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사회사상의 흐름》을 듣고 정리한다.
2023.12.19 📖 사회사상의 흐름(11) ━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3)
📖 사회사상의 흐름
- ❧ 마르크스
프랑스 혁명사 3부작: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Die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48 bis 1850, 1850);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 1852); ⟪프랑스 내전⟫(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 1871) - 마르크스의 견해와 토크빌의 판단은 일치하는 점들이 있다. 1848년의 경우에서의 ‘지도자들 없는 군대’와 1849년의 경우에서의 ‘군대 없는 지도자들’에 대한 것 등이 그러하다.
- 토크빌은 위기의 성격이 사회의 전체적 기초, 즉 여러 법률들의 위기임을 관찰했던 반면, 마르크스는 그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던 사회적 격변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선포. 토크빌은 정치적 자유를 존중했지만 마르크스는 그러한 형식적 자유들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그가 더 근본적인 것이라 본 것, 즉 사회혁명에 이르는 길의 장애물이라 보았다.
- 당대의 상황 전개를 파악하는 데 있어 기본적 논점을 같이 하고 있다. 전통적 군주제가 무너지고 귀족제가 타도되면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운동은 어떠한 특권이든지 공격한다. 교단이나 신분상의 불평등이 사라진 이후에는 경제적 불평등이 공격의 표적이 된다. 토크빌이 보기에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나 마르크스는 사회의 재조직을 통하여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을 감소시키거나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혁명의 여러 국면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
- 1848.2.24-1848.5.4. 군주제 타도 봉기, 임시정부에 가담한 사회주의자들이 몇 개월 동안 지배적인 영향
- 국민회의의 소집, 대다수가 보수주의자이거나 반동분자, 군주제주의자. 투쟁이 전개되어 1848.6. 폭동. 보통선거에 의해
- 선출되었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적으로 보였던 국민회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반항
- 1848.12. 루이 보나파르트의 당선, 1849.12. 국민회의 종말. 루이 보나파르트는 국민회의와 충돌, 이후 150명의 대의원을 포함한 입법의회와 충돌
- 루이 보나파르트의 대통령 당선 이후에 나타난 미묘하고 다면적인 갈등. 군주제주의자들은 의견 일치에 이를 능력은 없고 루이 보나파르트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상태, 그들은 루이 보나파르트가 가짜 군주제를 회복하려 한다고 판단하여 공화국의 옹호자가 되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회주의자들이 대중선동이라 부른 수단을 사용,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서 입법의회를 해체하고 보통선거를 재확립
- 마르크스 분석의 특징
- 사회적 하부구조로써 정치적 사건들을 설명하려 한다. 정치적 성격을 가진 투쟁은 사회의 여러 집단의 갈등이 정치적 차원에서 표현되었거나 노출된 것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회적 하부구조의 사건 사이에 엄격한 일치를 발견하려고 노력
- 토크빌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정치적 갈등을 설명하기는 하였으나 그는 정치적 질서가 갖는 특성이나 상대적 자율성을 주장
- ‘12월 10일은 현존 정부를 타도한 농민들의 쿠데타였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부자의 공화국에 대항한 농민들의 사람이었다. ‘농민 계급의 이익은 루이 보나파르트에 의해서 대표되었다.’ 그러나 농민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계급이면서 아직 계급이 아닌 상태에 있다. 그들은 하나의 단위로서 자각할 능력이 결핍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그들은 농민이 아닌 자인 루이 보나파르트를 선출하였던 것이다.
- 마르크스의 해석에 나타난 문제점
- 정통 군주제는 대지주와 전통적인 귀족계급의 체제이고, 오를레앙 왕조가 산업과 상업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들이 합의에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은 경제적 이익의 갈등때문이었는가? 이후에 두 집단의 화해를 통해서 의회주의적 공화국을 성립시킨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 지주의 이익과 산업 부르주아지의 이익이 화해될 수 없다는 생각은 사회학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 정치적 사건을 사회적 기초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는 것은 타당한 것이나 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실체적으로는 사회의 하부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항대립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사회학적 신화일 뿐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관찰한 바를 사회적 하부구조에 투사한 것
- 루이 보나파르트는 농민의 대표자였던 것은 사회계급의 구분과 관계없으며 일정한 계급 이해와도 관계없는 것이다.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에서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 부분을 읽고 있는데 오늘은 세 번째이다. 지난번에 토크빌까지 읽었다.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데 마르크스 부분은 설명이 길고 또 보충해서 해야 될 얘기들이 좀 있다. 마르크스의 프랑스 혁명사 3부작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을 묶어서 소나무 출판사에서 한권으로 나왔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따로 번역이 나온 적도 있는데 지금 절판된 상태라서 조금 구하기가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든가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과 같은 책들은 마르크스에 있어서 어떤 사회학적인 통찰을 잘 보여주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정치사회학적인 통찰 또는 정치 체제에 관한 논의는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자본》은 열심히 읽어본 적이 없다. 두 번 정도는 읽어본 것 같다. 《자본》보다는 오히려 《도이치 이데올로기》나 또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과 같은 마르크스에 있어서 변증법이 잘 드러나 보인다고 하는 그런 텍스트들을 열심히 읽었다. 그런데 이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은 꽤나 열심히 읽은 것 같다. 그래서 엄청나게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꽤나 정리를 해놓은 게 많다. 이를 제대로 하나 하나 분석해서 하는 것은 기나 긴 강의를 해야 가능할 것 같고 지금 여기서는 레이몽 아롱이 정리한 것을 제가 재정리해서 말씀드리는 정도로 하는 게 적당하지 않겠나 한다.
일단 마르크스의 견해와 토크빌의 판단은 일치하는 점들이 있다. 아롱이 보기에는 1848년의 경우에서의 '지도자들 없는 군대'와 1849년의 경우에서의 '군대 없는 지도자들'에 대한 분석들은 일치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도자들 없는 군대', '군대 없는 지도자들'이라고 얘기한 것은 상당히 탁월한 정치적인 분석이다. 제가 생각하기에 마르크스는 약간의 독단론, 아롱도 지적하고 있듯이 사회의 어떤 계급적 구조가 그대로 정치적인 체제로 반영되어 나온다 또는 사회의 계급적 구조를 정치 체제는 구현할 뿐이다 라고 하는 거의 일대일 대응에 가까운 규정론 또는 결정론적인 조건을 지운다고 하는 생각을 강하게 밀고 가지 않았더라면, 그 당시 산업사회에서의 정치 체제라고 하는 것들에 관한 아주 탁월한 분석과 저작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경제학적인 분석이 강력하다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고 싶었기 때문에 정치 체제 분석에는 많은 힘을 쏟지 않았다. 그게 마르크스로 하여금 정치학적 저작들이 좀 부실하게 만들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제5부 268 그의 두 개의 저서 《프랑스의 계급투쟁, 1848년~1850년》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무월 18일》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판단들은 토크빌의 《회고록》에서 읽을 수 있는 판단들과 부합되는 것이 많다. 토크빌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파리의 노동대중들이 며칠 동안을 지도자들 없이 홀로 싸웠던 1848년의 폭동들과, 단지 일 년 밖에 안된 1849년에 라 꽁따뉴의 의회지도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움직였으나 그들의 군대에 의해서 호응을 받지 못해 부질없는 결과가 되어버린 일과 대조해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첫번째 경우에 있어서의 지도자들 없는 군대와 두 번째 경우에 있어서의 군대 없는 지도자들의 대조를 이 두 저자들은 똑같이 강조했던 것이다.
토크빌 역시 사회의 전체적인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토크빌은 그것을 법률들의 위기로 보았다. 여기서 토크빌이 말하는 법률들의 위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법률도 해당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인 규범과 관습까지도 다 포함하는 법적 장치들 또는 규범적 장치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토크빌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유심론적인, 정신적인 것을 가지고 뭐든지 접근해 들어가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토크빌이 사회의 경제적인 기초와 같은 부분들에 대해서 무심했던 사람은 결코 아니다. 토크빌은 정치적 영역이 절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는 영역이다. 이게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아주 중요한 통찰 중에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과거의 서구 사상가들 중에서 현재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정치 체제에 대해서 통찰하는데 가장 참조할 만한 가장 참조할 만한 사상가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저는 토크빌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제가 박사학위 과정에서는 헤겔을 전공을 했는데 헤겔은 그런 점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물론 헤겔이 국가와 시민사회라고 하는 구별을 내놓은 것은 아주 중요한 업적인데 헤겔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는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장소와는 굉장히 이질적인 성격을 많이 갖고 있어서 그렇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헤겔 철학을 오늘날 되살려본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냥 헛된 망상이다. 헤겔은 헤겔로서 읽으면 끝이지 라고 생각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제5부 268 이 두 사람들은 1848년부터 1851년 간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이 단순한 정치적 동요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혁명의 예비적 징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토크빌은 이제부터의 위기의 성격은 사회의 전체적 기초 즉 모든 인간사회들이 여러 세기 동안 존중해 온 여러 법률들의 위기라는 것을 경의의 눈으로 관찰했다. 마르크스는 그가 불가피하다고 여겼던 사회적 격변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당당히 선포했다. 자유주의적 귀족이 가지는 여러 가치의 척도는 혁명가의 척도와 다른 것이었고, 어느 의미에서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그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던 사회적 격변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선포했다. 마르크스는 사실 이때 좀 굉장히 흥분했다. 그러니까 1848년에 《공산당 선언》을 엥겔스와 함께 내놓았던 것도 있던 것이다. 그리고 토크빌은 정치적 자유를 존중한다. 이건 토크빌이 가지고 있는 아주 벗어날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인데, 토크빌은 정치적 자유를 존중했지만 마르크스는 그러한 형식적 자유들, 그러니까 정치적 자유라고 하는 것은, 앞서서 말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것이 아주 핵심적인 것이라고 여겼으므로 정치적 자유를 형식적인 것으로 보았다. 형식적 자유를 왜 존중하지 않았는가 하면 이것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더 근본적인 것이라고 본 것은 사회혁명에 이르는 길, 사회혁명은 경제적인 생산관계들을 변혁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사회혁명과 정치혁명 이 두 가지를 놓고 본다면 정치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혁명이 그냥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라고 보았다. 그게 마르크스의 독단이다. 정치와 경제는, 이건 내일 말할 얘기인데, 서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들을 갖고 있다. 정치가 엉망이어도 경제가 잘 돌아갈 수도 있고, 경제가 엉망이어도 정치는 그런 대로 훌륭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정치적인 대변혁이 일어나서 경제를 확 바꿔버릴 수도 있다. 각각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영역들 그리고 상대적인 자율성,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을 보면 정치의 상대적 자율성을 통찰해내는 지점들이 있는데, 그래서 많이 좀 안타까운 지점이 있다.
당대의 상황 전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기본적인 논점은 공유하고 있다. 전통적 군주제가 무너지고 귀족제가 타도되면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운동은 당연히 어떤 특권이든지 공격을 한다. 그리고 가톨릭 교단이나 신분상의 불평등이 말살된 이후에는 경제적 불평등이 이제 중요한 이슈로 등장을 한다. 지금 한국 사회도 이제 이런 경우이다. 일종의 민주적인 국가이기는 했어도 굉장히 많은 그런 불평등이 있었고 차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점차로 사라진 다음에는 경제적 평등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원하는데, 그 경제적 평등이라고 하는 것을 이제 공정 이런 말로 표현을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점도 있다. 다른 점은 뭐냐 하면은 토크빌이 보기에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나 마르크스는 사회의 재조직을 통하여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을 감소시키거나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게 토크빌과 마르크스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제5부 269 일단 전통적 군주제가 무너지면, 과거의 귀족체제가 타도되면, 사회적 평등을 향해 노력하는 민주주의적 운동은 기존의 어떠한 특권도 공격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특권이란 부르조아지의 특권을 말하는 것이다. 교단이나 신분상의 불평등이 말살된 연 후에는 경제적 불평등이 공격의 표적이 된다.
제5부 269 토크빌이 생각할 때는 정치적 불평등에 관한 투쟁은 적어도 그의 시대에는 실패의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러 번 그는 경제적 불평등━행운의 불평등━을 인간사회의 영원한 질서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여겼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는 사회의 재조직을 통하여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을 감소시키거나 말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혁명의 여러 국면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보면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에서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대통령 당선 이후에 나타난 미묘하고 다면적인 갈등들을 굉장히 정교하게 분석을 한다. 제가 이 부분을 보고서 정치적인 상황 분석은 이런 식으로 해야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전형적이고도 모범적인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일단 이 분석이 오늘날 보나파르트주의라고 불리는 것의 토대가 된다. 보나파르트주의라는 건 겉으로는 민주정의 형식을 띠면서 보통 선거를 통해서 집권을 한다. 집권을 하게 되면 토크빌도 걱정했던 거와 같은 상황, 즉 아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굉장히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정통성을 확보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각각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제정despotism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그게 바로 토크빌이 가장 걱정했던 것이다. 바로 그 지점, 전제정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대중 독재로까지 빠져들어간다는 것, 그게 바로 보나파르트주의이다. 포퓰리즘적인 대중 선동을 통해서 보통 선거라고 하는 합법적인 장치를 통해서 집권을 한 정권이 결국에는 독재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나파르트주의 라고 이야기한다. 루이 나폴레옹을 보면 나중에는 황제가 된다. 그게 바로 보나파르트주의가 보여주는 아주 전형적인 경과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세의 그것도 보나파르트주의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해당하지 않고, 나폴레옹 3세가 되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노선을 가지고 말할 때 보나파르트주의 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것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도 좋은 분석이 바로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나와 있다.
제5부 270 루이 보나파르트가 피신되자 미묘하고 다면적인 갈등이 생겨났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군주제주의자들은, 군주의 정체와 또는 군주제 자체의 회복에 관한 의견 일치에 도달할 능력이 없는 채, 루이 보나파르트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을 통하여, 가짜 군주제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또 하나의 보나파르트에 대항하여 공화국의 옹호자가 되었던 것이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회주의자들이 대중에 대한 선동이라고 불렀던 수단을 어느 정도까지 사용했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전략에는 20세기의 파시스트와 나찌 당원들이 보인 의사사회주의의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입법의회가 보통 선거권을 폐지하는 과오를 범했기 때문에 무월 18일의 쿠데타에서 루이 보나파르트는 헌법에 위배하여 입법의회를 해체하고 동시에 보통 선거를 재확립했던 것이다.
아롱의 설명을 보면 군주제주의자들은 의견 일치에 이를 능력은 없고 루이 보나파르트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서로 원하는 바가 달라서 의견 일치에 이를 능력은 없다. 그런데 루이 보나파르트는 공동의 적이다. 전통적인 왕당파의 눈으로 보기에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가짜 군주정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군주정 지지자들인 왕당파는 루이 보나파르트를 패퇴시키기 위해서 공화국을 옹호하게 된다. 그러자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회주의자들이 대중 선동이라고 부른 수단을 사용해서, 간단히 말해서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낸다. 특히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다. 이 부분은 중요한 부분이다.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는데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후대의 나치당에서 사용한 수법과 유사한 것이 이미 전조처럼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서 입법의회를 해체하고 보통선거를 재확립한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만 보기에는 이 사람은 제도적인 장치들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대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루이 보나파르트, 즉 보나파르트주의의 구체적인 과정이다. 방금 말한 것처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는 마르크스의 분석이 가지고 있는 탁월함을 아주 잘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정치 체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읽어보는 게 괜찮을 것 같다.
마르크스가 이런 분석에서 보여준 특징은 사회적 하부 구조를 가지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그것이 핵심적이고 독립 변수이다, 정치적 사건들을 설명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까 정치적 사건은 종속 변수가 된다. 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회적 하부구조의 사건 사이에 엄격한 일치를 발견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이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토크빌은 이런 설명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질서가 갖는 특성이나 상대적 자율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정치적 질서가 갖는 특성이나 상대적 자율성, 마르크스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그다음에 "12월 10일은 현존 정부를 타도한 농민들의 쿠데타였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분석이다. 그런데 아롱이 보기에 루이 보나파르트는 농민 계급은 아니다. 그런데 농민계급의 이익은 루이 보나파르트에 의해서 대표되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농민을 분석하기를 아직 자기 스스로가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각할 능력이 안 되어 있다. 그러니까 농민이 아닌 자, 농민 계급에 속하지 않는 자인 루이 보나파르트를 선출했다는 것이다. 계급적인 이해관계가 모든 정치적 질서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질서라고 하는 것은 계급적 이해관계가 관찰되는 경제적 영역뿐만 아니라 도덕적 관습적인 또는 심지어 유토피아적 전망 이런 것들까지도 정치적 질서 안에는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적 질서는 경제적 계급관계를 일부 포함하고 있지만 경제적 계급관계 이상의 것이다.
제5부 271 토크빌과 마르크스 간의 합의점을 연두에 두고서 마르크스의 분석이 갖는 특정한 여러 특징을 알아보자. 나는 그 중심적 사상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마르크스는 사회적 하부구조라고 부를 만 한것으로써 정치적 사건들을 설명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가진 투쟁이란 말하자면 사회적 제 집단의 갈등이 저변에 깔려 있어 그것이 정치적 차원에서 표현되었거나 노출된 것에 불과함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토크빌도 같은 분석을 하였음은 아주 분명하다. 그도 역시 19세기 중엽의 프랑스에 있어 사회적 제 집단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사회적 제 갈등의 관점에서 정치적 제 갈등을 설명하기는 하였으나 그는 정치적 질서가 갖는 특성 내지 적어도 상대적 자율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해석에 나타난 문제점을 보면 정통 군주제는 대지주와 전통적인 귀족계급의 체제이고, 오를레앙 왕조가 산업과 상업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들이 합의에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은 경제적 이익의 갈등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나중에는 두 집단이 화해를 통해서 의회주의적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그러니까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들도 정치적으로는 서로 화해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 아롱이 여기서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 두 집단이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은 사회학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사건을 사회적 기초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는 것은 상당 부분 타당한 논의이다. 이것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이 실체적으로는 사회의 하부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라는 관점을 가지고 정치와 경제가 이항대립의 설명처럼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사회학적 신화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레이몽 아롱이 1960년대에 프랑스 제5공화국을 분석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던 것이다. 이것을 놓쳐버리면 항상 되풀이되는 그런 선명한 좌파의 발버둥 그리고 결국에는 죽쒀서 개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5부 272 명백히 비마르크스주의자까지도 농민들이 루이 보나파르트를 선출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루이 보나파르트가 농민들에게 당선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까지 그들의 계급 이익의 대변자가 되었던가 하는 것이다. 농민들은 그들의 계급이익을 구현하기 위하여 루이 보나파르트를 선출할 필연적 조건에 놓인 것은 결코 아니었고 루이 보나파르트가 취한 모든 시책이 필연적 으로 농민들의 계급이익과 일치한 것은 아닌 것이다. 황제는 오직 그의 천재성 또는 그의 우둔성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였을 따름이다.
제5부 276 왜냐하면 지주의 이익과 산업 부르조아지의 이익이 화해될 수 없다는 생각은 오직 사회학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행운을 계기로 두 군주 중의 하나가 후손을 갖지 못 하는 날에 두 왕위 요구자 간의 화해는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법이며 지주와 산업가의 이익이 기적적으로 타협을 이룩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루이 보나파르트가 농민의 대표자였다 라는 것은 농민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를 루이 보나파르트에 투사한 것이고, 농민들이 허위의식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그건 농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정치적인 욕구와 지향성을 보나파르트가 거짓 선동을 통해서 충족을 시켰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농민들은 농민의 당을 만들어야 되는가, 농민의 당을 만들려면 뭔가 노력을 할 필요는 있겠다. 그런데 그게 반드시 경제적인 논리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유념해 둘 필요가 있겠다. 내일 마르크스 부분을 마저 읽겠다.
제5부 276 많은 정치적 사건을 그 사회적 기초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는 것은 타당한 것이나, 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사회의 하부구조 속에 서 일어난다고 가상되는 것의 관점에서 항(項) 대항의 설명을 가한다는 것은 주로 사회학적인 신화일 뿐이다. 우리는 정치적 차원에서 관찰한 바를 사회적 하부구조에 투사하는 것이다. 두 왕위 요구자가 합의할 수 없다는 것을 관찰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주가 사업가와 합의할 수 없다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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