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울만, J. 모랄: 중세 유럽의 정치사상

 

중세 유럽의 정치사상 - 10점
W. 울만 외 지음, 박은구 외 옮김/혜안

옮긴이의 말 5
제1부 중세 정치의식의 형성과 성장
J. 모랄의 머리글
제1장 ‘중세’ 유럽의 정치사상이란?
제2장 교회, 제국 그리고 게르만족
제3장 그리스도교 공화국
제4장 12세기의 발견
제5장 국가의 출현
제6장 보편제국의 모색
제7장 국가의 성장
제8장 불확실성의 시대

제2부 중세 정치체제의 구조와 이념
W. 울만의 머리글
서론
제1장 중세 정치사상의 토대 : 로마적 배경과 성서적 배경
제2장 서유럽의 형성
제3장 카로링 왕조 이후의 발전
제4장 성직자 정치론의 성장
제5장 신정적 군주와 봉건적 군주
제6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활
제7장 새로운 지향
제8장 인민주권론의 대두
제9장 맺는말

부록1 주요 연구동향
부록2 W. 울만의 저술목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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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중세 정치의식의 형성과 성장

제2장 교회, 제국 그리고 게르만족

16 동부 콘스탄티노플에 자리잡았던 콘스탄티누스의 계승자들은 새로운 정신적 힘이었던 그리스도교를 광범위하게 통제하는 대가로, 그것과의 공공연한 협조라는 이들의 창시자가 제시했던 선례를 충 실히 추종하였다. 그리하여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법률과 정부에 입각한 매우 중앙집권적인 정치단위라는 유서 깊은 고전적 이상이 보존되는 비잔틴 제국 이 출현하게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일종의 정치종교적 조직으로서 완강하게 유지되었다. 비잔틴 교회는 서유럽의 로마 제국을 압도하였던 해체의 과정을 피하기 위해서, 불가결하게 요구되던 통합적 이념의 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비잔틴 문명에 미쳤던 현저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적 비잔틴 세계의 발전 방향은 이교적이었던 고대의 군주국가 및 도시국가들의 발전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평가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비잔틴 제국에서도 종교적 전통은 정치적 공동체 내에서 권력과 권위에 대한 규범을 신격화 내지 신성화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21 '봉사의 대가로서 보호를 받는다'는 원칙은 중세사회의 매우 특징적인 복잡한 인적 법률적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의 하나이다. 물질적 힘이 가장 강력한 정치적 근거이던 시대였던 만큼,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관행은 서유럽 전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군주뿐 아니라 격이 낮은 전사와 귀족들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보호를 제공할 채비가 되어 있었다. 

21 군주든 귀족이든, 상위자에 의해 피보호 예속민 또는 가신에게 강요되었던 봉사의 성격은 대체로 군사적인 것이었으며, 토지 보유를 그 기반으로 하였다. 로마 제국 말기의 로마적 법률 개념은 정액의 부과금과 준영구적 봉사의 대가로서, 소유자에 의해 수여되는 일종의 토지보유 형태인 은대지 제도를 발전시켰다. 가신제와 은대지 제도의 점진적인 동화가 암흑적 세기 동안 일어났으며, 그리하여 인적 관계가 토지 보유와 결부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22 게르만족의 재산 보유 관습도 이 원심화 과정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후기에 봉건법으로 제정된 튜튼적 관습은 동일한 지편의 토지가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에 의해 소유될 수 있으며, 또한 각 사람의 소유권 역시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구분되는 의미를 가진다는 관념과 전혀 모순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상위 영주로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 토지를 사용하고 또 보유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동일한 토지에 대하여 각자 나름의 완전하고 정당한 법률적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분리된 소유권은 보다 논리적으로 엄격했던 로마법적 소유 개념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로마법에 따르면, 오직 단 한 명의 진정한 소유자 만이 하나의 재산을 보유할 수 있었다. 


제3장 그리스도교 공화국
38 현대 사가들에 의해 서임권 투쟁(1075-1122)으로 묘사되는 그리스도교 공화국 내의 분쟁은 삼각 갈등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한편에는 교황의 중앙집권화에 반하여 관습적 특권들을 유지하고자 했던 주교단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교황의 중앙집권화를 자신의 수장적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던 황제권이 있었으며, 또 다른 한편에는 중앙집권화를 개혁된 그리고 정화된 교회를 이룩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교황청이 있었다. 

40 물론 성직 서임 문제가 독일과 이탈리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같은 관행은 서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각각 라틴 그리스도교 사회를 관리하는 대등한 위상을 가진 조직인, 교황권과 황제권이 이념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상호 결부되어 있었던 만큼, 주교 같은 매우 유능한 행정 대리인에 대한 임명권이 이들 쌍방간에 시끄럽고 격렬한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였던 셈이다. 

42 그레고리우스의 개인적 주장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 문서로는 1076년과 1081년 주교 헤르만 메츠에게 보낸 그의 서한을 들 수 있다. 이 머뭇거리고 있던 독일 주교에게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매우 유명해진 자신의 증거서류를 보냈다. 두 서한 모두에서 인용된 전거들이 바로 교황 진영의 이론적 근거였는데, 특히 그는 이름이 같았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를 매우 자주 인용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대체로 과거 로마 교황청 문서에 입각하여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교회법을 제정하고자 하였다. 

44 그레고리우스 서한의 핵심 주제는 경쟁 상대인 속권에 대해 교권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교권과 속권이 모두 인정하는 교권의 우위를 근거로 그레고리우스는 보다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견해인 교권의 권한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특히 그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군주를 파문하고, 그에 대한 신민의 충성 서약을 면제시킬 수 있는 교황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주장을 하인리히 4세에 대해 내린 두 번째 판결에서 보다 강력하게 천명하였다. 그는 통치자로부터 정치적 위엄을 박탈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는 현세 교황의 권한을 증언해 주도록 성 베드로와 성 바울에게 부탁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노골적인 주장은 그레고리우스의 격렬했던 교황직의 모든 목표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양분될 수 없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종국적 지배권이 교황의 당연한 권리임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44 하인리히의 서한은 주권적 정치 권한의 논쟁과 관련하여 중세인의 정신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비유인 유서 깊은 '두 칼 이론'을 도입하였다. 

51 반세기에 걸쳐 교권과 속권 사이에 진행되었던 교리적 분쟁의 정치적 결과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세속 및 교회 계서조직 내부에서 신민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통치자를 향하여 공동체가 제기할 수 있는 권리 주장, 즉 통치자에게 권고하거나 때로는 통치자를 폐위시킬 수도 있다는 주장을 더욱 강력하게 부각시켰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52 통일된 종교적 정치적 그리스도교 공화국에 대한 종국적 해결책은 보름스 협약이 이루어진 시기에는 전혀 기대될 수 없었다. 교회와 국가라고 불리는 두 자율적 관리체들이 동시에 설 자리는 여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정치적 상황의 명백한 중세적 기원이 서임권 투쟁기에 발견된다는 지적은 결코 부당한 주장이 아닐 것이다.


제4장 12세기의 발견
53 11세기 아니 그 이전부터 일어났던, 광범위한 경제적 부활이 12세기 문화적 부활의 배경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오늘날 광범위한 동의가 형성되어 있다. 근대 과학 및 산업혁명 이전기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련의 변화가 경제적 힘의 균형을 동부 지중해로부터 서유럽으로 점차 옮겨 놓았다. 이는 로마제국도 이룩하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농업이 개량된 여러 기술 특히 식량재배법의 개선을 통해서 이 과정을 선도하였다. 

54 농경의 전반적인 향상은 엄격한 봉건적 경제구조의 완화도 동시에 초래하였다. 이제 서유럽은 생산량과 노동력 모두에서 잉여력이 생겼으며, 농노제의 낡은 속박 형태도 서서히 영주와 농민 간의 금적적 관계로 바뀌기 시작했다. 다수의 농민층은 보다 나은 생활을 찾아 삼림, 늪지 또는 바다로부터 개간이 진행되고 있던 유럽의 여러 지역들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복음서에 나오는 몇몇 악한 관리인과 같이, 토지를 경작할 수도, 구걸을 할 수도 없는 경우에는, 차라리 부활하고 있던 도시에서 상인이 되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54 도시의 성장은 대두되고 있던 새로운 세계의 매우 두드러진 표식이었다. 잉여 생산물은 전통적인 촌락경제와 지방적 구획을 뛰어넘는 물산의 동적인 교류를 초래하였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정체되어 있던 도시의 부활은 이제 진정한 전체적 유럽 시장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에 새로운 교역망을 구축함과 더불어 물산의 집산지 내지 통신의 중심지라는 불가결한 역할도 수행하였다. 통신 수단의 향상으로 서유럽에는 구매와 판매를 축으로 하는 역동적인 경제체제가 다시 등장하였다. 화폐와 귀금속은 화려한 상류생활을 만들어냈으며, 모든 사회계충에 미친 생활수준의 향상은 이에 상응하는 가격의 상승도 수반하였다. 이 모든 과정을 진전시킨 주인공이 상인계층이었다.


제5장 국가의 출현
66 정치사상의 발달과 관련된 교회법 학자들의 견해는 큰 다음의 두 범주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교황과 그의 계서조직인 사제집단과의 관계 및 교황과 그리스도교 신도집단 전체와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 그것이고, 둘째, 그리스도교 공화국 내의 또 다른 계서조직 즉 세속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 그것이다. 

74 돌이켜보면 우리는 12세기 사상에 내재되어 있던 모호성들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유기체적 정치공동체에 대한 주장은 지방적 특권들 및 치밀하게 보호된 관습들로 이루어진 복잡다기한 사회질서와 더불어 공존할 수 있었다. 중앙집권적인 로마적 법률 전통의 재발견은 그리스도교 공화국의 두 계서 조직 모두의 내부에서 군주제 체제가 그 위상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투쟁을 벌이던 시기에 일어났다. 이들 모두 가운데 중앙집권화를 가장 강력하게 밀고 나간 조직이 바로 교황청 정부였다. 

77 13세기에 집어들면서는 일찍부터 공동체 내의 다른 계층들로부터 보완적 조언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사회계층 즉 부르주아 도시민, 왕국 내의 지방 출신 젠트리, 사제 그리고 법률가 등의 계층은 13세기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때때로 협의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77 군주가 공동체들을 향해 희망하는 바를 전하고 대표자의 지명을 설득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보다 중요한 요소로서 군주가 기대하는 바를 공동체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할 때에야 비로소 군주가 기대했던 바도 성취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서유럽 군주제는 일종의 대의체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78 잠시 교회 영역을 논외로 한다면 무엇보다도 속권 그 자체가 일종의 법인체적 제도로 간주되기 시작하였으며, 세속 정치공동체가 일종의 유기체 조직이라는 인식도 보다 강력한 법제적 발전을 수반하였다. 특정 지역의 공공 정부가 비상시에 특별세를 요구할 수도 있는 권리를 보유한다는 관념은, 비록 정확한 번역은 어렵지만 용어의 의미는 분명한, '왕국의 공공 이익' 내지 '왕국의 불가결한 필요' 등의 개념에 의해 더욱 정당화되었다. 

80 에드워드는 영국 전역의 주, 도시, 자치도시에서 선출된 인사들에게 각자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완전하고 충분한 권한'을 가지고 웨스트민스터에 모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소집장은 계속해서 '담당해야 할 책무가 무엇이든 이 같은 권한의 결핍으로 인해 책무가 지연되는 일이 없도록하라'고 밝혔다. 

81 '완전한 권한'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중세기에 성장하여 근대로 전달된 대의제의 핵심 개념이다. 이 개념의 중요성은 이를 나위가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지만, 비교적 근년에 와서야 대의제의 발달 과정에서 점하는 그것의 독보적 중요성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82 법인체적 대표제의 활용으로 국왕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극히 분명하였다. 국왕은 개인 및 단체와의 길고 지루한 모든 협상들을 단숨에 피할 수 있었고, 동의를 필요로 하는 여러 인물과의 회동을 대의체 기구라는 한 가지 처방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완전한 권한'의 원리는 이러한 대의기구에서 제정된 모든 결정에 대해, 과거 자신이 속해 있던 단체의 합의 내용을 모르고 있다거나, 혹은 단체의 합의에 충분히 동의할 수 없다고 호소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에게까지 구속력을 발휘하였다. 여기에는 보다 로마적인 법률적 전통도 작용하였다. 즉 다수에 의한 결정은 다수에 반대되는 투표를 한 자들까지 포함한 공동체 전체를 구속한다는 원리가 공동체 내의 개별적인 이견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87 정치학이 독자적 학문 영역이라는 인식은 13세기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중세 정치이론이 성숙하게 된 계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직접적인 영향이었다.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 처음으로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고유한 영역과 권한을 가진 정치적 사회의 가능성에 직면하였다. 

92 그에게 있어서 정치 공동체란 신이 창조한 자연질서의 일부로서 이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설령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존재했을 것이었다. 이에 비해 인간 영혼의 구속과 교회는 인간의 범죄에 의해 필요해진 것들이었다. 사실상 이러한 논리는 성 아우구스틴 이후 통용되어 온 그리스도교 공화국 개념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온 진정한 정치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토마스 아퀴나스가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정치적 사회는 마땅히 존재해야 할 고유한 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것의 정당성이 교회와의 관계에 의존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제6장 보편제국의 모색
105 《통치가론》에서 토마스는 로마 교황을 대사제이며, 성 베드로의 승계자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밝히고, 그가 인간의 종국적 목표를 관리하는 정부이며, 따라서 종속적 목표들을 담당하는 다른 정부보다 우월한 위상을 가진다고 지적하였다. 

107 교황 직접권 이론을 채택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두 명의 위대한 교회법학자 겸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우스 9세(1227~41) 및 이노센트 4세(1243-54)와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투쟁 과정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 

108 보니파키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우주의 계서적 질서 및 '두 칼 이론'을 활용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로마 교황에의 복속이 모든 인간 피조물의 구원에 꼭 필요하다"는 칙령의 마지막 문구가 반드시 정신적 수장권에 대한 선언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121 단테 역시 당대의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나름의 정의를 왕국(Regnum)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정치적 단위로 확대해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단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왕국들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 세계를 평화롭게 할 보다 높은 위상의 정치적 권위의 창출이 여전히 요구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7장 국가의 성장
129 마르실리우스는 중세 정치저술가로서는 최초로 기본적으로 의학 훈련을 받은 인물로 보이는데, 우리는 그의 저술들에서 다수의 의학적 표현과 비유들을 발견하게 된다. 

132 마르실리우스가 스스로 밝힌 《평화수호자》의 집필의도는 국가의 질서와 평화의 원인을 분석하는 일이었다. 마르실리우스가 직접 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용어는 자급자족적인 정치체에 관한 그의 이상을 설명하고 있는 여러 부차적인 개념들을 정확히 표현하는 용어다. 

133 아마 마르실리우스는 중세 최초의 정치사회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충실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사실상 그는 정치공동체에 관한 논의를 적절히 구분된 여러 부분들로 구성되는 하나의 유기체에 관한 논의로 전개하였다. 중세적 배경은 마르실리우스로 하여금 이 논의를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건강한 동물체의 구성 요소에 관한 유추로 환원시켜 놓았다. 


제8장 불확실성의 시대
148 중세와 르네상스의 시대구분을 둘러싼 논쟁은 예술로부터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 모든 분야의 인간활동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매우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은 이 시기의 변화를 혁명적인 전환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강조점의 변화로 파악하는 태도일 것이다. 

149 이 시기 전체를 편의상 세 유형의 긴장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고자 하는데, 이 세 유형의 긴장은 당대의 정치적 담론들을 관통하던 세 화두를 중심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정치생활의 토대는 객관적 자연법이라는 신념의 유지 및 이 가설에 도전하는 새로운 모색들과의 대립. 둘째, 대의제 관행들을 근거로 한 추론들에 의해 더욱 다양하게 전개된 통치자와 공동체 사이의 정치권위의 배분에 관한 끊임없는 논쟁. 그리고 셋째, 그리스도교 공화국을 재활성화하려는 다양한 시도들 및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었던 중세적 그리스도교 공화국 개념의 점진적인 해체 등이 그것이다. 

154 13세기 서유럽의 규모가 큰 영토국가들의 경우, 대의제 기구가 여전히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군주의 의사에 따라 소집되고 있었다. 단지 《평화수호자》의 집필 배경이 되었던 보다 잡은 규모의 도시국가에서만 대의제도가 법률적 통치의 지속적이고 핵심적인 기구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4·15세기에는 영토국가에서도 대의제에 관한 한, 비슷한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마는 이 국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가 영국이다. 14세기를 지나면서 영국 의회는 국민적 불만을 수렴하는 수단, 그리고 엄숙하게 법률을 선포하고 이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155 프랑스와 스페인의 신분제 의회가 영국 의회와 달리 향후 몰락하게 된 진정한 원인은, 무엇보다도 두 왕국의 군주들이 이 대의체들을 영국만큼 중앙집권적 정부구조와 결부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역설에 그 이유가 있다. 유럽 대륙의 신분제 대의기구는 그 시야가 국가적이라기보다는 지방적인 것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었고, 따라서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63 왜냐하면 영국의 군주제는 자신의 중앙집권적 권한을 확립할 때 왕국 내의 다양한 대의체 집단들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과 면밀히 제휴하는 전통적인 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경우에도 국왕권은 빈번히 의회를 억압하기 위해 위협하거나 혹은 통제하였지만, 여전히 의회는 국왕 통치기구의 필수불가결한 일부였다. 

168 이 시기 말엽에 이르면 중세 정치이념의 근본인 그리스도교 공화국에 대한 이념이 소멸되었으며, 더불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던 교회 정부와 세속 정부와 세속 정부의 유대도 소멸되었다. 모든 인간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아마도 그리스도교 공화국의 이념 역시 그것이 처음 형성된 순간부터 소멸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리스도교 공화국 이념이 무덤으로 가는 여정에서 경험한 다양한 변화들을 추적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사회적 정치적 지평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공화국의 해체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의 종교적 파편화가 16세기에 접어들어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유서 깊은 그리스도교 공화국 이념이 마침내 소멸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중세 세계 역시 종식되었음을 알리는 최종적 선언이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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