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회사상의 흐름(5) ━ 마르크스(2)

 

2023.11.28 📖 사회사상의 흐름(5) ━ 마르크스(2)

📖 사회사상의 흐름

❧ 마르크스

- ⟪자본⟫ 제1권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 작용, 진화를 동시에 분석하고 그 체제 속에서의 인간의 운명을 서술하려고 한 것.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에 관한 사회학, 경제학, 철학적 역사를 통일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사회구조, 기능 작용의 방식, 체제 내에서의 인간의 운명 및 그 체제의 진화를 필연적인 방식으로 연결지어 주는 포괄적인 이론은 없다. 왜 그런가? 전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역사는 합리적·필연적으로 전개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윤과 잉여가치, 착취

· 자본주의의 본질은 이윤 추구. 교환과정 마지막에 사람이 처음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을 가지는데 그것이 이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을 두 가지, 1)이윤은 어디에서 오는가? 2)어떻게 해서 활동의 본질적 충동이 이윤에 있으며 이것을 얻을 수 있는 체제가 존재하게 된 것인가?  

· 상품의 가치는 평균적 인간의 노동의 양에 비례 —> 가치설

· 노동가치는 상품가치와 똑같이 측정된다. 임금은 생존에 필요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양과 동등하며 인간 노동은 가치대로 지불받는다 —> 임금설

· 노동자는 임금을 받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을 초과하여 노동한다 —> 잉여가치설. 여기서 착취가 생겨난다. 

- ⟪자본⟫ 제2권
자본의 유통,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설명. 미시경제적 분석으로부터 거시경제이론을 부연하고 위기 이론을 첨가하려는 시도 

자본주의적 매커니즘이 갖는 경쟁적 무정부적 성격과 자본 유통의 필요성이 생산력과 구매력 간의 부조화 가능성을 영구화시킨다 — 위기의 발생. 위기는 규칙적인가, 위기를 폭발시키는 경제적 사태는 무엇인가 

- ⟪자본⟫ 제3권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와 활동의 분석부터 진화에 관한 이론 

자본의 유기적 구성(불변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관계),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착취율),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이윤에 기초한 경제의 경쟁 메카니즘 —> 자본의 축적, 생산의 기계화, 총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비율 저하 —> 이윤율 저하 —> 자본주의의 종말. 이는 인간의 영향을 매개로 하지만 각각의 영향을 초월하여 작용하는 역사적 필연성, 한 체제가 작동하는 시기의 고유한 법칙 자체가 그 체제를 멸망으로 이끄는 역사적 메카니즘  

여기서 멸망이 초래되려면 궁핍화로 인한 대중의 분노와 폭동이 일어나야 하는데, 궁핍화는 경제적 법칙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요인으로 인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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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 마르크스 두 번째이다. 어제는 마르크스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했다. 저작의 다양성, 개념 사용의 비일관성, 저작 시기의 다양성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주요 학적 저작들 《공산당 선언》,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 이런 것들을 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적 작업의 근본적인 목표들을 살펴보고 《공산당 선언》에 대한 설명을 했다. 오늘은 《자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다. 《자본》은 1권, 2권, 3권이 있는데 각각이 가지고 있는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 내일은 이런 경제학적 작업들을 떠나서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철학적 성격의 측면들을 본다. 어제도 말했듯이 마르크스는 하나의 학문 영역에서만 작업을 한 게 아니다. 하나의 학문 영역에서만 작업을 한 게 아니라 여러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학에 관련된 것들이 철학과 연결되면서 문제가 생겨나기도 하고 더군다나 예전에 칼 뢰비트의 「시간론」에서 다룬 것처럼 종말론과도 관련된 부분들도 상당 부분 있다. 그런 얘기들은 내일 하겠다.  

어제 국토연구원에 가서 강의를 했는데 강의를 끝내고 회식을 하다가 철학 전공자가 데이비드 하비를 읽었다고 하니까 굉장히 좀 의아해하는 얘기를 들었다. 지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또는 도시공학, 도시계획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과학이다.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데이비드 하비도 좀 그런 측면이 있다. 사회과학으로서의 지리학을 마르크스주의하고 연결시켜서 한다. 생물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이종교배 같은 그런 게 있다. 그런 것들이 얼핏 보기에도 당황스러운데 마르크스가 사실은 그런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데이비드 하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 어떻게 보면 철학적 개념들인데, 데이비드 하비의 책 읽다 보면, 오늘날의 사회과학쪽은 변증법과 같은 술어들이 나와버리면 좀 황당하게 이해가 안 되는 그런 측면이 있다. 마르크스가 바로 그런 점이 있다. 그런데 《자본》이라고 하는 텍스트는 순전히 경제학적 텍스트인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게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골치 아프다. 그리고 《자본》에도 오로지 경제학적인 내용만 들어가 있는 건 아니다. 그걸 잘 식별해내야 되는데 식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다 보면 이게 경제학 얘기인지 아니면 경제학 얘기가 아닌지 엉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런 것들은 마르크스를 읽을 때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레이몽 아롱은 그런 것들을 잘 잡아내고 있는데 그것을 정리해서 오늘 말하겠다.  

《자본》 1권은 마르크스가 완성한 것인데 《자본》은 어떤 책인가를 물어보면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 작용, 진화를 동시에 분석하고", 여기까지만 하면 경제학이다, 근데 "그 체제 속에서의 인간의 운명을 서술하려고 한다." 이건 복잡해져 버린다. 인간의 운명은 역사의 영역으로 가버리는데 역사는 필연성을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에 관한 사회학, 경제학, 철학적 역사를 통일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사회구조, 기능 작용의 방식, 체제 내에서의 인간의 운명 및 그 체제의 진화를 필연적인 방식으로 연결지어 주는 포괄적인 이론"은 없기 때문이다.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마르크스의 시도는 굉장히 야망에 가득 찬 것인데 그건 야망일 뿐이다. 그러니까 어떤 영역으로 들어가 버리면 결국 예언자가 되어버린다. 레이몽 아롱은 그게 왜 그럴까를 생각하면서 전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 이것은 아롱의 아주 독특한 통찰이라기보다는 전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전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칼 포퍼도 그걸 얘기한다. Canvas Theory라고 해서 마르크스는 한 사회 전체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사회 전체를 바꿔야 된다 라고 얘기하는데, 사실은 마르크스 자신도 그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기가 속을 뒤집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게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보면 그런 지적들이 나온다. 그리고 《역사주의 빈곤》에서도 바로 그 점이 지적되고 있다. 성균관 대학교에 있던 이한구 교수가 번역한 책을 보면 "역사법칙주의"라고 번역을 해놨다. 그 내용은 아주 뚜렷하게 밝혀서 번역을 했는데 그냥 역사주의라고 통용되던 것이 있다. 역사주의라고 하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몇 가지 있는데 포퍼가 사용하는 것은 역사의 법칙이 있다, 필연적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합리적 필연적으로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시도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 작용, 진화를 동시에 분석"하고, 거기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그다음은 이제 경제학 영역을 넘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제3부 136 왜 전체를 포괄하는 데 성공한 이론이 없는 것인가? 아마 그 이유는 이 전체(whole)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즉 역사가 이런 정도까지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제3부 136 《자본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 작용과 그 진화를 동시에 분석하고 그 체제 속에서의 인간의 운명을 서술해 보려고 애썼던 방식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다음에 《자본》에서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윤과 잉여가치, 착취 이 두 개가 연결돼 있다. 자본주의라고 하는 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윤이라고 하는 것은 교환 과정에서 생겨난다. 교환이 동등한 경우가 있다. 너도 남고 나도 남고 하는 경우는 없다. 한쪽이 남으면 한쪽은 반드시 손해를 보게 돼 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둘 다 호혜적인 교환이라는 게 있을 수 있다. 그것 말고 이윤을 만들어내는 교환이 있다. 그러면 마지막에 사람이 처음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을 가지는 것이 이윤이다.  그러면 여기서 두 가지 물음이 제기된다. 하나는 그 이윤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그 과정에서 외부에서 뭐가 들어온 것인가. 그것을 마르크스는 물었는데, 가령 노동자가 100원어치 일을 해서 100원을 받으면 좋은데 사실은 120원어치 일을 하고 100원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20원이 이윤으로 남는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얘기는 아롱의 얘기도 그렇고 이렇게 단순화해서 설명을 할 수가 있다. 이윤이라고 하는 것에 관련된 문제는 이윤은 어디서 오는가, 이윤의 기원에 대한 얘기이다. 

이윤의 기원에 관한 얘기는 가치설, 임금설, 잉여가치설 세 가지를 가지고 설명을 할 수가 있다. 상품의 가치라고 하는 건 인간 노동의 양에 비례한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노동가치설이다. 노동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다음에 노동자는 노동한 것에 대한 임금을 받는다. 생존에 필요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양과 임금이 동등한데 인간 노동은 가치대로 지불받는다. 그게 임금이다.  임금을 받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하여 노동하기 때문에 바로 그것으로부터 잉여가치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그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노동을 해서 생겨난 것인데 노동자가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서 바로 착취라고 하는 것이 등장하게 된다. 칼 뢰비트는 착취를 정치적 예언이라고 봤다. 이것은 일종의 원죄이다. 착취니까 이 체제를 엎어야 한다 이렇게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착취는 틀림없는 것이다 라고 일단 거기서부터 믿음을 갖기 시작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게 이윤에 관한 부분인데 물음이 하나 더 있다. 도대체 왜 이윤을 추구하는 체제가 생겨났는가. 이 문제는 경제학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 이건 사회적인 문제이다. 그냥 이렇게 돌아가더라 라고 하면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대체 이 자본주의 체제의 기원은 어디인가, 즉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물음도 이제 해볼 필요가 있겠다. 

제3부 139 이 입증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가치설, 임금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잉여가치 이론이다.
첫째 명제: 어떠한 상품의 가치도 대충 그 속에 포함된 평균적 인 간 노동의 양에 비례한다. 이것이 소위 가치설이다.

둘째 명제: 노동 가치는 상품 가치와 똑같은 방식으로 측정이 된다. 자본가가 임금 취득자에게 그가 제공한 노동력의 보상으로 지불하는 임금은 그 노동자와 그의 가족의 생존에 필요 불가결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인간 노동의 양과 동등하다. 인간 노동은 모든 상품에 타당한 일반적 가치 법칙에 합치하여 그 가치대로 지불을 받는다. 

세째 명제: 노동자가 임금의 형태로 받는 가치에 동등한 하나의 가 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은 실제 계속되는 그의 노동 시간보다 적다. 노동자가 그 임금 속에 포함된 가치에 동등한 가치는 다섯 시간인데 실제로는 열 시간 일을 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노동자는 자기 시간의 반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나머지 반은 기업가를 위해서 일하는 셈이다. 이 경우 <잉여가치>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그 것은 필요한 노동 시간을 초과하여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의 양을 말 한다. 필요한 노동 시간이란 노동자가 임금 형식으로 받은 가치와 동등한 가치를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 시간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윤의 기원과 또한 모든 것이 그 가치대로 교환이 되는 경제체계가 동시에 잉여가치 즉, 기업가의 수준에서 이윤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그 가치대로 지불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그 가치 이상을 생산하는 상품이 있으니 그것이 즉 인간 노동인 것이다. 


《자본》 2권은 자본의 유통,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데, 아롱에 따르면 미시경제적 분석으로부터 거시경제이론을 부연하고 위기 이론을 첨가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핵심은 위기 이론입니다. 일단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은 경쟁적이고 무정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산력과 구매력 간의 부조화 가능성을 영구화시키고 이것으로부터 위기가 발생한다. 자본주의가 위기다 그런 것은 널리 알려진 체제이다. 그런데 그 위기를 봉합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해서 지금까지 위기를 넘겨온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위기라고 하는 것은 그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제 물음이 두 가지가 나오게 된다. 위기는 규칙적으로 있는가. 규칙적으로 있다 그러면 위기를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예측되어야 경제학이 과학으로서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위기는 규칙적인가. 우리도 경제 위기가 왔다 라는 얘기를 한다.  요러요러한 징후들이 보이면 위기다 라고 말을 하는데 반드시 꼭 그렇지는 않다. 그러다 보니 요즘에는 경제학이 예측을 못하는 것이다 라고들 얘기도 한다. 그러면 그 이유는 어디 있을까. 그건 바로 앞에서 나온 것처럼 경제학도 또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서의 경제적인 어떤 현상들도 바로 역사 속에서 생겨나는 일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다 식별해낼 수 없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거기에 작용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인 현상을 합리적 필연적인 법칙으로서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측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위기를 폭발시키는 경제적 사태는 무엇인가. 어떤 경우에는 A라는 경제적인 사태가 위기를 불러오는가 하면 전혀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예측할 수 없었던, 이것이 위기의 원인이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그런 경제적 사태가 위기를 불러오기도 한다. 언론에서 가끔 하는 말들이 있는데 '경제는 심리다.' 그것은 경제학을 과학으로 성립시키는 데 아주 치명적인 장애물이 된다. 심리다 라는 말은 파악이 안 되는 것들이 경제에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경제학이 하나의 자연과학의 모형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인 어떤 법칙을 만들어내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빠져나와 버린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려고 했던 것이 《자본》 2권이다.  이렇게 부연 설명을 많이 했는데 《자본》 2권은 어쨌든 위기에 관한 얘기이다. 

제3부 143 제2권의 주제는 자본의 유통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설명하려는 것이 그 전체적인 목적이었다. 

제3부 143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메카니즘이 갖는 경쟁적 무정부적 성격과 자본 유통의 필요성이, 생산과 구매력 간의 부조화의 가능성을 영구화시킨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본질적으로 무정부적인 경제는 여러 가지 위기를 발생시키는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위기가 규칙적인 것인가? 불규칙적인 것인가? 하나의 위기를 폭발시키는 경제적 사정의 결합은 무엇인가? 이런 모든 점에 관해서 마르크스는 정밀한 이론보다도 암시를 줄 뿐이다. 


《자본》 3권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와 활동의 분석부터 진화에 관한 이론",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전개돼 가는가, 이게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에 관한 얘기겠다. 일단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는 게 있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불변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관계, 불변자본이라고 하는 건 기계 이런 것들이고 가변 자본은 노동력이다. 그리고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 착취율이다. 가변자본 즉 노동이니까 거기서부터 잉여가치를 얼마나 뽑아낼 수 있는가 그게 착취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으로부터 이윤율이 갈수록 저하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는, 즉 생산이 고도화될수록 잉여가치의 비율이 줄어들고 그러다 보면 이윤율이 떨어진다. 그런 것들을 마르크스는 상정을 한다 그렇게 볼 수 있다. 이 과정을 다시 정리해보면 일단 자본주의 체제는 이윤을 추구하는 체제이니까 이윤에 기초한 경제가 있고 거기서 경쟁이 일어난다. 경쟁이 일어나면서 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 자본을 축적하고 생산을 기계화하고 그러다 보니까 총자본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율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면 노동이 차지하는 비율이 떨어져 나갈수록 잉여가치가 줄어드니까 이윤율이 저하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윤율이 저하되면 자본주의 체제가 버티질 못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윤을 추구하는 체제인데 이윤이 안 나오면 체제가 버텨지지 못하니까 자본주의가 멸망한다. 이게 마르크스의 아주 간단한 도식이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간단하게 말한 게 아니고 마르크스의 이야기를 간단한 도식으로 만들면 이렇게 볼 수 있다. 

제3부 144 《자본론》의 제3권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와 활동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진화에 관한 이론의 개관이 중심이 되어 있다. 제3권의 기본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자본론》의 제1권의 도식에 따르면 어느 주어진 기업 또는 경제의 한 부문에 있어서 노동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잉여가치가 그만큼 더 높다. 또는 그 대신 노동을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으로 규정한다면 총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비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잉여가치도 높아진다. 제1권의 도식에 있어서 <불변자본 constant capital> ━기계 또는 원재료가 ━ 이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일이 없이 재화의 가치로 전환된다. 모든 잉여가치는 가변자본, 즉 임금 지불에 해당하는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불변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관계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불린다. 잉여 가치의 가변 자본에 대한 관계는 <착취율>이라고 부른다.) 이 분석 적 관계에서 우리는 어느 주어진 기업, 또는 부문에 있어 가변자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잉여가치도 그만큼 더 많아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기계화가 증가되면 될수록 잉여가치는 점점 적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분명 하다. 

제3부 146 평균 이윤은 총자본, 즉 불변자본과 가면자본의 합에 비례한다. 그러나 우리는 잉여가치가 가변자본, 즉 인간 노동으로부터만 공제되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아가서 우리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자본주의 제도의 진화와 생산의 기계화와 더불어 변동하며 따라서 총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비율이 감소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윤율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변하는 데 비례해서, 즉 총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비율이 감소함에 따 라 그것에 비례해서 저하된다고 결론을 지었다. 


인간의 영향을 매개로 하는데, 자본을 축적하는 것도 인간이고 생산을 기계화하는 것도 인간이고 그다음에 가변자본의 비율도 줄어드는 것도 노동력을 투입하지 않으니까 그것도 이제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작용을 하지만 사실은 일단 이 체제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인간과는 무관하게 초월적인 어떤 법칙 같은 것이 작용해서 역사적인 필연성에 따라 이 체제가 멸망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 체제가 멸망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뭔가가 개입되어서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려고 해서 이 체제를 작동을 시켰는데 결국 이윤이 추구되지 않아서 작동이 멈추게 되는, 말 그대로 비극의 어떤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아롱이 여기서 지적하는 게 중요한 포인트인데, 가변자본의 비율이 저하된다고 하면 노동자들이 이제 실업자가 된다. 그러면 궁핍한 상태에 빠지게 된단. 그렇게 궁핍한 상태에 빠지게 되면 마르크스는 대중이 분노하고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당연하게 전제하는데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서 궁핍화라고 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경제적으로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라는 뜻인데 그게 사회적인 현상이고 사회적인 사태이다.  그러니까 경제적 법칙만 가지고는 해명 안 되는 그런 영역에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멸망이라고 하는 결과를 초래하려면 경제적 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것들이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는 경제학자의 선을 넘어서 정치적 예언가 또는 행동주의자의 자리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이렇게 도약이 생겨나버린다.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도약이 생겨나고 그런 도약이 마르크스의 정밀한 정합성을 방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은 다시 이제 철학적 성격을 가진 어떤 모호성들, 서로 다른 영역에 있는 이론과 이론을 서로 접붙이려고 하다가 생겨나는 여러 가지 부작용들 또는 부정합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다. 

제3부 146 이윤에 기초한 경제의 경쟁적 메카니즘은 자본의 축적, 생산의 기계화, 총자본에 대한 가변자본 비율의 저하를 가져오고 이번에는 그것이 이윤율 저하를 초래하며 결국은 자본주의의 종말에 도달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기본적 패턴에 직면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영향을 매개로 하나 동시에 각 사람의 영향을 초월하여 작용하는 역사적 필연성, 즉 한 체제를 그 활동의 고유한 여러 법칙 때문에 멸망으로 이끌게 되는 역사적 매카니즘이 그것이다. 

제3부 147 사실 우리가 <입증한 것>은 이윤율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변화의 결과로 저하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윤율이라야 자본주의가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단 말인가? 엄밀히 말해서 《자본론》 속에는 이에 대한 회답이 없다. 왜냐하면 어느 특수한 체제의 기능 작용에 필요불가결한 특정의 이윤율을 어떠한 합리적, 도식적, 이론도 결정할 수 있게 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 자면 엄밀히 말해서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은 자본주의의 기능 작용이, 기계화 또는 생산성의 증가에 비례해서 더욱더 어렵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최후적 파멸의 불가피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그 파멸이 일어나는 순간을 특별히 지정하는 것도 아니다.  

제3부 148 이러한 명제들은 프롤레타리아화와 궁핍화를 다루는 명제들이다. 프롤레타리아화란 자본주의적 체제의 발전과 더불어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있는 중간계층이 점점 줄어들고 또한 이 중간계층의 사람들의 많은 수가 프롤레타리아에게 흡수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핍화는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서 프롤레타리아가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경향이 생기는 과정이다. 만약 우리가 더 많은 것이 생산되면 될 수록 노동 대중의 구매력이 더욱더 제한받는다는 것을 가정하면 대중이 반항하는 경향을 가지리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가정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자멸의 메카니즘은 사회학적 메카니즘이며 그것은 여러 사회 집단의 행동을 통하여 작용한다.  

제3부 148 따라서 자멸에 관한 자본주의적 변증법은 두 가지 표현이 가능하다. 변함없이 증가하는 생산력과 대중에게 분배되는 수입을 결정하는 생산 관계 사이의 모순을 새롭게 표현하는 경제적 변증법 및 프롤레타리아화한 노동자들의 불만의 증가와 폭동으로 말미암은 사회학적 변증법이 그것이다. 

제3부 150 의심할 것 없이 자본주의의 파멸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마르크스 야심의 하나였다. 내 생각으로는 《자본론》에 있어서 왜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 작용이 어려운가, 또는 더 정확히 말해서 왜 그것이 점점 더 어려워가는가(비록 이 마지막 명제를 나는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것으로 생각하지만)의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대중들이 자기들의 처지에 반역하는 폭동이 그 증거가 아닌 바에야 자본주의의 자멸에 대한 증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만약 대중의 처지가 사실상 심한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자본론》은 그 체제의 파멸을 원칙적으로 필연적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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