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회사상의 흐름(6) ━ 마르크스(3)

 

2023.11.29 📖 사회사상의 흐름(6) ━ 마르크스(3)

📖 사회사상의 흐름

❧ 마르크스

- 마르크스의 사상과 그 연원들의 관계
도이치 고전 철학, 영국의 정치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 등이 마르크스의 사상과 관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원천들에 관한 해석이 다양한만큼 관계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고 제각각 

자본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의 생각 또한 사회학적 원천과 철학적 이론이 경제학적 분석과 결합되어 있어서 혁명의 전개과정에 대한 일관성있는 해석을 내놓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다. 

마르크스가 궁극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가 된다고 하는 것, 자신의 활동이나 산물 속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는, 헤겔철학에서 제시된 ‘소외’(Entfremdung)라는 상태인데 이는 생산수단의 사유화나 시장의 무정부 상태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닌 사회 전체의 여러 요소들에 관련된 것이므로 그 상태의 해소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분석과 폐기를 예언하는 것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다. 

- 역사주의의 문제 
마르크스는 경제적 분석을 통해서 객관적 법칙을 도출함으로써 그 법칙이 세계를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이후의 역사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으나 그러한 법칙이 세계 전체를 포괄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분석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정신적 차원에 속하는 도덕적 결단과 관련되는 것 

- 사회학적 개념들의 문제 
생산력, 생산관계, 계급투쟁, 계급의식, 토대/상부구조 등을 이용한 자본주의 분석은 유용한 측면이 있지만 이것이 결정론으로 나아가는 것을 불가해하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있어야 성립하는데 이는 경제적 맥락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기능과 작용에 관한 분석은 처음부터 경제외적 현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처음과 끝에는 결국 정치적 질서가 개입된다. 

-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의 관계 문제 
국가의 소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그것은 상징적 의미밖에 없다. 실제로 소멸되는 것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일 뿐이다. 

생산수단의 사유가 소멸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의 조건이 국가의 결정에 의존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도 소멸한다해서 대립없는 사회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질서가 정치적 질서를 온전히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 학파들 
역사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는 수정주의 위기, 볼쉐비즘 위기 등이 있었는데, 그러한 위기를 거치면서 ‘정통’은 새롭게 세워졌다. 오늘날[1960년대]에는 마르크스에 대한 볼쉐비키형과 스칸디나비아-영국형 해석 사이의 정통 다툼이 있다.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에서 마르크스 관련 부분을 읽고 있는데 오늘은 세 번째로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겠다. 마르크스의 사상과 그 연원들의 관계는 마르크스에 관한 구체적인 사상 내용들을 살펴보는 게 아니라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포괄적인 이해가 되겠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대개 3대 요소 원천이 있다고 얘기들을 한다. 도이치 고전 철학은 헤겔철학을 가리킨다. 여기에 고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해서 독일에서 서기 전부터 무슨 사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가 번역한 《경제학 철학 수고》와 《공산당 선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은 사실 사회학적이 아니라 철학에 관련된 부분이다. 레이몽 아롱의 《공산당 선언》을 분석하면서 월요일에 말했듯이 《공산당 선언》은 사회에 관한 일반이론을 가지고 있다. 일반이론이라고 하는 건 universal theory이다. universal theory는 구체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사회에 관한 일반이론, 즉 역사에 관한 유물론적 이해, 역사적 유물론을 담고 있는 것이고, 그것에 근거해서 자본주의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다음에 그 자본주의 사회의 파생물로서 작동하고 있는 정치적 활동, 그리고 그 활동에 의해서 세워지는 부르주아의 위원회로서의 국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공산당 선언》이라고 하는 텍스트 자체는 다시 말해서 일반 이론이니까 철학책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 철학 수고》은 말할 필요도 없이 철학책이다. 철학책의 내용을 갖고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자본》에는 이제 경제학적인 분석이 있지만 철학적인 이야기들이 밑에 깔려 있어서 이해를 정확하게 못하게 하는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를 해놓았다. 

제3부 150 자본중의 사회 및 사회 일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은 사회학적이지만 이 사회학이 하나의 철학과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철학이 사회학에 대해서는 갖는 관계로부터 많은 해석적 곤란성이 야기되는 것이다. 

 

도이치 고전 철학, 영국의 정치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 등이 마르크스의 사상과 관계가 있다고는 했는데, 일단 도이치 고전 철학의 내용이 정확하게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이 되었는가, 그다음에 영국 정치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고, 그것들 각각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고 또 그것이 도이치 고전 철학의 어떤 측면이 연결되었는가 이것도 규명해내는 게 그렇게 쉽지 않다. 이 연원을 알고 있다고 해서, 즉 도이치 고전 철학이나 영국의 정치경제학이나 프랑스 사회주의 이런 것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마르크스를 잘 이해할 수 있는가는 사실 그건 아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다. 두 번째로 자본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의 생각 역시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사회학적인 원천과 철학적 이론이, 보편 이론의 측면을 갖고 있는 이런 부분들이, 사회과학적인 의미에서의 경제학적 분석과 결합이 되어 있고 그러니까 혁명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 일관성 있는 해석을 내놓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사회 혁명이 되었건 정치혁명이 되었건 사실은 굉장히 복합적이다. 크레인 브린튼의 《혁명의 해부》와 같은 책을 보거나 베링턴 무어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테다 스코치폴의 《국가와 사회혁명》과 같은 책을 봐도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혁명의 원천은 열정이니까 그렇게 어려움이 있다. 통일성 있는 이론을 한 방에 딱 제시하면 좋은데 그게 가능하지 않은 게 세상사이다. 학문도 마찬가지고 한 방에 끝장을 내보려고 하는 그런 학문은 사실 무의미한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궁극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여기서 궁극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의 철학적인 근거는 바로 헤겔 철학에서 제시된 소외라는 개념이다. 마르크스도 여러 가지 단어를 쓰고 있고 헤겔도 여러 가지 단어를 쓰고 있는데 결정적으로는 Entfremdung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활동을 하거나 또는 어떤 생산물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에서 '야 이거 내가 만든 것 같지 않아, 내가 이것에 주도권을 쥐고 있지 않아'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또는 그런 상태에 처했을 때를 소외라고 하는데, 생산 수단의 사유화 그러니까 부르주아가 이것을 소유하고 있는데, 내가 생산수단의 일부가 되어서 일을 하고 있거나 또는 시장이 정말 제대로 된 대가를 주지 않고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를 낯설게 느낀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고도의 정신적인 상태이다. 사회 전체의 여러 요소들이 관련된 것이니까 그것을 해결하려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분석해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폐기하면 되는가, 그것만은 아니다. 정말 심하게 예를 들면 그 누구도 비길 바 없이 굉장히 강력한 부르주아도 소외를 느낄 수는 있다. 실존적인 소외가 있는 것이다. 장 이폴리트가 마르크스의 소외론을 분석한 것을 보면 그런 부분들을 얘기들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분석과 폐기를 예언하는 것만으로는, 생산 양식을 분석한 다음에 그래서 이것은 폐기될 것이다 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만으로는 소외 상태라고 하는 것을 해소할 수는 없다. 연원과 관련해서는 헤겔 철학에서 제시된 Entfremdung 개념인데 여기에 좀 거창한 표현으로 제시된 게 《경제학 철학 수고》 뒤에 보면 정신현상학에 관한 코멘트이다. 예전에 읽어볼 때는 굉장히 멋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막 쓴 것 같기도 하다. 

제3부 159 Entfremdung 은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가 되어 버리는 활동, 또는 과정이다. 그 의미는 어떤 일정한 상태나 어떤 일정한 사회에 있어서 인간에게 부과된 조건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가 되게 하고 자기의 활동이나 또는 자기의 생산물 속에 더이상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역사주의의 문제가 있다. 경제적 분석을 통해서 객관적 법칙을 도출해내면, 그것을 이제 경제적 분석이라고 하는데, 그게 역사적 유물론이다. 법칙만 있으면 세계를 가져다가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라는 것이다. 세계가 개념적으로 파악이 되니까 바로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판단했는데 이건 정말 단순한 생각이다. 객관적 법칙 하나를 가지고 세계를 포괄해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이몽 아롱이 힘주어서 얘기하는 부분이 자본주의 분석에서 사회주의로 나가는 것은, 자본주의를 분석해서 그다음에 이것을 딱 이렇게 깨뜨리면 사회주의로 나가는가, 안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말고 또 다른 자본주의로 갈 수도 있고 아예 원시 농업사회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회주의로 나가는 것은 필연성이 아니라 도덕적 결단과 관련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를 싹 깨부수어 엎어버리고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모든 사람들이 농업을 짓는 유유자적한 사회로 가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결국엔 그것도 헛된 꿈으로 끝났지만 예전에 중국의 문화대혁명 그런 것들이다.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하방을 시키고 이상한 짓들 많이 했다. 사실은 마오쩌둥이 중국 사회에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런 헛짓거리를 한 건데, 자본주의적인 병폐가 중화인민공화국에 스며들었으니 지식분자들 하방하고 노동을 해서 뭔가를 고쳐야 된다 그렇게 하는 것. 그러면 그 사람은 사회주의자 아니라 농업주의자이다. 그런 것은 정신적 차원에서 하는 도덕적 결단과 관련된 것이지 무슨 법칙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다. 

제3부 165 칸트학도들은 우리가 사실에서부터 가치로, 현실의 판단으로부터 도덕적 명령으로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가 발생하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으로서는 우리는 사회주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그대로 분석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옹호한다는 것은 정신적 차원에 속한 결단인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생산력, 생산관계, 계급투쟁, 계급의식, 토대/상부구조 이런 것들은 사회학의 개념이다. 그것을 가지고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것은 쓸모는 있다. 그런데 그것은 분석에서 그쳐야 되지 뭔가 앞날을 결정한다고 하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즉 유력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들은 추출해낼 수 있는데 그것이 determination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아롱이 마르크스의 텍스트 자체를 당시의 경제학적 결정론을 토대로 해서 읽지 않았나 하는 점도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결정론을 얘기한 적은 없다는 것이 대체로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를 읽은 다음에 해석인데 레이몽 아롱은 마르크스를 결정론으로 본다. 

제3부 170 자본주의와 역사에 관한 마르크스의 철학은 생산력의 발전, 생산 관계의 변화, 계급투쟁의 격화 및 혁명에로의 행진 사이에 일종의 평행선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독단적 사상은 결정적 요인이 생산력이며 생산력의 발전은 인간 역사의 방향을 기록하고 또한 생산력 발전의 여러 단계들이 생산관계와 계급투쟁의 고정된 여러 관계에 부합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있어서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계급투쟁이 감소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또한 저개발 경제에 있어서 집단적 소유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이 독단적 역사철학에 필요 불가결한 여러 운동 간의 평행선이 당장에 무너진다. 


그다음에 이것은 중요한 얘기인데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있어야 성립한다. 《면화의 제국》라든가 이런 걸 보면 근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본원적 축적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착취와 식민지 약탈과 말할 수 없이 심한 그런 식민지적인 침탈이라든가 이런 게 있어야 된다. 그런 건 이제 경제적 맥락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아주 분명하다. 자본이 성립하는 데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그런 것들이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기능과 작용에 관한 분석은 애초부터 경제와는 무관한 경제 외적인 현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고, 자본주의를 끝장내는 것도 앞서 나온 것처럼 정신적 차원에 속하는 도덕적 결단과 정치적인 어떤 질서 이런 것들이 개입된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서 얘기한다 라고 하는 것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의 끝장과 시작 이런 것들은 경제학적인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것이 더 이어지면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의 관계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제3부 170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러 사회들은 오직 그 하부구조, 즉 생산력의 상태, 과학과 기술적 지식, 산업, 노동조직으로 보여지는 것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사회에 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대사회에 관한 경제적 조직의 관점에서의 이러한 이해는 전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생산력의 관점에서 여러 사회를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하나의 결정된 해석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현실의 여러 다른 측면들 간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간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결정된 관계들을 용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또는 나아가 생산관계와 사회의식의 상태 간의 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 <결정 determination>과 같은 너무 정밀한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껴 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가 현실적으로 소멸할 수 있는가. 국가라고 하는 건 다시 말해서 정치적 공동체이다. 정치적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소멸하지 않고 마르크스가 국가소멸론 이런 걸 얘기하는 것은 사실 상징적인 의미밖에 없는 것이다. 그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이냐 하는 것은, 부르주아적인 그 계급적 성격은 소멸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가 소멸하는 건 불가능하다. 극단적인 예로 사유재산이 완전히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돈을 버는 족족 나눠 갖고 그다음에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그것에 찬성을 해서 국가가 그것에 의존한다고 하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소멸할 수 있다. 이윤을 창출하는 시스템 자체가 무너지겠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에 대립이 없어지는가, 그렇지는 않다. 미워하는 놈들은 여전히 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당파 싸움이 일어나는 건 사실이지 않겠는가. 예를 들면 조선시대를 생각해 보자. 조선시대에 무슨 이윤 창출이 있는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조선시대를 관철했다 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소멸하고 그다음에 그들 사이에 밥그릇 싸움이 없었는가, 엄청난 싸움이 있었다. 어디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경제적 질서가 정치적 질서를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즉 사회주의도 하나의 경제적 질서이다. 그것이 기존의 정치적 질서를 대체해서 없애 버릴 수는 없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겠다. 

제3부 186 그러므로 국가의 소멸은 오직 상징적 의미밖에 갖는 것이 없다. <실제> 소멸되는 것은 문제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인 것이다. 사실상 계급의 경합이 소멸되는 순간부터 이러한 행정적 및 훈령적인 기능들 은 어느 특정 집단의 지배적 의사를 표현하는 대신 전체로서의 사회의 표현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는 우리는 사실상 계급적 성격과 지배와 착취가, 국가 자체로부터 소멸됨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제3부 187 계급 대립 없는 사회에 관한 문제는 생산수단의 사유가 없어지는 사 회에 있어서 정의상 이 사적 소유와 결부된 계급대립은 없어지지만 대중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떠한 발전된 사회에 대해서도 없어서는 아니될 행정적 및 훈령적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가 있게 된다. 이런 타입의 사회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있는 사회에서와 같은 계급 대립은 없다. 그러나 경제 적 결정을 수단으로 해서 모든 사람의 조건을 주로 결정하는 국가를 가지는 사회에는 분명히 집단 간의 대립이 존재할  것이며 그 집단은 수평적 집단농민 대 노동자 또는 수직적 집단, 하층 집단과 상층 집단 어느 쪽이건 마찬가지이다.

제3부 187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생산수단의 사유가 소멸하고 각자의 조건이 국가의 결정에 의존한다는 그 사실만에 입각하여 대립 없는 사회를 위한 기초를 정립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다음에 이제 이건 1967년의 상황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주의는 수정주의,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의 대립으로 불거진 수정주의가 있었다. 그때는 카우츠키가 마르크스 정통파를 장악했는데 다시 또 볼쉐비즘에서 카우츠키와 레닌의 대립이 있다. 레닌이라고 하는 사람이 해놓은 전위대, 당,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런 것들은 사실 마르크스가 안 하던 얘기이다. 그런데 레닌이 어쨌든 그걸 내걸고 국가를 만들어 버렸으니까 정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1960년대 아롱이 이 책을 쓸 때만 해도 레닌이 정통파였다. 볼쉐비키적 해석과 스칸디나비아-영국형 해석 사이의 정통 다툼, 영국도 그때는 굉장히 사민주의가 강력했다.  그런 사이에 또 정통 다툼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다 무너져서 정통이고 뭐고 할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면 마르크스주의 학파들 사이에서 무엇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르크스의 후계자인가 이런 논의들도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레이몽 아롱의 마르크스에 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하겠다. 

제3부 193 그 두 주역은 카우츠키Karl Kautsky 및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이었다. 그 기본적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자본주의 경제는, 우리가 예측하고 또한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혁명이 계획대로 일어날 수 있게 변동하고 있는 것인가? 베른슈타인은 계급 간의 대립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증가되고 있지 않으며 경제적 집중화가 예기하였던 만큼 그렇게 빨리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발생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그 결과 역사의 변증법이 혁명의 파국과 계급대립 없는 사회를 성취하리라고 믿는 것은 확실한 지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선언하였던 수정주의자였다. 이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의 논쟁은 독일 사회민주당과 제2 인터내셔널 속에서 카우츠키의 승리와 수정주의자들의 패배로 끝났었던 것이다. 정통적 테제는 유지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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