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회사상의 흐름(4) ━ 마르크스(1)

 

2023.11.27 📖 사회사상의 흐름(4) ━ 마르크스(1)

📖 사회사상의 흐름

❧ 마르크스
- 저작의 다양성. 사상 체계에는 사회학 이론, 경제 이론, 역사철학적 저작 포함. 과학적 저술의 명시적 이론과 역사철학적 서술의 묵시적 이론 간의 모순  
- 개념 사용의 비일관성. 이를테면 ‘계급’을 사용하는데 이는 사회학에서 사용하는 것과 정치 현실 분석에서 사용하는 것이 다르다.  
- 저작 시기의 다양성. 청년기(1818-1848), ⟪헤겔 법철학 비판 서론⟫ ⟪성가족⟫ ⟪철학의 빈곤⟫ ⟪경제학·철학 수고⟫ ⟪도이치 이데올로기⟫ ⟪공산당 선언⟫; 후기, 경제학자로서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  
- 목표와 읽기의 요점. 학적 노력의 본질,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진화라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 — ⟪자본⟫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핵심 저작은 ⟪공산당 선언⟫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  
- 무산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근대 사회의 주요 사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적·적대적 성격에 관한 해석. 세 가지 핵심 저작은 자본주의 체제의 적대적 성격을 설명, 확정, 서술하는 세 가지 방식  
- 자본주의 체제의 적대적 성격을 입증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멸망을 예측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운명의 완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도록 격려한다는 것에 결부된 것. 분석, 예언, 사회학자, 행동가의 구별이 불가능 
- ⟪공산당 선언⟫
중심 주제는 계급 투쟁. 인간 역사에 나타난 계급적 적대성과 양극화. 적대성의 기초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혁명적 위기 발생,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한 적대성 해소  
19세기 초기 저술가들의 일반적 경향. 정치나 국가를 본질적인 경제나 사회 현상에 부수적인 현상으로 간주, 정치 권력을 사회 갈등의 표현으로 파악  
자본주의 사회에 관하여 제기되는 물음들. 1)사회에 관한 일반이론 — 역사에 관한 유물론적 이해(역사적 유물론), 2)자본주의 사회의 구조, 운영방식(경제사상)  



사회에 관한 일반이론의 내용
· 인간은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그들의 의지와 독립된 일정한 관계를 갖는다. 
· 모든 사회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이루어진 경제적 기초(토대)와 상부구조로 구성된다. 
· 역사 운동의 동력은 어떤 일정한 시점에 생기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또는 소유관계)의 모순이다. 
·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계급투쟁이 도입된다. 
·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어긋남은 혁명이론을 함축한다. 혁명은 정치적 우연이 아닌 역사적 필연성의 표출이다. 
· 현실을 결정짓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다. 사회적 현실이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 
· 인간의 역사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참조
📖 Löwith(14): 시간론 — 20 https://www.podbean.com/ew/pb-fjv2i-13dac72
📖 Löwith(15): 시간론 — 21 https://www.podbean.com/ew/pb-pwcn9-13e4915

🎧 https://www.podbean.com/ew/pb-mqnvd-150b772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에서 콩트 다음이 마르크스이다. 기본적으로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은 19세기의 사회 이론들 그리고 콩트의 경우는 아직 사회 이론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물론 사회학의 창시자이긴 하다, 몽테스키외는 아주 명백하게 사회 이론은 아니다 라는 얘기를 했었다. 세 번째 학자는 마르크스이고 그다음에 토크빌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토크빌의 경우를 보면 요즘에 읽고 있는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하버드-C.H.베크 세계사 : 1750~187》에 따르면 1750년에서 1870년의 단계에 등장했던,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사회 이론들이 아닌 일종의 전 사회이론의 사례로서 마르크스, 헤겔 이런 사람들의 얘기를 한다. 그래서 《사회사상의 흐름》에서 마르크스 부분을 오늘과 화요일, 수요일 이렇게 하고 그다음에 다음 주에 토크빌까지 읽어보려고 한다.  

레이몽 아롱의 이 책 부분은 굉장히 분량이 많은데 거기서 핵심적인 부분만을 골라서 설명을 하려고 한다. 레이몽 아롱의 책이 1967년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여전히 통찰력 있게 읽을 만한 부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낡은 얘기들이 좀 있다. 그렇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부분들을 추려서 정리를 하겠다. 특히 오늘부터 3일에 걸쳐서 읽는 마르크스에 관한 설명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처음에 얘기했듯이 이 책이 출간된 것은 1967년이다. 1967년이면 아롱의 청년기도 아니다. 아롱이 1905년에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바로 60대에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1967년이면 냉전이 한참 있을테고 그다음에 유럽에서 68혁명이라고 하는 이른바 유럽의 현대의 여러 가지 사회적인 격변 시기에 나온 책이다. 1960년대 후반에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에 대해서 써놓은 부분을 보면 레이몽 아롱이 정말 대단한 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책을 읽어봐도 코와코프스키나 아롱이나 이런 사람들이 보통 센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196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이처럼 아주 강력한 반 마르크스주의적인 텍스트를 내놓는 게 당시 지식인의 흐름을 보면 그렇게 쉽지 않았다. 몽테스키외나 콩트는 그 당시 전혀 화약고과 같은 것도 아니고 시효성도 없었는데 마르크스에 대해서 아롱이 정리해 놓은 것을 보면 일단 통찰력 자체가 대단하고 시대의 흐름은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학적으로 뭔가를 정리해서 끝을 보겠다 하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책 여백에 써놓은 것들을 이렇게 보니까 저는 이걸 읽을 당시에는 마르크스에 대한 공부가 전혀 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사실 마르크스에 관한 책을 읽은 게 레이몽 아롱의 이 책과 칼 포퍼의 《역사주의의 빈곤》이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른바 우파들이 쓴 책들부터 읽기 시작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롱의 글을 읽어보면서 또 제가 여백에 메모해놓은 거 이렇게 보니 아롱에게 굉장히 경도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마르크스를 읽는 기본적인 태도는 전적으로는 아닌데 아롱의 책을 통해서 형성된 측면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읽어봐도 이건 굉장한 통찰력이다 그리고 여전히 유효하다 하는 얘기들을 1967년에 했다. 그때는 소비에트 연방이 굉장히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미소 냉전 체제가 절정이던 시절이다. 게다가 1970년대 초반에 경제 위기가 오지도 않을 때이다. 정말 혁명의 열기가 불타오르고 있을 때 마르크스에 대해서 이렇게 냉정하게 뭔가를 말했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지금 아롱이 한 이야기를 찬양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한번 정리를 해보니 여전히 우리가 지금 마르크스를 읽을 때 주의해야 되는 지점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좀 더 상세한 얘기는 나중에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이 끝난 다음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을 통독을 하면서 하겠다. 


일단 마르크스를 읽을 때는 기본적으로 주의해야 되는 것은 마르크스의 저작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학 이론이 있고 경제 이론이 있고 그다음에 역사 철학적 이론이 있다. 아롱은 역사 저작이라고 했는데 저는 역사 저작이라기보다는 역사 철학적 저작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성격이 다르다. 가령 제가 철학 또는 사상사, 역사 철학 전공자인데 사회학 책도 쓰고 경제학 책도 썼다 또는 경제학책이 아니라 경제 이론을 내놨다 그러면 이건 좀 이상한 것이다. 어쨌든 저작의 다양성이 있다. 그런데 그가 자연과학을 본받아서 저술한 사회학 이론이나 경제 이론, 《자본》 같은 게 그런 책이다, 그런 책들은 과학적 저술의 형식을 가지고 있고 내용 또한 그러하다. 물론 사회과학 책이기 때문에 시기가 지난 다음에 유효하지 않다 하는 측면들도 있다. 그다음에 그런 것들과 역사 철학적 저작 사이에는 일정한 어긋남이 있다. 모순이 있다. 특히 마르크스의 역사 철학적 서술은 묵시록의 어떤 측면을 띠고 있다. 종말론이라기보다 어떤 계시를 드러내 보이는 측면을 띠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다른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또는 다른 경제학자들과는 달리 여전히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묵시록적인 어떤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오늘날 콩트주의자 그다음에 몽테스키외주의자, 토크빌주의자는 없는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전히 현실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마르크스의 과학적 저술에 힘입었다기보다는 역사 철학적 또는 묵시록적 이론에 힘입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개념 사용에 비일관성이 있다. 이건 정말 마르크스가 보여주는 치명적인 난점 중에 하나이다. 이를테면 계급을 사용하는데, 계급이라는 단어를 마르크스 굉장히 중요하게 사용한다. 그런데 《공산당 선언》에서 사용하는 계급이라는 단어와 그다음에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그다음에 《프랑스 내전》에서 사용하는 계급, 정치 현실 분석에서 사용하는 계급이라는 개념은 그 개념의 내용이 다르다. 개념 사용의 비일관성이기 때문에 가령 《공산당 선언》도 팜플렛이기 때문에 학적인 저작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 것에서 사용하는 계급 개념을 그대로 정치 현실 분석에서 적용해서 이해를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를 읽을 때 항상 저도 주의하고 또 읽는 사람들에게 주의하라고 가끔 조언을 해주는 뭐냐 하면 예를 들어서 프랑스 혁명 3부작을 읽을 때는 정치평론으로 쓴 것이어서 마르크스가 다른 책들, 예를 들면 《자본》에서 사용하는 계급 개념들을 익힌 상태에서 읽으면 절대로 읽을 수 없다. 텍스트 자체가 결이 다르다. 그리고 《헤겔 법철학 비판》이라든가 또는 《철학의 빈곤》이라든가 《경제학 철학 수고》라든가 《성가족》, 《도이치 이데올로기》와 같은 책들은 거의 철학 책이다. 거기서 나온 얘기는 말 그대로 역사 철학적 전망을 담고 있는 책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경제학 철학 수고》 같은 경우는 책 제목 그대로 노트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들도 역시 철학책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로서의 마르크스라고 하는 측면에서 쓴 것은 그것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개념 사용의 비일관성이다.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하나로 꿰는 원리는 없다. 그 영역을 잘 분리해서 읽어야 된다. 그러니까 읽을 때 주의해야 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텍스트는 모두 다 대화편이다. 그러니까 대화편을 읽을 때는 그냥 다 대화편을 읽는 방식대로 읽으면 된다. 대화편으로 읽는 방식대로 읽으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을 때는 강의록이니까 그냥 강의록 읽듯이 읽으면 된다.  그런데 같은 저자라 할지라도, 칸트는 그냥 거의 다 똑같다, 헤겔 같은 경우만 해도 저작의 다양성이 있다. 그러니까 레토릭이 다르고 의도가 다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나 헤겔을 읽을 때는 그런 점들을 주의해야 된다. 그래서 《정신 현상학》 같은 것은 철학책 읽듯이 각 잡고 읽으면 안 읽힌다. 

제3부 123 마르크스의 사상체계에는 사회학 이론, 경제이론 및 역사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고, 때로는 과학적 저술 속에 발견되는 명시적 이론이 역사의 저술 속에서 사용되는 묵시적 이론과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계급이라는 어떤 일정한 개념을 제시했었으나, 그가 1848년과 1850년 간의 프랑스의 계급투쟁, 또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 또는 파리 혁명정부의 역사를 역사적으로 분석했을 때, 그가 인정했었고 또한 그 드라마에서 역할들을 부여한 여러 계급들이, 반드시 그의 이론에 함축되어 있는 계급들은 아니다. 


마르크스를 읽을 때 마르크스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잘 봐야 된다. 마르크스의 목표라고 하는 것은 아롱도 지적하고 있듯이 마르크스의 학적 노력의 본질은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진화, 그게 결국에는 자체적인 멸망으로 귀결되는데 그 현상을 과학적으로 입증한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심혈을 기울여서 노력했던 부분은 바로 《자본》이다. 《자본》에 중심을 두는 것이 핵심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진화라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제 사상, 경제 이론이 마르크스의 포인트이다. 경제학적으로 벌어진 어떤 사태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을 정치 이론과 연결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그 경제학 이론에서 나온 어떤 법칙을 역사의 일반 법칙으로 환원시키거나 확장시키거나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일단 첫 번째로 알아둬야 되는 것, 마르크스를 잘 모른다 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진화, 자본주의 체제가 어떤 법칙에 따라서 전개되어 가는가 그리고 그 현상을 입증하는 것 이게 1차 목표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까지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게 마르크스가 가졌던 가장 큰 착각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꼭 그 시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페르낭 브로델 같은 사람이 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보면 자본주의라고 하는 체제 자체가 꼭 산업사회에 산업사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업자본주의라는 말도 있고 오늘날에는 금융자본주의라는 말도 있다. 그러니까 미리 최종 결론을 얘기해 보자면 마르크스는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상업사회에도 자본주의가 있고 그다음에 금융 중심 사회에도 자본주의가 있다. 마르크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산업사회의 현상인데 그것을 자본주의 현상이다 라고 얘기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를 하겠다.  

우선 첫 번째로는 자본주의라고 하는 하나의 생산 양식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 마르크스의 목표이다. 두 번째 무산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근대사회의 주요 사실인데 이것은 자본주의와 무관하게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곳에서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갈등이라는 게 있다. 산업사회에서 공장을 돌리다 보니까 첨예하게 드러난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공장이 운영되고 있다 보니까 드러난 사실이다. 가령 조선시대에 양반과 양반 아닌 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회든지 갈등이 있다. 그런데 그 갈등이 마르크스가 살던 시기에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 의해서 생겨난 갈등이 가장 첨예했을 뿐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사회학 이론이다. 무산자와 자본가의 갈등이라든가 또는 무산자와 자본가의 적대적 성격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이제 사회학에 관한 얘기가 된다.  

 

마르크스의 핵심 저작은 《공산당 선언》과 《정치경제학 비판》 그리고 《자본》인데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든가 《자본》이라든가 이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관한 책이다. 《공산당 선언》은 이게 참 묘한데 그런 정치경제학적 비판을 통해서 당대의 자본주의 사회를 이렇게 살펴본 다음에 이것을 어떻게 소멸시킬 것인가, 이런 적대성을 어떻게 소멸시킬 것인가에 대한 선언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당 선언》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산업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도록 촉구하는 그런 선언문이다. 이 책은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저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마르크스의 모든 저작들의 집약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 특징을 골고루 가장 잘 드러내 보여준다. 《공산당 선언》이 얇지만 마르크스의 책 한 권만 읽는다 라고 하면 《공산당 선언》이다. 엥겔스와 공저를 했기 때문에, 엥겔스라고 하는 사람은 마르크스의 《자본》 2권부터 편집해서 출간한 것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다. 여튼 마르크스는 이런 영역 저런 영역에 골고루 걸쳐 있기 때문에 하나의 분석, 경제 체제의 생산 양식을 분석하고 근대 사회를 분석하고 하는 것은 사회학자로서의 일이고 그다음에 경제학자로서의 일인데 그것과 미래를 위해서 미래에 이런 적대를 없애야 한다 라고 하는 그런 예언과 행동을 촉구하는 것, 이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제3부 124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자본론》에다 중심적 위치를 부여해야 하며, 《경제학과 철학 수고》 또는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 불완전한 (아마 상당히 독창적이란 것은 사실이겠으나) 초고, 즉 젊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보다는 확실히 헤겔을 더 잘 알고 있을 때에 헤겔과 자본주의에 관해서 사변적 논술을 한 것에 중점을 둘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공산당 선언》은 계급 투쟁을 드러내 보이고 촉구하는 텍스트이다. 인간은 계급 투쟁의 역사다. 적대성을 먼저 드러내고 그다음에 중간 계급 이런 것은 없는데, 양극화된다는 것은 설명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그렇게 된다고 믿었는지 아니면 혁명 운동을 위해서 적과 동지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마르크스의 분석을 보면 혁명적인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진영을 양극화했다고 보는데, 레이몽 아롱은 또 그렇게 보지는 않고 마르크스는 모든 그런 분석을 무시했다고 보고 있다. 어쨌든 인간 역사의 적대성, 인간 역사에 나타난 계급적 적대성과 양극화이 핵심인데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적대성이다. 그 적대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때문이다. 생산력은 말 그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또는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생산한 것을 노동자들은 직사하게 일을 했는데 그걸 많이 챙겨가는 놈들은 다른 놈들이다.  바로 그게 생산 관계에 의해서 생겨나는 모순이다. 그러다 보니 혁명적 위기가 발생한다. 열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혁명적 위기가 발생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서 적대성을 해소한다. 그게 《공산당 선언》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거기에 보면 그 당시 마르크스가 분석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분석이 들어있다. 그건 사회 이론이다. 그다음에 혁명적 위기가 발생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서 그 적대성이 해소될 것이다. 이건 예언의 영역에 들어간다. 좋게 봐도 역사 철학의 영역에 들어간다. 그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제3부 125 마르크스 사상에 있어서는 노동자와 경영자 즉, 마르크스의 용어를 쓰면 무산자와 자본가 간의 갈등은 근대사회의 주요한 사실이며그것이 근대사회의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주고, 그로 말미암아 근대사회의 역사적 발전을 얘기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된 또는 적대적 성격에 관한 하나의 해석이다.  

제3부 126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문서의 형식으로 그들의 과학적 사상을 약간씩 제시한 선전 팜플렛이다. 그 중심 테마는 계급투쟁이다.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제3부 127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이루는 이 적대성의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이다.

제3부 129 그의 학문의 목적은 자본주의 사회의 적대적 성격, 적대적 사회의 필연적 자멸 및 근대사회의 적대적 성격에 종지부를 찍게 될 혁명적 폭발을 엄격하게 입증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공산당 선언》에는 자본주의 사회에 관하여 제기되는 기본적인 두 가지 물음들, 사회에 관한 일반 이론과 그다음에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와 운영 방식, 경제사상의 영역과 역사적 유물론에 관한 영역이 동시에 들어간다. 이는 사회에 관한 일반이론과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와 운영 방식은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얘기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마르크스의 이 이론이 경제학과 꼭 맞물리지는 않는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영역의 다양성이 있고 그 다양한 영역들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서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전체적 이론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사실 그건 야망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야욕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는 역사에 관한 유물론적 이해가 사회에 관한 일반 이론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사회 이론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말을 하면 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런 얘기할 필요가 없다. 사회에 관한 일반이론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야만 한다 라고 얘기하기는 어렵다는. 사회에 관한 일반 이론은 7개 항목을 정리해서 나눴는데, 이 7개 항목은 마르크스가 증명하고 싶은 것이고 자기가 증명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는 마르크스의 말하자면 전제가 되겠다. 일단 《공산당 선언》에서 핵심적인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오늘은 좀 귀 기울여 두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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