 토크빌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사회학적 방법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하나의 특정한 사회를 충실하게 그리는 것이요 또 하나는 어떤 일정한 유형의 사회의 추상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224 프랑스에 있어서의 구체제 하의 사회의 붕괴의 사실을 설명하는 주요 현상들은 무엇인가? 첫째 현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행정적 중앙집권이요 또한 행정적 획일성이다.
225 둘째로 중앙집권적으로 통치되고 또한 점점 더 똑같은 규칙들이 전체 영토에 적용되고 있었던 이 프랑스에 사회는 말하자면 티끌과 같이 산산조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에 관한 일들을 토의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국가 형성의 조건 즉 자유가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26 그들은 현실적으로 서로 비슷한 자들이었으나 또한 정치적 자유의 결여 상태에서 그들은 국가의 건강에 필요 불가결한 연대감을 얻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227 프랑스에 있어서 혁명과 그 후 뒤따르게 된 모든 프랑스의 혁명들의 기원에 있어서 특징적 현상은, 특권을 가진 여러 집단들이 자기 나라에 대한 정치 양식에 관해서 합의를 이룰 능력이 없다는 것임을 토크빌은 자신이 관찰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관찰에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현상이 오늘날까지도 존속하고 있는 정권 교체의 빈도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토크빌은 행정적 중앙집권화가 19세기를 통하여 또한 20세기에 들어가서도 증가할 것이며 프랑스의 부하고 개명된 요소가 계속 합의를 이룰 능력을 갖지 못할 것이고 그 결과 때때로 민주정부가 불가능 하게 되어 하나의 지도자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부언하곤 하였다. 프랑스 정치에 관한 이 분석은 심히 명석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19세기 및 20세기에 있어 프랑스의 전 정치사에 적용될 수 있 다. 그것은 서유럽 여러 나라 중 19세기에 있어서 또한 20세기에 있 어서 또한 근자에 이르기까지 프랑스가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가 장 덜 변화된 나라이고 또한 정치적으로는 아마 가장 격동을 일으켰던 나라라는 이 기이한 현상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경제적 및 사회적 반보수주의(semiconservatism)와 정치적 격동의 이러한 결합은 토 크빌 사회학의 맥락 속에서 쉽게 설명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250 정치사상가로서 토크빌은 그 스스로 말했던 것과 같이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르봉왕가를 옹호하는 정통주의자 당(Legitimist Party) 출신이었다. 그의 가정은 프랑스 왕정에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토크빌이 오를레앙 왕조 (Orleans dynasty)를 지지하였을 때에는 상당한 주저와 심적 고려를 한 연후였다. 어느 의미에서는 그는 자기의 가족적 전통과 결별하였으며 그가 깊이 사랑했던 가족을 배반한데 대하여 불안해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30년 혁명에 대하여 그의 정치적 이상이 마침내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을 걸었다.
251 사회학자로서 토크빌은 몽테스키외의 계보에 속했었다. 그는 사회 학적 묘사가로서의 방법을, 여러 정치체제의 유형과 사회 유형을 분류하는 습성과 결합하고 또한 나아가서 적은 수의 사실로부터 추상적 이 본을 구성하는 성향과 결합했던 것이다. 그는 역사를 예언할 생각으로 광대한 종합을 하는 일을 거절한 점에 있어 콩트와 마르크스와 같은 소위 고전사회학자들과 달랐었다. 그는 과거의 역사가 변할 수 없는 법칙에 의해서 지배당했다든가, 미래의 사건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토크빌은 몽테스키외와 같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를 원했으나 그는 그것을 저버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콩트나 마르크스적 유형의 사회학자들은 항상 역사를 저버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를 앞서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역사로부터 역사 전체의 차원인 행위를 박탈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행위를 말하면 우리는 또한 예측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5부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
253 맨 먼저 1848년의 혁명, 제2공화국의 짧았던 그 기간, 그리고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는, 연달아 입헌군주제가 파멸되고 공화정이 그것을 대신하며 그리고 이번에는 공화정이 파괴되어 권위주의적인 제국의 체제로 바뀌는 것을 표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배경에는 항상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준하는 혁명의 위험 또는 망명이 존재했었다. 1848년부터 1851년까지의 기간은 사회주의적 영향이 강했던 임시정부의 일시적 지배가 있었고, 그 다음으로 국민의회와 파리시민 간의 투쟁, 또 그 다음으로 권위주의적 제국을 다시 수립하려 했던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에 대항한, 입법의회(공화국을 지지했던 왕당원의 다수를 포함했던)의 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253 다른 말로 말하자면 1848년부터 1851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프랑스는 19세기 역사에 있어 다른 어떤 에피소드보다도 더 20세기의 여러 정치적 갈등에 유사한 하나의 정치적 갈등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사 실상 이 기간에 우리는 20세기에 있어서 파시스트라고 알려져 있는 사람들, 다소간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자들 및 사회주의자들 간의 삼각 갈등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을 또다시 우리는 1920년과 1933년 사이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며 현대 프랑스에 있어서도 아직 어느 정도까지 관찰할 수 있다.
254 1848년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들과 꼭 같은 것은 아니었으며 1850년의 보나파르티스트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도 아니었고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자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에 있어서의 이 시기는 주요한 적대자들과 경합자들의 20세기적 유형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254 콩트의 경우는 가장 용이하다. 여러 말 할 것없이 콩트는 자신이 비판적, 형이상학적, 따라서 무정부적 정신과 관련되었다고 믿었던, 그리고 또한 영국의 정치 혁명이 가지는 특유한 성질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던, 대의적 자유주의적 여러 제도가 붕괴하자 심히 기뻐하였다.
254 콩트에게는 의회제도는 보편적 사명을 가진 정치제도가 아니라 영국 역사의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영국을 모방한 대의적 제도들을 프랑스에 도입하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역사적 오류가 될 것이었다.
259 콩트가 구상하고 뒤르켕이 실천에 옮긴 사회학은 그 중심 과제를 사회성에 두었고 정치성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에 종속시키는 것은 <기본적 사회적 현실태>를 중시하고 의회를 격하시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뒤르켕도 <사회학>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콩트가 의회제도에 가졌던 것과 비슷한 적의나 경멸이 곁들인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뒤르켕은 사회적 문제, 직업윤리의 문제, 직업인들의 조직체의 재조직의 문제에 정열적인 관심을 가졌으나 의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비록 경멸의 대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제2차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259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토크빌의 사회적 지위가 콩트와는 전적으로 달랐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60 1848년이라는 똑같은 시기에 프랑스 귀족의 명문출신인 토크빌은 라망슈 La Manche 출신으로서, 루이 필립의 통치하에 있었던 입법회의의 대의원이었다.
260 1849년 5월 루이 보나파르트(후에 나폴레옹 3세가 되었음)가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 토크빌은 오딜롱 바로 Odilon Barrot의 재구성된 내각의 외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였다. 그는 외무부 장관직에 5개월간 근무하였는데 1849년 11월 초에 공화국 대통령 루이 보나파르트가 외무부를 폐지하였던 것이다.
260 이 시기의 토크빌은, 정통군주제 또는 오를레앙 군주제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므로 보수적 공화당으로 탈바꿈했던 왕당파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가 <가짜군주제 bastard monarchy>라고 불렸던 것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체제가 앞으로 곧 위기에 처할 것임을 토크빌은 예견하였던 것이다. 이 가짜 군주제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제국이었으며 그것은 조금만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프랑스 국민들의 절대다수가 카베냑 Cavaignac(공화파 장군이며 부르조아 질서의 옹호자)에게가 아닌, 오직 그 이름과 그의 숙부의 명성과 몇 가지 우스꽝스러운 탈선적 행위 이외에는 인기를 얻을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었던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투표했던 날부터 이미 예견한 바였던 것이다.
262 토크빌이 몇 년 후의 저술에서 1848년의 혁명이 불행한 사건이었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하고 있었음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달리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1848년의 혁명이 가져다준 끝장은 반(半) 정통적 자유주의적 온건한 왕제를, 콩트의 말로는 일시적 독재자, 또는 토크빌의 말로는 가짜 군주제, 그리고 더 널리 알려진 바의 권위주의적 제국으로 대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루이 보나파르트의 체제는 루이 필립과 그의 후계자의 체제보다 우월하였다고 믿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는 개인적 기호로 채색된 가치 판단을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에 있어서까지도 프랑스의 역사 교과서들 속에서 앙페르의 열성이 토크빌의 우울한 회의주의보다 더 잘부각되어져 있는 터이다. 프랑스의 인텔리겐차의 두 가지 특징적 태도들, 즉 혁명적 열성 (그 결과가 무엇이든지 간에)과 그러한 격동의 최종적 결과에 관한 회의주의, 이 두 태도들이 오늘날도 존속하고 있 으며 아마 다음 세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을 것이다.
265 역사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렇게 밖에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인과 제2차적인 원인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이를테면 역사의 거미줄을 이루는 그 결합된 요인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1848년의 혁명에 관해서는 토크빌은 그것이 시초에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이었음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임시정부의 사회주의적 멤버들을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264 프랑스에 있어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이러한 경멸감은 하나의 풍토병적 현상으로서 모든 체제의 종말에 있어서 그것이 발생하며 많은 프랑스 혁명들이 갖는 비교 적 무혈적 성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한 체제는 아무도 그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하여 싸우기를 원하지 않게 될 때 붕괴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1848년 이후 110년 만에 훨씬 더 발전된 형태로 이러한 종류의 현상이 발생하였음을 경험한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프랑스를 지배한 여러 정치계급들은 때때로 경멸을 받게 되고 그 경멸이 일반화됨으로써 스스로 방어해야 할 가장 많은 이유를 가진 바로 그 사람들을 마비시키게 된다.
265 사실상━이건 토크빌이 마르크스와 의견을 같이 하는 또 하나의 논점인데━1848년 혁명의 사회주의적 지도자들은 2월과 5월 사이에 향유했던 유리한 상황을 잘 이용하는 방도를 몰랐던 것이다. 국민회의의 모임 때부터 그들은 혁명의 게임을 할 것인지 또는 입헌정치체 제의 게임을 할 것인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자기들의 군대를 버린 것이다.
268 그의 두 개의 저서 《프랑스의 계급투쟁, 1848년~1850년》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무월 18일》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판단들은 토크빌의 《회고록》에서 읽을 수 있는 판단들과 부합되는 것이 많다. 토크빌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파리의 노동대중들이 며칠 동안을 지도자들 없이 홀로 싸웠던 1848년의 폭동들과, 단지 일 년 밖에 안된 1849년에 라 꽁따뉴의 의회지도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움직였으나 그들의 군대에 의해서 호응을 받지 못해 부질없는 결과가 되어버린 일과 대조해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첫번째 경우에 있어서의 지도자들 없는 군대와 두 번째 경우에 있어서의 군대 없는 지도자들의 대조를 이 두 저자들은 똑같이 강조했던 것이다.
268 이 두 사람들은 1848년부터 1851년 간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이 단순한 정치적 동요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혁명의 예비적 징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토크빌은 이제부터의 위기의 성격은 사회의 전체적 기초 즉 모든 인간사회들이 여러 세기 동안 존중해 온 여러 법률들의 위기라는 것을 경의의 눈으로 관찰했다. 마르크스는 그가 불가피하다고 여겼던 사회적 격변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당당히 선포했다. 자유주의적 귀족이 가지는 여러 가치의 척도는 혁명가의 척도와 다른 것이었고, 어느 의미에서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269 일단 전통적 군주제가 무너지면, 과거의 귀족체제가 타도되면, 사회적 평등을 향해 노력하는 민주주의적 운동은 기존의 어떠한 특권도 공격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특권이란 부르조아지의 특권을 말하는 것이다. 교단이나 신분상의 불평등이 말살된 연 후에는 경제적 불평등이 공격의 표적이 된다.
269 토크빌이 생각할 때는 정치적 불평등에 관한 투쟁은 적어도 그의 시대에는 실패의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러 번 그는 경제적 불평등━행운의 불평등━을 인간사회의 영원한 질서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여겼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는 사회의 재조직을 통하여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을 감소시키거나 말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70 루이 보나파르트가 피신되자 미묘하고 다면적인 갈등이 생겨났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군주제주의자들은, 군주의 정체와 또는 군주제 자체의 회복에 관한 의견 일치에 도달할 능력이 없는 채, 루이 보나파르트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을 통하여, 가짜 군주제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또 하나의 보나파르트에 대항하여 공화국의 옹호자가 되었던 것이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회주의자들이 대중에 대한 선동이라고 불렀던 수단을 어느 정도까지 사용했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전략에는 20세기의 파시스트와 나찌 당원들이 보인 의사사회주의의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입법의회가 보통 선거권을 폐지하는 과오를 범했기 때문에 무월 18일의 쿠데타에서 루이 보나파르트는 헌법에 위배하여 입법의회를 해체하고 동시에 보통 선거를 재확립했던 것이다.
271 토크빌과 마르크스 간의 합의점을 연두에 두고서 마르크스의 분석이 갖는 특정한 여러 특징을 알아보자. 나는 그 중심적 사상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마르크스는 사회적 하부구조라고 부를 만 한것으로써 정치적 사건들을 설명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가진 투쟁이란 말하자면 사회적 제 집단의 갈등이 저변에 깔려 있어 그것이 정치적 차원에서 표현되었거나 노출된 것에 불과함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토크빌도 같은 분석을 하였음은 아주 분명하다. 그도 역시 19세기 중엽의 프랑스에 있어 사회적 제 집단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사회적 제 갈등의 관점에서 정치적 제 갈등을 설명하기는 하였으나 그는 정치적 질서가 갖는 특성 내지 적어도 상대적 자율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272 명백히 비마르크스주의자까지도 농민들이 루이 보나파르트를 선출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루이 보나파르트가 농민들에게 당선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까지 그들의 계급 이익의 대변자가 되었던가 하는 것이다. 농민들은 그들의 계급이익을 구현하기 위하여 루이 보나파르트를 선출할 필연적 조건에 놓인 것은 결코 아니었고 루이 보나파르트가 취한 모든 시책이 필연적 으로 농민들의 계급이익과 일치한 것은 아닌 것이다. 황제는 오직 그의 천재성 또는 그의 우둔성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였을 따름이다.
276 왜냐하면 지주의 이익과 산업 부르조아지의 이익이 화해될 수 없다는 생각은 오직 사회학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행운을 계기로 두 군주 중의 하나가 후손을 갖지 못 하는 날에 두 왕위 요구자 간의 화해는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법이며 지주와 산업가의 이익이 기적적으로 타협을 이룩하게 된다.
276 많은 정치적 사건을 그 사회적 기초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는 것은 타당한 것이나, 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사회의 하부구조 속에 서 일어난다고 가상되는 것의 관점에서 항(項) 대항의 설명을 가한다는 것은 주로 사회학적인 신화일 뿐이다. 우리는 정치적 차원에서 관찰한 바를 사회적 하부구조에 투사하는 것이다. 두 왕위 요구자가 합의할 수 없다는 것을 관찰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주가 사업가와 합의할 수 없다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279 마르크스는 진정한 혁명은 이 기구를 인수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데에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명제에 대하여 토크빌 같으면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칼한 응답을 하였을 것이다. 즉 만약 생산 수단의 소유가 집단화되고 경제운영이 중앙집권화되어야 한다고 선포한다면, 무슨 기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기구가 파괴되거나 감축될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에 있어 국가의 역할에 관한 두가 지 사상이 공존하고 있다. 그가 파리 코뮌에 관해 말한 것을 보면 코원━이것은 중앙국가의 해체와 그 지방분권화인 것인데━은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독재 바로 그것이었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우리는 마르크스 속에서 정반대의 사상도 또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과 국가기구의 중앙집권화가 최대한도로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80 사회 갈등과의 관계 속에서 정치질서가 자율성을 갖는다는 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증명한 것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이다. 그때 한 집단의 사람들이 루이 보나파르트가 한 것과 비슷하나 더 폭력적인 방법으로 국가를 장악함으로써 러시아사회의 전체구조를 변경시켰고 더 나아가 소수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기초로 한 것이 아니고 국가기구의 전능을 기초로 하여 이를 테면 사회주의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공식적 마르크스주의자 이론에서 배제된 것이, 마르크스의 역사 분석에서는 나타나 있고 또는 마르크스 자신의 이름으로 그 참여자들이 행하였던 여러 사건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겠다.
280 이제까지 고찰한 네 명의 저자들은 세 가지 운동 또는 학풍의 기초를 이룬다. 첫째는 정치사회학의 프랑스 학풍이라고나 부를 수 있는 것인데 그 창시자는 몽테스키외요 그를 이어받은 위대한 인물은 토크빌이다. 엘리 알레비와 같은 사람도 오늘날 이 전통에 속한다. 이 전통에 속한 사회 학자들은 독단적인 것이 별로 없고 정치에 관해 본질적 관심을 가지 고 있으며 사회의 하부구조를 무시하지는 아니하나 정치 질서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또한 자유주의자들이다. 아마 나 자신도 현대의 이 학풍의 후예라 해두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281 둘째 학풍은 콩트에서 시작하여 금세기 초 뒤르켕에서 극에 달했는데 감히 말해 보자면 오늘날의 공식적 전문직을 가진 사회학자들로서 구성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학풍에 속하는 사회학자들은 사회적 현상에 관련하여 경제적 현상뿐만 아니라 정치현상을 덜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실체의 통일에 강조점을 두고 합의라는 관념을 근본개념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분석과 개념을 구성함으 로써 전체 사회구조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281 세째 학풍━이것은 강단에서가 아니라 세계사의 큰 무대에서 가장 성공한 학풍인데━은 분명히 마르크시스트 학파이다. 이 학풍은 수백만 인간들이 해석한 그대로, 경제조직과 사회 하부구조의 관점에 서의 사회적 실체에 대한 설명과, 그 추종자들에게 승리와 또한 평화적이건 폭력적이건 이단자들을 제거할 것을 보증하는 진화의 도식을 결합시킨 것이다.
282 이 세 학풍들은 저마다 제 나름대로 사회적 실체를 재구성한다. 그것들은 각기 역사상의 여러 사회의 다양성에 관해 고유의 이론을 제공한다. 그리고 도덕적 신념과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 움직이며 사고한다. 나는 이제까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든 없든 간에 도덕적 신념과 과학적 가설들을 분리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이 우리가 이 두 요소를 구분하려고 기도할 때조차도 대개는 우리 자신의 신념의 관점에서 구분하게 된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제8부 베버
472 베버의 출발점은 이것이 비록 베버 해석의 고전적 방식은 아니지만ㅡ다음 네 가지 행위유형의 구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① 목적합리적 행위, 즉 목적에 관계된 합리적 행위
② 가치 합리적 행위, 즉 가치에 관계된 합리적 행위
③ 정서적, 또는 감정적 행위
④ 전통적 행위
472 목적에 관계된 합리적 행위는 파레토의 논리적 행위와 대충 일치한다. 그것은 다리를 건설하는 기사, 증권거래소에서 돈을 벌려고 애쓰는 투기자, 승리하기를 원하는 장군의 행위이다. 이 모든 예에서 목적합리적 행위는, 행위자가 그 목적을 명백히 생각하고 그것을 달성하려는 생각을 수단과 결부시키는 사실로써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베버는, 행위자가 그 정보의 부정확성 때문에 부적합한 수단을 선택하는 행위는 비합리적(nonrational)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베버는 합리성을 행위자의 지식의 관점에서 정의를 하며 파레토와 같이 관찰자의 지식의 관점에서 그것을 정의하지는 않는다.
480 문화에 관한 제과학━역사와 사회학━은 가치를 창조하고 또한 가치에 관련되어 규정되는 인간의 산출물을 이해하려고 한다. 과학은 보편타당성을 가진 사실판단에 도달하는 것이 그 목적인 합리적 활동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가치의 창조라고 정의되는 인간사에 관하여 우리가 어떻게 보편타당성을 가진 사실판단을 정식화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가치판단(value judgment: Werturteil)과 가치관계 (value reference: Wertheziehung)를 구분하는 데 있다.
494 <이념형>은 베버의 주요개념들 중의 하나로서, 내가 이미 지적했던 베버 사상의 몇 가지 경향의 논리적 귀결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이해의 개념에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이념형은 역사적 실체, 또는 여러 사건의 연속 속에 있는 이해가능한 관계의 체계이기 때문이 다. 나아가 이념형은 우리 사회와 우리 과학의 특징인 합리화의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여러 이념형의 구성은 대상을 그 내적 합리성을 드러내거나, 또는 구성함으로써, 그것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모든 과학적 연구를 특징짓는 기도에서 나온 것이다.
522 사회학은 무엇인가? 베버에 의하면 사회학은 사회행위에 관한 과학이다. 그것은 사회행위를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며 동시에 이 행위의 경과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려 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기초적 용어가 있다. 해석한다deuten━의미 또는 주관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 이해한다verstehen━인간행위들의 주관적 의미를 여러 개념으로 조직화하는 것; 그리고 설명한다erklären인과 적으로 설명한다는 것 또는 인간행동의 항상적 요소constants를 밝힌 다는 것이다.
522 사회적 행위란 무엇인가? 베버는 말하기를 행위는 인간행동human conduct, 독일어로는 Verhalten의 한 양식으로서 그것은 내면적이거나 또는 외면적인 태도이며 작위(作爲) 또는 부작위적(不作爲的)인 행위로 표시된다. 그것은 사람이 그 행동에 어떤 일정한 의미를 두고 있을 때의 행위인 것이며 그 행위는 사람이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에 의하여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관계되며 그들의 행위에 지향되 어 왔을 때 사회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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