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사회사상의 흐름》을 듣고 정리한다.
2023.12.18 📖 사회사상의 흐름(10) ━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2)
📖 사회사상의 흐름
❧ 토크빌
- 토크빌이 중시한 것(또는 콩트와의 차이점). 대의제와 군주제의 결합, 행정적 지방분권화, 헌법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구상들
- 토크빌의 사회적 지위 또는 그가 처한 상황. 자신의 출신지인 망슈Manche 입법회의의 대의원. 1848년 혁명에서 2공화국 헌법을 기초하는 위원.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통령의 오딜롱 바로Odilon Barrot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여 5개월 근무(1849.11. 초에 공화국 대통령이 외무부 폐지), 이 때의 토크빌은 정통군주제나 오를레앙 군주제를 희망하였으나 그것의 실현가능성이 없으므로 보수적 공화당으로 탈바꿈했던 왕당파, ‘가짜 군주제’라 부른 루이 보나파르트 제국에 대한 적대감. 체제가 위기에 처할 것을 예견
- 토크빌의 견해.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 혁명들이 힘을 잡으면 종교, 관습, 법률에 의해 견제되는 균형 있고 조정된 자유의 존속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장-자크 앙페르Jean-Jacques Ampère[앙드레마리 앙페르André-Marie Ampère의 아들]와의 의견 교환, 앙페르는 혁명이 이상에 부합된다고 주장하면서 번영의 전망과 공화국에 대한 희망
- 혁명의 원인들에 관한 설명
- 일반적 원인들에서 발생하였고, 우발적 사건으로써 완성. 토크빌 역사사회학의 특징,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필연성도 아니며 그렇다고 일련의 우발적 사고만도 아니라는 견해
- 일반적 원인 분석. 산업혁명이 노동자들에게 파고들고, 민주주의의 질투의 병, 인간의 불행은 악법의 소치이지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은 아니라는 생각, 가난은 사회의 여러 조건을 변경시킴으로써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 중앙집권화, 60년이 못 된 동안 발생한 사회의 동요
- 우발적 원인. 군주제에 반항하는 자들의 정열이 개혁을 제안하면서 폭동을 일으켰던 일, 폭동의 탄압, 권력의 끈들이 끊어진 뒤 새로운 재상들이 그 끈들을 움켜잡거나 재결합시키지 못했던 것
- “일반적으로 한 체제는 아무도 그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하여 싸우기를 원하지 않게 될 때 붕괴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 역사를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 일반적인 원인과 제2차적인 원인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역사의 거미줄을 이루는 결합된 요인들을 발견하는 것
- 사회주의적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 유리한 상황을 잘 이용하는 방도를 몰랐다. 혁명의 게임을 할 것인지 또는 입헌정치체제의 게임을 할 것인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들의 군대를 버렸고, 그에따라 파리의 노동자들은 지도자 없이 홀로 싸웠다.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 10번째이다. 오늘은 1848년의 혁명을 둘러싼 사회학자들, 콩트와 토크빌, 마르크스 이 세 사람의 견해를 살펴보는 제5부에서 토크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다. 사실 중요한 부분이다. 콩트는 산업사회 그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핵심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까닭에 정치 체제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나 이런 것에는 힘을 쓰지 않았다. 레이몽 아롱은 역사사회학자로만 얘기를 하는데 토크빌은 사실상 정치 체제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으로는 굉장히 탁월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고, 이 사람이 비록 19세기의 사회학 또는 19세기의 정치사상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살았던 시대 속에서 굉장히 강력한 민주정의 초창기 아메리카 그리고 지난번에 레이몽아롱이 그 지적을 했듯이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에 있어서 이 시기는 주요한 적대자들과 경합자들의 20세기적 유형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즉 선례가 된다. 그리고 그런 선례가 되는 시기에 대한 토크빌의 분석이 굉장히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난 시간에 얘기했듯이 프랑스 2월 혁명이라든가 1848년 혁명 이런 것에 대한 마르크스의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은 많이 읽히는데 토크빌은 별로 안 읽히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과 같은 토크빌의 책들은 사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도 중요하지만 사회학자들과 1848년 혁명에서 우리가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토크빌의 견해를 좀 유심히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도 이걸 보면서 새삼스럽게 토크별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이건 다음 시간에 말하려는데, 이 책을 처음 사서 읽을 때는 정말 몰랐겠지만 뜻밖에도 《사회사상의 흐름》에 엘리 알레비 얘기가 나온다. 지금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 부분을 정리하면서 마르크스 얘기까지 다 하고 그다음에 결론을 내려가는 부분에서 "몇 마디로써 결론을 맺어보고자 한다"고 하면서 정치사회학의 프랑스 학풍의 창시자가 몽테스키외이고, 그를 이어받은 위대한 인물이 토크빌이고, 그다음에 엘리 알레비 같은 사람도 오늘날 이 전통에 속한다 하면서 각주로 《철학적 급진주의 형성》을 거론해 놨다. 책이라고 하는 게, 거의 한 40년 후에 이렇게 다시 촘촘하게 읽어보는 그런 책에서 요즘 열심히 통독하고 있는 엘리 알레비를 이렇게 만난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정말 굉장히 흥겨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게 하나의 발견의 기쁨이겠다.
제5부 280 몇 마디로써 결론을 맺어보고자 한다. 이제까지 고찰한 네 명의 저자들은 세 가지 운동 또는 학풍의 기초를 이룬다. 첫째는 정치사회학의 프랑스 학풍이라고나 부를 수 있는 것인데 그 창시자는 몽테스키외요 그를 이어받은 위대한 인물은 토크빌이다. 엘리 알레비와 같은 사람도 오늘날 이 전통에 속한다. 이 전통에 속한 사회학자들은 독단적인 것이 별로 없고 정치에 관해 본질적 관심을 가지 고 있으며 사회의 하부구조를 무시하지는 아니하나 정치 질서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또한 자유주의자들이다.
토크빌과 콩트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토크빌은 한마디로 말해서 콩트가 가볍게 여기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들을 토크빌은 중요하게 여겼다. 아주 극명하게 서로 대조되는 그런 지점이 있다. 우선 토크빌은 대의제도와 군주제를 결합시키길 원했던 부르주아 개혁주의자들의 실패를 유감으로 여겼다. 토크빌은 분명히 부르주아 개혁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군주제와 대의제의 결합을 원했다. 토크빌은 7월 왕정을 굉장히 혐오했는데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토크빌은 보수파, 왕당파였다. 자신이 왕당파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이미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왕당파는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토크빌은 이게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더 이상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보려는 생각은 안 했던 것이다. 그냥 그것을 마음속에 품고는 있는데 부르주아들과 힘을 합해서 뭔가를 해봐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는 이 사람이 자유주의자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일단 대의제와 군주제를 결합시키는 군주정, 대의제와 군주정을 결합시키길 원했다. 그다음에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에서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토크빌은 중앙집권적 국가라고 하는 것이 민주정에서 이루어지게 되면 곧바로 전제주의로 간다 하는 것을 굉장히 강력하게 주장을 한다. 그래서 행정적 지방분권화가 굉장히 중요하다 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행정적 지방분권화는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지방 지방자치제도겠다. 지방자치제도가 좋은 점도 있고 안 좋은 점도 있는데 어쨌든 토크빌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중앙집권화라고 하는 것이 곧바로 전제주의로 가는 어떤 지름길이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잘 견제되고 균형 잡힌 개인의 자유라고 하는 것이 보장되기 어렵다. 그러니까 자율적 결사체 또는 자율적 사회체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에서는 행정의 지방분권화가 토크빌이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는 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다음에 토크빌은 콩트가 신중한 연구를 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몇 마디 글로 걷어치워버린 헌법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구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 역시 토크빌은 이념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도 분명하게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제5부 259 우리는 토크빌의 일반적 태도로 미루어보아, 콩트가 일탈적인 것으로 서술하였던 바로 그것을 프랑스 혁명의 위대한 프로젝트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국민회의의 실패 즉 대의제도와 군주제를 결합시키기를 원했던 부르조아 개혁주의자들의 실패를 유감으로 여겼다. 나아가 우리는 콩트가 사회학자로서의 최상의 권위를 가지고 경멸하였던 행정적 지방분권화 바로 그것을 토크빌이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또한 토크빌이 콩트가 심중한 연구를 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몇 마디의 글로 걷어치워버린 헌법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구상들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에 1848년의 혁명에 관한 더 특정적 사항에 관해 검토해 보자.
앞서서도 얘기했듯이 토크빌은 귀족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막막한 마음으로 막연하게 그것을 들여다 본 것이 아니라 루이 필리프 통치하에 있던 입법회의의 대의원이었다. 이게 심각한 상황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역사 연대를 보면 루이 필리프 시대가 7월 왕정이다. 7월 왕정 시기에 토크빌은 망슈Manche 입법회의의 대의원이었다. 그때 그걸 이 사람은 굉장히 혐오했다.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났고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당선이 되었다. 그때 제2공화국 헌법을 기초하였는데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가 바로 오딜롱 바로의 내각이었고, 그 내각의 외무부 장관이었다. 정말 현실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루이 보나파르트가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때인 1949년 11월 초에 외무부를 없앴다. 그리고 나서 한 달쯤 있다가 이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제2제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토크빌은 이것을 가짜 군주제라고 부르게 되고 보나파르트 제국이라고 하는 게 결국 자유의 존속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라고 보았던 것이고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테면 오늘날 이걸 보나파르트주의라고 부르는데, 보나파르트주의가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토크빌은 예견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은 그 당시에는 충분히 있었던, 토크빌 시대에는 제정신인 사람은 충분히 다 예견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레이몽 아롱이 그런 얘기를 한다. 토크빌의 친구가 장-자크 앙페르인데, 앙드레마리 앙페르의 아들이다. 장-자크 앙페르와 의견을 교환하는 얘기를 자기의 회고록에 적어둔다. 앙페르 같은 사람은 문헌학자였고 그 혁명에 열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레이몽 아롱은 이렇게 쓴다. "프랑스의 교과서들에서도 앙페르와 같은 그런 열성이 토크빌의 우울한 회의주의보다도 더 잘 부각돼 있다." 그러니까 사실 프랑스 인텔리겐차들은 혁명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토크빌처럼 최종적 결과에 대한 회의주의가 있다. 혁명을 해서 잘 된 꼴을 못 봤기 때문에 토크빌 같은 사람들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몽 아롱을 읽어보면 아마 엘리 엘레비도 그런 부류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엘리 알레비가 《철학적 급진주의 형성》을 쓴 이유도 그런 것이다. 프랑스는 왜 이렇게 안 되는 걸까, 잘 나가고 있는 영국에게 있어서 뭔가 좀 배워보자 하는 것이 엘리 알레비의 저작 의도이다.
제5부 259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토크빌의 사회적 지위가 콩트와는 전적으로 달랐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5부 260 1848년이라는 똑같은 시기에 프랑스 귀족의 명문출신인 토크빌은 라망슈 La Manche 출신으로서, 루이 필립의 통치하에 있었던 입법회의의 대의원이었다.
제5부 260 1849년 5월 루이 보나파르트(후에 나폴레옹 3세가 되었음)가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 토크빌은 오딜롱 바로 Odilon Barrot의 재구성된 내각의 외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였다. 그는 외무부 장관직에 5개월간 근무하였는데 1849년 11월 초에 공화국 대통령 루이 보나파르트가 외무부를 폐지하였던 것이다.
제5부 260 이 시기의 토크빌은, 정통군주제 또는 오를레앙 군주제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므로 보수적 공화당으로 탈바꿈했던 왕당파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가 <가짜군주제 bastard monarchy>라고 불렸던 것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체제가 앞으로 곧 위기에 처할 것임을 토크빌은 예견하였던 것이다. 이 가짜 군주제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제국이었으며 그것은 조금만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프랑스 국민들의 절대다수가 카베냑 Cavaignac(공화파 장군이며 부르조아 질서의 옹호자)에게가 아닌, 오직 그 이름과 그의 숙부의 명성과 몇 가지 우스꽝스러운 탈선적 행위 이외에는 인기를 얻을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었던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투표했던 날부터 이미 예견한 바였던 것이다.
제5부 262 토크빌이 몇 년 후의 저술에서 1848년의 혁명이 불행한 사건이었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하고 있었음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달리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1848년의 혁명이 가져다준 끝장은 반(半) 정통적 자유주의적 온건한 왕제를, 콩트의 말로는 일시적 독재자, 또는 토크빌의 말로는 가짜 군주제, 그리고 더 널리 알려진 바의 권위주의적 제국으로 대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루이 보나파르트의 체제는 루이 필립과 그의 후계자의 체제보다 우월하였다고 믿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는 개인적 기호로 채색된 가치 판단을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에 있어서까지도 프랑스의 역사 교과서들 속에서 앙페르의 열성이 토크빌의 우울한 회의주의보다 더 잘부각되어져 있는 터이다. 프랑스의 인텔리겐차의 두 가지 특징적 태도들, 즉 혁명적 열성 (그 결과가 무엇이든지 간에)과 그러한 격동의 최종적 결과에 관한 회의주의, 이 두 태도들이 오늘날도 존속하고 있 으며 아마 다음 세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까지는 조금 자잘한 얘기이고 상투적인 얘기일 수도 있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지금부터 하는 얘기이다. 토크빌의 역사사회학에서 혁명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 토크빌의 목표이다. 혁명의 역사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고 하면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일반적인 원인과 제2차적인 원인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역사의 거미줄을 이루는 결합된 요인들을 발견하는 것, 말하자면 역사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할 때의 그런 방법이 되겠다. 그게 중요하다. 여기서 일반적인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것을 말하는 것일테고, 우발적인 원인은 그것들을 촉발시킨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반드시 일반적인 원인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그러니까 그런 구조적인 장치들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역사의 변곡점을 기록하는 것도 아니다. 우발적인 원인이 그것들을 불 붙여야 된다. 그리고 우발적인 원인들만 쭉 이어붙인다고 해서 역사의 변곡점이 계속해서 마련되고 이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오늘 토크빌에 관해서 읽는 부분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혁명의 원인들에 관한 설명이다.
제5부 265 역사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렇게 밖에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인과 제2차적인 원인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이를테면 역사의 거미줄을 이루는 그 결합된 요인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1848년의 혁명에 관해서는 토크빌은 그것이 시초에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이었음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임시정부의 사회주의적 멤버들을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토크빌이 보기에는 혁명의 원인들은 이런 것들이다. 우선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산업혁명의 여러 가지 성과라든가 또는 산업혁명의 안 좋은 지점들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노동자들에게 파고들고, 그에따라 산업혁명에 의해서 생겨난 여러 가지 것들에 의해서 노동자들이 불만을 갖게 된다. 그다음에 토크빌 회고록에서 나온 얘기들, 민주주의의 질투의 병, 누구나 다 평등한 조건을 가졌기 때문에, 신분질서 사회에 있던 시절에는 체념할 만한 것들을 이제 체념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원하게 되었다는 것, 그런 것들이 이제 중요한 지점이고, 그다음에 인간의 불행은 악법의 소치이지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은 아니라는 생각, 이게 굉장히 중요한 근대적 생각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이익의 인위적 일치라고 하는 입법자의 노력을 요구하는 지점이 된다. 그에 따라서 가난은 사회의 여러 조건들을 변경시킴으로써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이념적인 측면, 인간의 심성 구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사람들의 의식이 이렇게 변하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하고 다르게 토크빌은 멘탈리티에 관한 점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관습이라든가 종교, 법률들에 의해서 인간의 삶과 공동체가 여러 가지로 바뀐다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게 토크빌의 견해에서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 멘탈리티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다는 것. 그다음에 중앙집권화라든가 60년이 못 된 동안 발생한 사회의 동요라든가 이런 것들은 이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중요한 좀 큰 흐름을 가진, 폭이 넓은 그런 사태들이다.
그다음에 군주제에 반항하는 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그런 폭동을 탄압하고 폭동 과정에서 권력의 끈들이 끊어지고 새로운 재상들이 그것을 움켜 잡거나 재결합시키지 못했던 것을 얘기를 해놓고 레이몽 아롱은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나 한다. "일반적으로 한 체제는 아무도 그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하여 싸우기를 원하지 않게 될 때 붕괴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체제로부터 자기가 뭔가를, 하다못해 자부심이라도 얻을 수 있어야, 그 체제에 대해서 집착하고 유지하고 지키려고 싸우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으로부터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때는 손 놓고 떠나는 것이다. 알버트 허시먼은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에서 그 미묘한 인계점들을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들이 중요한 것이다. 단순한 열정만 가지고는 안 된다. 내가 여기다 열정을 쏟아부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을 위해서 싸우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항상 고민을 해야 되는 것, 이게 바로 역사사회학자들 또는 정치학자들의 가장 최우선적인 고민이다.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하는 것, 로열티냐 엑시트냐 이런 것들이다.
제5부 264 프랑스에 있어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이러한 경멸감은 하나의 풍토병적 현상으로서 모든 체제의 종말에 있어서 그것이 발생하며 많은 프랑스 혁명들이 갖는 비교 적 무혈적 성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한 체제는 아무도 그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하여 싸우기를 원하지 않게 될 때 붕괴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1848년 이후 110년 만에 훨씬 더 발전된 형태로 이러한 종류의 현상이 발생하였음을 경험한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프랑스를 지배한 여러 정치계급들은 때때로 경멸을 받게 되고 그 경멸이 일반화됨으로써 스스로 방어해야 할 가장 많은 이유를 가진 바로 그 사람들을 마비시키게 된다.
일반적인 원인, 구조적인 원인들이 2차적인 원인과 서로 엮여서 결합을 시켜가는 그런 요인들을 발견하는 것이 토크빌이 행했던 중요한 지점이다. 사회주의적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그리고 교훈을 줄 만한 그런 부분인데 "유리한 상황을 잘 이용하는 방도를 몰랐다." 방도라는 게 술책이다. 술책이 없는 정치가들은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그들은 혁명의 게임을 할 것인지 또는 입헌정치체제의 게임을 할 것인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끝까지 밀고 가서 레디컬하게 자기네들의 대의를 구현하는 제도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일정 정도 타협을 하고 입헌정으로 갈 것인지를 결단을 내렸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들의 군대를 버렸다. 파리코뮌 시대에 일어난 일들도 바로 이런 일들이었다. 노동자들은 지도자 없이 홀로 싸웠다는 것이다. 중국 전국시대 법가가 아주 이런 부분에 능한 통찰력을 보인다. 법가는 중요한 것을 순서대로 말하면 세력이 있어야 하고, 그 세력에 따라서 정치적인 권력을 쥐게 되면 법으로 만들어서 제도화시켜야 되고 여기서 勢·法·術을 얘기한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제도화를 얘기한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술책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법가는 항상 세 가지를 얘기한다. 勢와 法과 術, 이 세 가지를 떠올릴 수도 있는 부분이다. 오늘 토크빌를 정리했고 다음에는 마르크스 부분 정리하겠다.
제5부 265 사실상━이건 토크빌이 마르크스와 의견을 같이 하는 또 하나의 논점인데━1848년 혁명의 사회주의적 지도자들은 2월과 5월 사이에 향유했던 유리한 상황을 잘 이용하는 방도를 몰랐던 것이다. 국민회의의 모임 때부터 그들은 혁명의 게임을 할 것인지 또는 입헌정치체 제의 게임을 할 것인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자기들의 군대를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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