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중세 3 : 1200~1400 ━ 성, 상인, 시인의 시대

 

중세 3 : 1200~1400 - 10점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정하 옮김, 차용구.박승찬 감수/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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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문(라우라 바를레타)

1204년 4월 13일 지난해 7월 십자군에 의해 함락된 콘스탄티노플이 또다시 공격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약 285-337, 306년부터 황제) 시대 이후 황제 발렌스(328-378, 364 년부터 황제)의 아드리아노플 전투 대패에도 불구하고 모든 위기를 극복했으며, 페르시아, 아랍, 아바르족, 불가르족의 침입에도 살아남았던 이 도시가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정복되고 약탈당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훗날 오토 3세(980-1002, 983년부터 황제)가 열망하던 로마 제국 재통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종종 정복을 위한 계획들이 표면화되었음에도 13세기를 거치면서 11-12세기에 유럽이 십자가를 앞세우며 드러냈던 세력 팽창의 욕망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1212년에 이베리아 반도 군주들은 십자가를 앞세워 라스 나바스 데 톨로시 전투에서 아랍-무슬림을 몰아냈고, 1270년에 국토회복운동을 통하여 그라나다를 제외한 반도 전 지역을 회복했다. 튜턴 기사단은 한자 동맹 도시들이 해상 활동을 독점하고 있던 발칸 반도에서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반면 발칸 반도와 달마티아, 유럽 중동부 지역 주민들은 점차 그리스도교 세계의 더 큰 정치적-종교적 영향에 놓였다. 지중해 지역 중 에스파냐 남부를 비롯한 발레아레스 제도와 시칠리아 재정복은 11-12세기에 아라곤 가문의 지배를 강화시켰고, 또한 13세기의 발칸 반도 정복은 그리스도교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피사와 제노바는 지중해 동부 지역으로 진출하여 이미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선점하고 있던 베네치아와 경쟁 관계에 돌입하며 한층 적극적으로 상업 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동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제5차와 제6차, 제7차 십자군(1217, 1248-1254, 1270)이 이집트 정복을 시도한 것은 이러한 정세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정복에 대한 욕구는 무엇보다 계속되는 귀금속 공급 부족으로 야기된 중세 전반기의 오랜 침체를 벗어나 13세기 초반의 급속한 인구 증가와 통화 경제 성 립을 촉진한 농업, 수공업, 상업 활동의 발전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13 세기 초반에 아프리카와 교역을 통해 해당 지역의 광산들로부터 금이 유입되자 베네치아, 피렌체, 이후에는 제노바, 프랑스, 잉글랜드, 그리고 헝가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은화와 금화가 주조되었다. 통화 유통의 확대, 새로운 지불수단의 등장, 빈번히 열리는 시장, 교통로 개선은 피렌체의 페루치와 바르디 가문의 활동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하지만 이들의 왕성한 활동은 14 세기 중반을 고비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상업 활동, 여행, 해상 원정을 지원하는 부유한 부르주아 계층의 형성 시뇨리아 체제(자치 도시의 전권을 한 사람이 장악하는 제도)의 출현, 그리고 왕국의 성립과 전쟁을 불러왔다. 

 

교회와 유럽의 정치
십자군 정신과 다양한 신앙의 종족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해야 할 필요성은 팽창을 자극하는 이념적 접착제 역할을 했다. 교회는 10세기부터 타락한 풍속, 사제들 사이에 만연하던 내연 관계, 성직 매매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의 지상(절대)권 확립과 '교회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던 개혁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승리자 입장으로 돌아섰다. 1122년에 교황이 보름스협약을 통해 세속 임명권과 성직 임명권의 구분 기준이었던 황제의 주교 임명권을 빼앗아 오는데 성공하자 교회는 교황 선출에 대한 외부의 모든 영향을 영구배제시켰다. 또 교황 특사의 수를 늘려 유럽사의 한 기준점으로 작용한 군주국의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것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다. 도시에 있는 성당들의 학교 설립, 당시 모든 학문의 종합으로 여겨졌던 (대학에서의) 신학 강의, 이성적 인식과 신비 체험의 반목을 중재하려는 노력, 교회법의 발전, 그리고 자선 활동 및 집단에 대한 감찰을 통해 당시 진행 중이던 문화적 부흥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것이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기여했음은 자명하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60-1216, 1198년부터 교황)는 과거 두세기를 거치는 동안 축적된 교황령의 정치적-종교적 경험을 통합했다. 그는 베드로의 대리인이기보다는 명실공히 그리스도를 대리했고 시칠리아, 잉글랜드, 포르투갈이 교회의 공식 영지며, 교황이 그리스도교 유럽 동맹 체제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다는 종속 논리를 확립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존엄왕(1165-1223, 1180년부터 왕)과 연합한 그는 오토 4세(1175/1176-1218년, 1209-1215년에 황제), 잉글랜드 무지왕 존(1167-1216), 그리고 프랑스 대봉건 영주들에 대항하여 1214년 7월 27일에 플랑드르의 부빈 다리 근처에서 승리(프랑스왕국의 성립을 가져온 사건 중 하나)를 쟁취했다. 


세속 권력과 교황령
사회 변화는 이전에 비해 군주와 교회의 강제권이 느슨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적 측면보다 외교적 노력을 강화하려는 교황령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1238년 로마에서 거행된 독일 왕 루트비히 4세(약 1281-1347, 1314년부터 왕, '바이에른의 루트비히'라고도 함)의 대관식은 교황이 아니라 로마 민중의 대표인 시아라 콜론나(?-1329)가 주관했다. 이는 정치와 종교권력이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한다는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약 1275-약 1343)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교회에서 공의회로 상징되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교황을 대리하듯 군주에게는 민중의 동의에 해당하는 세속적 보편성이라는 특권을 부여했다. 독일 군주들은 렌스 선거 연합에서 황제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가 말하는 정부의 '자연성' 원칙에 근거하여 교황에 의한 어떤 정당화 절차도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1356년에 카를 4세가 황제의 인장칙서를 통해 새로운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고, 아헨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자가 황제의 권위를 획득하며 황제를 선출할 권리가 7명의 선거 제후에게 속한다는 것을 엄숙하게 선언했다, 7명은 쾰른, 트리어 대주교, 4명의 대봉건 영주(보헤미아의 왕, 작센의 공작, 팔츠 선제후령과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였다. 

두 보편 권력은 상호 의존적이면서도 빈번히 충돌했다. 프랑스 군주국에서는 세수 증가를 이용해 왕국을 재편하려는 필리프 4세 미남왕(1268-1314, 1285년부터 왕)의 총체적 노력이 성직자의 세금면책권에 대한 교황의 요구와 분쟁을 일으켰다. 1302년에 「거룩한 하나의 교회Unam Sanctam」공표로 야기된 분쟁은 로마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교황을 프랑스법정에 세우려는 필리프 4세의 의도로 구체화되었다. 이를 위해 1303년에 프랑스인들은 교황을 아나니 궁에서 끌어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교황 베네딕토 11세(1240-1304, 1303년부터 교황)의 짧은 재임 기간 중에 '아나니의 모욕'의 주동자로 지목당한 노가레의 기욤(약 1260-1313)과 시아라 콜론나가 파문당한 후 새 교황으로 선출될 보르도의 대주교 클레멘스 5세(1260-1314, 1305년부터 교황)는 불과 몇 년 후에 교황의 궁정 전체가 옮겨 갈 아비뇽에 주로 머물렀다. 그러나 아비뇽 기간(1309-1377)에 교황들은 교황청의 관료 조직과 외교 조직을 강화하려고 할 때마다 프랑스 군주국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피할 수 없음을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교황이 템플 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한 것이 대표사례로, 기사단의 재산을 차지해 왕국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필리프 4세의 의도에 굴복한 결과였다. 교황청은 그레고리오 11세(1329-1378, 1370년부터 교황)가 로마로 돌아온 직 후부터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프랑스인 추기경들의 수가 지배적으로 많았던 1378년 추기경 회의는 이탈리아인 추기경인(어쩌면 로마 민중의 압력으로) 우르바노 6세(약 1320 —1389)의 선출 5개월 후, 교황 선출 무효화를 선언하며 프랑스인 추기경으로 또 다른 교황인 클레멘스 7세(1342-1394, 1378년부터 대립 교황)을 선출했고, 그 결과 한 명의 교황은 로마에 다른 한 명은 아비뇽에 있는 교회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이후에는 심지어 세명의 교황이 공존하는 상황마저 연출되었다. 게다가 로마귀족들에 의한 루트비히 4세의 황제 임명과 비록 기간은 짧았음에도 1347년에 리엔초의 콜라(약1313-1354)의 로마 공화국 선포는 에지디오 알보르노즈(1310-1367) 추기경이 콜론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을 중재하면서, 그리고 1816년까지 교황청을 재조직하는 일에 활용된 『에지디우스 법령집』을 선포하면서 교황의 권위를 재건하기 이전까지 로마에서의 교황권 약화를 확인시켜 주었다. 

 

기근, 전쟁, 봉기, 그리고 전염병
유럽 민중들은 14세기부터 15세기 중반까지 정체 상태와 (10세기경부터 수많은 지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퇴보 조짐을 보여주는) 기근, 전쟁, 전염병으로 얼룩진 극적인 기간을 맞이했다. 지역에 따라 두배에 이르며, 어떤 지역에서는 이후의 3 세기 동안 세배로 불어난 인구의 극적 증가는 불행히도 이에 상응하는 식량지원의 양적 증가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14세기 중반 유럽은 기후 악화만으로도 기근이나 흑사병 같은 전염병 발생 조건을 충족시켰다. 첫 발병 이후 1천 년이 지난 다음 다시 유럽에 상륙한 흑사병은 흑해 지역을 항해한 제노바의 상선들을 통해 유입되었다. 유럽에 대재앙을 불러온 흑사병은 유럽 전체 인구의 약 30%를 감소시키며 경제, 생산, 사회와 정치 조직들에 심각한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에는 공식적으로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로 정의된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용어는 실제로는 더 오래 지속된 분쟁에 대한 표현이었다. 백년전쟁이 두 국가에 각각의 군주국 강화로 종식되었다면 민중에게는 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들의 의지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전염병에 의한 대재앙의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는 크레시(1346)와 푸아티에에서 패배한 직후인 1358년에 에티엔 마르셀(약1316-1358)을 주동 인물로, 귀족들의 권력과 특권을 폐지하기 위해 폭력적인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멸시적인 표현으로 '자크리의 난'이라 불렸다. 20년이 지난 후인 1381년 잉글랜드에서도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해 부과된 과중한 세금으로 농민들 외에 상공인들까지 가담한 봉기가 발생했으나 전쟁이 아니라 인구증가와 자원 및 생산활동의 불충분한 증가 사이의 불균형이 보다 근본적인 이유였다. 독일에서는 14세기 후반에 두 차례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카탈루냐에서는 1462년에도 하급 귀족들과 시민 귀족들에 저항하는 봉기가 발생했다. 1470-1480년대에 터키인들의 움직임은 랑그도크로부터 피에몬테로 확대되었다. 부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농민들의 도적 활동이 극성을 부렸다. 긴장감과 반란은 수공업 분야에서도 구체적으로 발생했다. 14세기 전반에 플랑드르의 직조공들이 봉기를 일으킨 데 이어 1371 년에는 페루자와 시에나에서 봉급쟁이들이, 1378년 여름 피렌체에서는 양모 조합의 봉급쟁이들인 (결과적으로 1382 년 염색 직공 조합과 셔츠 직공 조합 철폐, 정부에 의한 군소 조합들의 철폐, 1434년 메디치의 코시모〔1389-1464〕의 시뇨리아가 출현하기 전까지 50여 년 동안 지속된 과두 정권의 형성을 초래한 정치 계획을 가지고 있던) 치옴피(하층 노동자)들이 난을 일으켰다. 봉기의 근간에는 양모 생산 급감과 그 결과에 따른 일자리와 임금 감소가 있었다. 반면 14세기의 유럽이 지난 몇 세기 동안 축적했던 동력을 모두 상실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견직물, 제련업, 조선업 등의 분야들은 실질적인 생산 증가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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