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중세 2 : 1000~1200 ━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중세 2 : 1000~1200 - 10점
움베르토 에코 기획, 윤종태 옮김, 차용구.박승찬 감수/시공사

역사
-역사 서문(라우라 바를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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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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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서문(움베르토 에코)
-유럽의 부활과 지식의 도약

과학과 기술
-과학과 기술 서문(피에트로 코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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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발견, 발명
-유럽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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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연극
-문학과 연극 서문(에치오 라이몬디, 주세페 레다)
-부흥과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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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 도시, 국가: 유럽의 문학
-연극

시각예술
-시각예술 서문(발렌티노 파체)
-건축 공간
-도상 프로그램
-전례용 도구들과 권력의 표시
-영토와 도시
-문제들

음악
-음악 서문(루카 마르코니, 체칠리아 판티)
-음악의 이론적 고찰
-음악의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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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I: 도판과 지도
부록 II: 연표

 


역사 서문(라우라 바를레타)

14 12세기 장블루의 시게베르투스는 자신이 편찬한 『연대기』에 1000년에 지진이 발생했으며, 뱀 모양의 무시무시한 혜성이 나타났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1000년 동안 묶여 있다가 이 세상에 종말을 고하기 위해 나타난 악마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된 성장 단계에 접어든 사회에서 살아가게 될 1000 년경의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다. 

실제로 11세기 초 유럽의 인구는 이미 늘어나는 중이었고, 이와 함께 새로운 주거지역들과 도시의 인구 밀도, 경작지 면적, 수공업과 상업 활동, 상거래와 시장, 통신로, 항구, 해상운송, 그리고 화폐의 사용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전 유럽에 걸쳐 골고루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유럽 각지역들의 저마다 다른 지리적인 형태와 도시의 형성 방식, 그리고 전쟁, 전염병의 발생 범위들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어쨌든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여러 무리의 농부들이 산림을 개척하여 땅을 개간하고 새로운 촌락을 세우기 위해 봉건영주들의 영지를 떠나 사람이 살지 않던 지역으로 이주했다. 게르만 민족들은 그들이 수세기 전까지 살았던 숲을 향해 동쪽으로 뻗어 나갔고, 해상 도시 주민들인 아말피인들은 동방과 아랍 국가들을 향해서, 그리고 베네치아인들은 비잔티움 세계로, 프리지아인들과 바이킹족들은 발트 해와 러시아의 큰 강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늪지대는 대규모 간척과 수로 사업의 대상이 되었다. 나침반, 포르톨라노, 해도 같은 새로운 항해 도구와 기술을, 무거운 쟁기, 말의 편자, 삼모작 같은 새로운 농사도 구와 기술도 등장했다. 또한 생필품과 함께 향수, 향신료, 보석 같은 사치품도 자주 유통되었다. 생산은 분업화되었으며 수공업 작업장들이 설립되었다. 옛 도시들은 과거에 수행했던 소비 중심지의 역할을 벗어나 생산과 교역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떠맡게 되었으며, 정관에 의해 통제되고, 정치·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직능 조합들이 만들어졌다. 결국 새로운 1000년이 맞이한 것은 새롭게 다가올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나 고대의 지리적 경계, 생존이라는 절박한한계를 벗어난 유럽이었다. 


유럽의 정치적 상황
앞선 두 세기 동안 유럽을 휩쓸었던 제2의 민족 이동도 끝나가고 있었으며, 11세기 초에도 여전히 지중해의 북쪽 해안이 아랍인들의 약탈과 지배의 영향을 받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공격력은 약화되었다.

이미 남부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는 문화적·군사적·경제적으로 찬란한 혁신기를 맞이한 비잔티움제국의 통제를 다시 받게 되었으며,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아스투리아스와 나바르의 조그만 왕국들과 카스티야와 바르셀로나의 백작령 국가들이 11세기 초, 그리스도교들의 반격을 허용했던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견고히 하였다. 이슈트반 1세(약 969-1038, 1000/1001년부터 왕)의 통치를 받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헝가리인들은 작센 왕조의 황제들이 주도한 전투의 패배들, 특히 아우크스부르크의 레히펠트 전투(955)에서 패배한 뒤에 다뉴브 강 연안 지역들에 정착했다. 9세기에 이미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슬라브인들은 지리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발칸 반도와 세르비아, 폴란드, 키예프에 오랫동안 지속될 왕국과 공국들을 세웠다. 

덴마크 반도와 스칸디나비아에 기원을 둔 노르만인들은 대서양 연안과 프랑크족의 왕인 카롤루스 단순왕(879-929)을 영주로 섬기는 공작령 국가를 세우고 훗날 노르망디라고 부르게 될 지역에 이미 정착했으며, 11세기에는 러시아의 강들과 대서양의 섬들에서 횡행했던 9세기와 10세기 약탈들의 연장선상에서 캐나다 해안에도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시기의 지역 분쟁에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랑고바르드인들과 비잔티움인들 사이의 다툼을 틈타 로베르 기스카르(약 1010-1085)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노르망디 출신의 정복자 월리엄공(약 1027-1087, 1066년부터 왕)이 헤이스팅스 전투(1066)에서 해럴드 왕의 앵글로색슨 군대를 무찌르고 잉글랜드의 왕이 됨으로써 노르만인들은 이탈리아 남부와 잉글랜드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한편, 노르망디 출신인 월리엄공의 잉글랜드 점령은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나라의 군주들과 연관된 봉건적 관계들 때문에 앞으로 있을 분쟁의 단초를 제공했다. 유럽의 중심부에서는 카롤루스 3세 뚱보왕(839-888, 881-887년에 왕)의 폐위로 인한 왕조의 위기 이후에 카페 왕조가 기반을 공고히 다졌던 파리의 백작령 국가를 시작으로 여러 왕국들과 지역의 공국들이 새로이 수립되고있었으며, 아헨에서는 유럽 대륙의 대부분의 역사와 관련을 맺게 될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했다. 


성숙한 봉건주의
따라서 다음세기 변화의 주역이 될 유럽 지역들이 형성되어 갔으며, 한동안 지속될 정치적 관계들과 분쟁의 기초가 수립되었다. 새로운 민족들이 정착하고 그리스도교화되면서 유럽의 정치적 지도가 동방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유럽의 구성은 라인강과 다뉴브강으로 국경이 제한되었던 서로마제국과 달리 점점 더 모호해지고 이질적인 모습을 취했다. 작센 공국의 오토 2세(955-983, 973년부터 왕)와 비잔티움의 황녀 테오파노(약 955-991, 973-983년에 황후)의 혼인을 통한 로마제국의 부활에 대한 염원은 제국의 건설이라는 지나치게 모호한 개념과 특히 결정적으로 오토 3세(980-1002, 983년부터 황제)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갔다. 

999년 실베스테르 2세(950-1003)라는 이름으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으며, 오토 3세의 스승이기도 했던 오리야크의 제르베르가 다듬은 황제라는 칭호의 신성함에 대한 이론화 작업에 깊이 매료된 오토 3세는 젊어서부터 전체 그리스도교 사회를 자신의 제국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이로인해 독일과 이탈리아의 봉건 영주들과 귀족들의 극심한 반발을 겪었으며, 결국 로마 귀족세력들의 강요로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오토 3세는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1년 뒤 소라테 산의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1000년 이후 초기 몇 세기 동안 지속되던 보편적인 제국이라는 이상과 세속적인 권력의 구체적인 실체 사이의 대립에서 후자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공권력 재편의 방식으로 당시의 요구들에 부응했던 봉건주의가 수용력을 보이고일상의 모든면에 깊이 뿌리 를 내리며 널리 퍼져 나갔다는것은, 봉건주의의 정치적 역할이 이미 오래전에 끝났을 때에도 봉건적인 권리가 아주 다양한 형태로 근대 말까지, 그리고 몇몇 나라들에서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봉건주의는 11세기와 12세기에 최고의 절정기를 맞았는데,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제2의 봉건주의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다른 학자들은 1000년 이후 초기 몇 세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진정한 봉건주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대규모 봉토들의 상속권이 케르시 칙령(877)에서 카룰루스 2세 대머리왕(823-877, 875년부터 황제)에 의해 승인되었던 반면에, 군소봉토들의 상속권은 콘라트 2세(약 990-1039, 1027년부터 황제)의 봉토에 관한 법에 의해 1037년에 와서야 인정되었다. 이리하여 봉건 귀족 계층이 두터워졌으며, 영토는 더욱 세분화되었다. 공적인 사법권과직무의 봉건제가 좀 더 강화되었으며, 귀족 계급의 봉건제와 종종 경쟁했던 관료들과 성직자들의 봉건제가 생겨나 이들 사이의 교류가 체계화되는 경향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봉건제를 진정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조직으로 만들었으며, 이러한 조직은 주교좌 성당이 있는도시들과 성 주변에 무수히 많은 소규모 권력 중심지들에서 공적인 권한을 가진 조직들이 지속되면서 아들들에게 재산을 분할하는 게르만 민족의 풍습이 만들어 낸 자기중심적 이기주의가 극단적인 결과를 맞도록 이끌었다.


급속히 퍼져 나간 그리스도교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정치적·이념적 쇄신은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조직한 우르바노 2세(약 1035-1099, 1088년부터 교황)와 함께 절정을 맞았다. 교황의 특사였던 르퓌의 아데마르의 지휘로 1096년에 시작되어 1099년 여름 예루살렘 정복과 함께 승리로 끝난 제1차 십자군 원정은 예루살렘의 왕이 된 부용의 고드프루아와 그의 동생 불로뉴의 보두앵 1세, 툴루즈의 레몽 4세, 베르망두아의 백작 위그 1세, 노르망디의 로베르 2세,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오트빌의 탕크레드와 보에몽 같은 로렌인, 프랑스인, 플랑드르인, 노르만인 대장들이 인솔하였으며, 대체로 장남이 아닌 기사들로 이루어진 무장 군인들과 죄수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정신적·종교적·경제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찾기 위한 일종의 성지순례로 여겨졌다. 십자군 원정은 종교의 팽창이라는 측면 못지않게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서 쫓겨난 이슬람교도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정책을 펼쳤던 제노바와 피사 같은 이탈리아 해안 도시들의 팽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베네치아 역시 알렉시우스 1세 황제 (1048/1057-1118)의 우호적인 태도 덕분에 비잔티움의 통제 아래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 에게 해의 교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팽창한 것은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였다고 할 수 있다. 에스파냐에서는 엘 시드로 불리던 로드리고 디아스(1043-1099)가 톨레도 정복(1085)에 침여했으며, 1118년에는 아라곤의 알폰소 1세 전쟁왕(약 1073- 1134, 1104년부터 왕)이 사라고사에 입성하였다. 한편, 동방에서는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후에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 이외에도 소아르메니아 왕국,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같은 봉건적인 성격의 조그만 십자군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지를 방어하기 위해 생겨났다가 그 뒤로 이교도들을 상대로 하거나 부와 영광의 기회가 주어지는 전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참가했던 종교 기사단들이 설립되었다. 12세기에는 유럽의 군주들이 참여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2차와 3차 십자군원정이 이어지게 된다. 

 

도시국가들의 자치권과 제국
유럽의 생명력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자신들만의 자치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도시국가(코무네comune: 12세기부터 13세기에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형성된 주민의 자치 공동체)라는 새로운 개념 속에도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코무네들이 일시적으로 6개월 또는 1년 동안 정부의 임무를 맡겼던 집정관과 자문 역할을 담당한 의회(대의회와 비밀의회)를 선출한 회합 또는 의회로 불렸던 시민회의의 제도적인 조직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1세기말이었다. 

코무네의 사회 계층은 유력자들(귀족들 도시로 옮겨오지 않은 영주들, 부유한 부르주아)과 시민(은행가, 대상인), 소시민(장인과 소매상인), 그리고 정치적인 권리가 없는 하층민(하인들과 임금노동자)으로 구분되었다. 각각의 사회 구성원을 위한 조합형태에 가입함으로써 빚어진 코무네 제도의 복잡한 분화는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력들, 특히 집정관들을 자신들의 대변자로 활용했던 막강한 세력들을 상대로 한 정치적인 충돌을 수반했다. 이때부터 12세기 말경까지 코무네는 집권 세력들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뽑힌 진정한 전문 정치인인 포데스타(중세 이탈리아의 행정 장관) 같은 중립적인 기구에 정치를 맡기는 경향을 보였다. 

이탈리아의 코무네는 제국 특히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약 1125-1190, 붉은 수염왕이라고도 함)에 맞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152년에 권력을 잡은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의 제3차 이탈리아원정(1163-1164) 때 일어난 베로나 국경 도시 동맹이나 4차(1166-1168)와 5 차(1174-1178) 원정 때의 롬바르디아 동맹 같은 효과적인 저항을 펼칠 수 있었던 동맹국들을 상대로 제국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탈리아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군사적인 방법 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경로, 그리고 전통적으로 그래 왔듯이 왕가들 사이의 협정을 통한 수단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1156년 베아트리스와 결혼한 뒤, 1178년에 아를에서 부르고뉴의 왕으로 즉위하였고, 1184년과 1186년사이에 여섯 번째로 이탈리아를 침략했을 때에는 밀라노와 동맹을 맺었다.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6세(1l65-1197, 1191년부터 황제)는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으며, 오트빌의 콘스탄차(1154-1198)와 혼인함으로써 이탈리아 남부의 상속권을 획득했다. 이 밖에도 프리드리히 1세는 법학과 같은 중립적이고 종교성이 배제된 학문에 바탕을 둔 자신의 정치적 계획을 뒷받침할 혁신적인 제도들도 도입하였다. 1158년 제2차 론칼리아 제국회의에서 황제가 코무네로부터 제국의 권리를 되돌려 받으려는 주장을 펼 수 있도록 해준 합당한 근거 역시 로마법과 이르네리우스의 제자들인 불가루스, 마르티누스 고시아, 우고 데 포르타 라벤나테, 야코부스 데보라지네의 법률 지식에서 찾고자 했다. 이러한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들의 중립적인 입장은 적대적인 코무네에 제국의 권리를 강제로 이행하고자 했던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강조되었으며, 1178년부터 1180년까지 황제가 자신의 제5차 이탈리아 원정 때 군사적인 지원을 거부한 하인리히 사자공(약 1130-1195)을 황제의 궁에 소속된 법정을 비롯하여 작센 왕조의 군주들 앞에서 재판에 회부했을 때에도 볼 수 있다.  

12세기는 하인리히 6세와 오트빌의 콘스탄차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 (1160~1216, 1198년부터 교황)의 즉위와 함께 끝을 맺었다. 정치적 권력에 대한 영적인 권력의 우월함을 이론화한 인노첸시오 3세는 제국의 힘이 약해지던 시기에 필리프 2세 (1165-1223, 1180년부터 왕)의 프랑스와 무지왕 존(1167~1216, 1199년부터 왕)의 잉글랜드가 다투는 상황에서 신권정치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정립하기 위한 기회를 잡았으며, 제국의 상속자가 될 프리드리히 2세(1194- 1250, 1220년부터 황제)의 후견인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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