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1 : 476~1000 - 움베르토 에코 기획, 김효정 외 옮김, 차용구 외 감수/시공사 |
-전체 서문(움베르토 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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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문(라우라 바를레타)
-서로마 제국의 몰락에서 카롤루스 대제까지
-카롤루스 대제에서 1000년까지
-경제와 사회
철학
-철학 서문(움베르토 에코)
-고대 후기에서 중세 사이의 철학
과학과 기술
-과학과 기술 서문(피에트로 코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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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연구: 물리학과 지리학
문학과 연극
-문학과 연극 서문(에초 라이몬디, 주세페 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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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문학과 종교 문학의 종류
-연극
시각예술
-시각예술 서문(발렌티노 파체)
-여러 건축 공간
-도시와 조형물
-벽, 책, 제의 용구와 가구: 구상미술 프로그램
-영토와 역사
음악
-음악 서문(루카 마르코니, 체칠리아 판티)
-음악의 이론적 사유
-음악의 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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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Ⅰ: 도판과 지도
부록Ⅱ: 연표
전체 서문(움베르토 에코)
12 중세에 대한 이 서문이 책 내용만큼 길어지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제한을 두어야 할 것이다. 중세는 로마제국이 몰락하는 동안에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에 로마제국을 점차 침입했던 민족들의 문화와, 그 문화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던 그리스도교와 라틴 문화가 결합하면서 모든 국가가 시작되었다. 또 이 시기에 현재까지 쓰고 있는 언어와, 그동안 변화와 혁명을 거치기는 했지만 아직도 우리의 것인 제도도 시작되었으며, 동시에 오늘날 유럽이라 부르는 것도 시작되었다.
너무 많지만 또한 너무 적기도 하다. 수많은 진부함이 중세를 억누르고 있으므로, 일반 독자가 생각하는 것, 즉 많은 성급한 학교 교과서들이 믿게 만들었고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소개했던 것들은 중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일이 열거하는 편이 오히려 적절할 것이다. 그러니 먼저 (1) 중세는 무엇이 아닌지를 말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2) 중세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3) 어떤 의미에서 중세는 우리가 사는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중세는 무엇이 아닌가?: 중세에 대한 오해들
중세는 한세기가 아니다. 중세는 16세기나 17세기처럼 한 세기도, 르네상스나 바로크 혹은 낭만주의처럼 눈에 띄는 특징을 가진 시기도 아니다. 그것은 15세기에 살았던 인문주의자 플라비오 비온도(1392-1463)가 처음으로 정의했던 것처럼 여러 세기다. 모든 인문주의자들처럼 비온도도 고전고대 문화로 회귀하기를 원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몰락 시점(476)과 자신이 살던 시대 사이의 그 시기 (그는 이를 쇠퇴기로 보았다)를 괄호 안에 두었다. 결국 비온도도 1463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중세에 속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관습적으로 중세의 끝은 1492년으로 정해졌는데, 그해는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해이자 무어인들이 에스파냐에서 추방된 해이기도 하다.
1492년에서 476년을 빼면 1016년이다. 1016년은 긴 세월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학교에서도 배우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야만족의 침입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와 봉건 제도, 아랍의 팽창에서 유럽 군주제의 탄생까지, 교회와 제국 간의 분쟁에서 십자군까지, 마르코 폴로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까지, 단테에서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정복까지)이 일어났는데 생활방식 및 사고방식에 변화가 없었다고는 믿기 힘들다.
비록 로마제국의 몰락전에 사망했지만 최초의 중세 사상가로 간주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이에 몇 년이 흘렀는지 교양 있는 사람(물론 중세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은 흥미로운 실험이다.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두 인물 모두 그리스도교 사상을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감히 실제 숫자를 셈해보지는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사이를 가르는 시간이 적어도 8백 년이고, 성 토마스와 우리를 가르는 시간도 대략 8백 년이다.
비록 당시에는 우리 시대보다 훨씬 느리게 일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8세기 동안에는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는, 동어반복이지만 고대 시대 혹은 근대 시대처럼 한 시대인 것이다. 소위 고대 시대, 혹은 고전고대는 호메로스 이전의 초기 시인들에서 후기 라틴제국의 시인들까지, 소크라테스이전의 철학자들에서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까지, 플라톤에서 플로티노스까지, 트로이의 몰락에서 로마의 몰락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세기다. 마찬가지로 근대는 르네상스에서 프랑스혁명까지 이어지는 시기이며, 라파엘로뿐 아니라 티에폴로, 레오나르도, 백과전서파, 피코 델라 미란돌라, 비코, 팔레스트리나, 심지어 모차르트도 그 시기에 속한다.
그러므로 중세에도 여러 시기가 있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중세 역사에 접근해야 하며, 몇 가지 역사적 전환점에 주목하기보다는 적어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연대를, 그것도 매우 엄밀한 연대를 정해야 할 것이다. 로마 제국의 몰락에서 1000년(혹은 적어도 카롤루스 대제)까지를 중세 초기로, 소위 말하는 1000년 이후의 재생의 시기를 중세 중기로, 마지막 시기를 중세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후기'라는 용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후기는 단테가 『신곡』을 완성했고.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가 작품을 썼으며, 피렌체의 인문주의가 꽃을 피운 영광의 시대다.
중세는 단지 유럽문명에만 해당하는 시기가 아니다. 서양의 중세가 있는 한편, 로마가 멸망한 뒤에 1000년 동안 찬란한 비잔티움 문화 속에서 여전히 살아남은 동방제국의 중세도 있다. 동일한 시대에 위대한 아랍 문명이 꽃을 피우는 동안, 유럽에서는 유대 문화가 다소 은밀하지만 매우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렇게 다른 문화의 전통을 구분짓는 경계선은 오늘날에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다(오늘날에는 십자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서로 충돌했으리라는 견해가 우세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랍 서적이 번역되면서 유럽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그리스 저자들을 알게 되었고, 서양의 의학은 아랍의 지식을 이용했다. 그리스도교 학자들과 아랍 학자들 사이의 교류는, 비록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빈번했다.
[···]
중세는 어둠의 시대 혹은 암흑기가 아니다. 암흑기라는 표현에서 끝없는 공포, 광신주의와 이교에 대한 편협성, 역병, 빈곤과 대량학살로 인한 문화적이고 물질적인 쇠퇴기를 떠올린다면 이는 로마 제국의 멸망과 새로운 1000년 혹은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사이에 있었던 시기에만 부분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몇 세기에 걸쳐 유럽을 무너뜨렸던 야만족의 침입이 서서히 로마문명을 파괴했기 때문에, 1000년 이전의 몇 세기는 다소 어두웠다. 도시가 붕괴되거나 인구가 감소했고, 관리하지 못한 대로는 가시덤불에 묻혀 버렸으며, 문화는 방치되었다. 그리하여 1000년 왕국이 끝나기 직전, 혹은 적어도 카롤루스 대제의 봉건 개혁이 있기 전에는 전체 농지가 숲으로 돌아갔다.
[···]
중세는 인생에 대해 어두운 전망만을 가지지 않았다. 중세가 악마들이 사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팀파눔과 지옥의 형벌이 가득한 시대이며, 죽음의 승리라는 이미지가 그 주위를 선회하던 시대인 것은 사실이다. 고행 행렬이 이어지고, 죽음을 병적으로 기다리며, 시골과 마을에 거지들과 나병 환자들이 떼 지어 지나가고, 문학은 자주 지옥 여행에 현혹되던 시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대학생들이 인생의 기쁨을 찬양하는 시기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빛의 시대다.
43 결론을 대신하여
중세가 무엇이 아닌지를, 그리고 중세의 어떤 것을 우리 시대에서도 이용하는지를 말하는 게 쉬운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와 우리를 분리하는 차이에 대한 재검토는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다. 우리 아버지들이 살았던 최근의 몇 십 년과 우리 시대를 분리하는 수많은 차이를 보았기 때문에, 그 문제는 우리에게 혼란을 주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 시대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 시대 자체와도 늘 달랐다. 우리의 근대 시대는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만, 중세는 항상 그것을 감추려고 했다. 중세의 모든 사상은 최상의 상황을 표현하기를 원했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척했다 그러나 신학 서적과 신비주의자들의 서적은, 엘로이즈의 강렬한 열정, 질 드 레의 도착증, 이졸데의 간통, 돌치노 수사와 그의 박해자들이 행한 만행, 감각의 자유로운 쾌락을 찬양하는 시를 쓴 대학생들, 사육재 광인의 축제, 주교와 성경과 기도서를 비웃고 패러디하는 민중들의 유쾌함과 화합하기는 어렵다. 세상의 질서 정연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필사본을 읽다보면, 세상을 거꾸로 보여주고 원숭이에게 주교 옷을 입힌 그림으로 여백을 장식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중세인들은 선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강조했지만, 신의 용서를 믿으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도 받아들였다 결국 중세는 호라티우스의 다음 격언을 거꾸로 뒤집었다 "Lasciva est nobis pagina, vita proba(우리의 굴은 외설적이지만, 인생은 정직하다)." 중세는 만행과 욕망과 불경을 공식적으로 보여 주 문명이었다. 동시에 하느님과 하느님의 보상 및 형벌을 믿으면서 그것을 순진하게 위반하기도 하지만 또한 도덕적인 이상을 추구하면서 경건한 의식에 따라 살았다.
중세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마니교의 이원론에 대항하여 싸웠고, 창작 단계에서 악을 (이론적으로) 배제했다. 그러나 중세는 악을 실천했고, 어쨌든 그것을 날마다 시도했으므로, 악이 '우연히'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해야 했다. 그러므로 괴물들과 기형아도 창조의 교향곡속에 편입되어, 멈춤과 침묵이 소리의 아름다움을 높이듯이, 긍정적인 측면을 대조적으로 돋보이게 하므로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하여 일개 개인뿐 아니라 그 시대 자체가 스스로와 화해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와 거리가 먼 중세 문화가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둔 장면 전환 중의 하나를 언급하며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그러면 우리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그 당시에는 극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다.
장면 전환을 만든 사람은 교회의 박사이자 성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다. 성 토마스에게 유산이 허용되는지 물어보았다면 그는 명백하게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영원한지 그에게 물어보았다면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요컨대 아베로에스의 끔찍한 이단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도, 영원한 세상이 절대적인 물질주의를 가정한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신앙을 통해 알고 있다. 더구나 성 토마스는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이성을 혐오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재확인하는지 보여 주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을 연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 토마스는 『대이교도대전』에서든 소책자인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에서든 세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유효한 이성적인 논법은 없음을 깨달았다.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은 신앙을 통해 믿는 것이기 때문에, 성 토마스는 세계의 영원성(하느님과 영원히 공존한다는 것에 주목하자)이, 세계가 신성한 의지의 창조적인 행위에 의존한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현기증날 정도로 예리하게 논증했다.
성 토마스는 생명의 시작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공정하고 정직한 태도를 유지했다(이 문제가 유산에 대한 논쟁에 영향을 주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는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이것은 하느님이 태초부터 인간의 영혼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오리게네스와 함께 시작된, 매우 오래된 논쟁이었다. 이 견해는 「창세기」의 표현을 통해서도 곧 논박당했다. 「창세기」에는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되었다"라고 나와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하느님이 먼저 몸을 만들고, 다음에 그것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이 입장은 원죄의 전달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부모의 영혼이 씨앗을 통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동한다"고 주장했다. 이 입장은 곧 이단으로 규정되었는데 영혼의 물질적인 기원을 나타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 당황한 사람은 원죄의 전달을 부정하는 펠라기우스파와 논쟁을 벌여야 했던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육체의 영혼유전설에 반대하는) 창조론의 교리를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정신적인 영혼유전설을 인정했다. 그러나 모든 주석가들은 그의 입장이 매우 왜곡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성 토마스는 물론 창조론자일 것이고, 원죄의 문제를 매우 우아하게 해결할 것이다. 원죄는 자연의 감염처럼 씨앗으로 표현된다(『신학대전』, I-II. 81, 1). 그러나 이것은 이성적인 영혼의 해석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영혼은 육체의 물질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창조된 것이다.
성 토마스는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전통에 따라 식물들이 식물성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식물성 영혼이 지각기관의 영혼을 통해 동물들에게 흡수되는 반면에 인간은 이성적인 영혼을 통해 이 두가지 기능을 흡수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이성적인 영혼은 인간에게 지성을 갖추도록 하는 한편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영혼을 갖추도록 한다.
이제 성 토마스는 태아의 형성에 대해 매우 생물학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태아가 일차적으로 식물성 영혼을 획득하고 이윽고 감각적인 영혼을 획득할 때만 태아에게 영혼을 삽입한다는 것이다. 오직 그 순간에만 이미 형성된 육체에서 이성적인 영혼이 창조되는 것이다(『신학대전』, I , 90). 태아는 오직 감각적인 영혼만 지니고 있다(『신학대전』, I. 76. 2 그리고 I,118, 2). 『대이교대도전』(II, 89)에서 그는 "시작부터 마지막 모습까지 태아에게 주어지는 중간적인 형태 때문에" 발생에는 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대전 부록』에는 오늘날에 혁명적으로 들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들어 있다 최후의 심판 이후, 우리의 육신이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망자들의 몸이 부활할 때(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그때에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신생아들이 최고로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뿐 아니라, 장애인과 불구자도, 팔이나 눈이 없는 기형아들도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육신의 부활"에 태아들은 침여하지 못할 것이다. 태아들에게는 아직 이성적인 영혼이 주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아는 인간존재가 아닌 것이다.
성 토마스의 입장은 오늘날 다양한 교회와 그 주변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며, 오늘날의 세속 문화에 속하는 이론에 아주 근접한 듯하다. 이 해묵은 논쟁에서 누가 옳은지를 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일화가 우리에게 '암흑의 시대'에 대해 말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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