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2

 

2023.11.24 🎤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2

도서출판 비아 10주년 기념 특별 강연 - 인문학자의 비아 
강사: 강유원(철학 선생, 서평가) 
일시: 2023. 11. 24. 오후 7시-8시 30분 
장소: 대한성공회 대학로교회 

 

텍스트: https://www.buymeacoffee.com/booklistalk/ninutaxale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강의의 제목이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신앙의 길이란 우리가 신을 향해서 뭔가 구한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끝까지 버티는 것을 말씀을 하셨다.  

자기가 신앙을 가지게 된 각자의 개인의 역사가 있다. 그 개인의 역사와 신앙을 가지게 된 계기가 신앙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아주 특정한 성격도 거기에 작용을 할 것이다. 저는 우는 소리를 잘 안 하는 게 제 성격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에게 아쉬운 소리하고 싶지 않다. 이를 악물고 끝까지 버텨보는 게 그게 제가 가지고 있는 태도이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생색내는 것이다. 신이 나한테 생색 낼 틈을 주고 싶지 않은 것, 그래서 끝까지 버텨보는 것, 못된 생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선생님을 가리킬 때 서평가라고 하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서평가라는 표현을 상대적으로 좀 더 선호하시는 이유 혹은 서평가라는 정체성을 어디서부터 갖게 되셨는지 
호칭들에 대해서 제가 좀 민감하니까 말하겠다. 철학자라는 호칭을 쓰면 안 된다. 한국에서 철학자라는 호칭은 경멸로 받아들이기가 쉽다. 일반적으로 철학자라고 하는 게 경멸어이다.  공부는 안 하고 그냥 인생에 관한 일반론을 떠들어댄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철학자라는 표현 별로 안 좋아하고, 그다음에 인문학자라고 하는 말에 진짜 안 좋아한다. 저는 제가 인문학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인문학이라고 하는 영역 자체가 급조된 분야이다. 아까 19세기부터 서양이니 종교니 학문이니 이런 말이 의미가 있어졌다고 말했다. 도이치 신인문주의 그러니까 괴테의 시대에 독일에서 급조된 영역이다.  인문학에 문사철이 들어간다 이런 것은 진짜 마케팅용 구별이다.  

 

서평가라고 하는 말은 정말 이건 제가 좋아하는 말이다. 이름 그대로 책에 대해서 평가하는 사람이다.  문학 비평가는 안 읽고도 할 수 있는데, 서평가는 책에 대해서 평가하는 거니까 서평가라는 건 정말 제가 좋아한다. 


그리고 오늘 강연도 사실 책 읽기를 권하기 위해서 온 것이지 제가 무슨 신앙에 대해서 무슨 큰 힘이 있겠는가.  서평가라는 것은 좋아하는 첫째 이유는 저에게는 적어도 책을 읽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라고 하는 것이 제 인생에서는 해방이다. 어쨌든 배운 사람들이 대접받는 나라인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책을 읽고 있을 때는 적어도 스스로도 고통스럽지 않았고 남들이 저한테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평가라고 하는 건 아마 모르긴 해도 제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서 아주 중요한, 그리고 《책 읽기의 끝과 시작》을 보면 왼쪽 위에 빨간 띠 선에 armarius라고 써있다. 예전에 armarius.ent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한 적이 있는데 중세 수도원에 사서 수도사들이 armarius이다. 그 호칭을 굉장히 좋아한다. 서평집을 계속 낼 것인데 armarius 시리즈이다.


선생님께서는 고전 텍스트를 강조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신앙에 관련해서도 울부짖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고, 텍스트를 대할 때도 무덤덤하게 초연하게 하는 방식을 강조하시는데 이런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되는 건지 

간단하게 얘기하면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이다.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인데 소크라테스가 한 말을 그대로 가져다가 플라톤이 써놓은 것이 아니라 플라톤이 써놓은 것이다. 또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를 읽으면 페리클레스의 추도식 연설이 있는데 double quotation으로 들어가 있다.  그렇다고 녹취해다가 뜬 건 아니고 사실 투퀴디데스가 쓰고 싶은 대로 쓴 것이다.  그러니까 신학적으로는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예를 들어서 마르코의 복음서에 보면 산헤드린의 신문장면이 있고 double quotation에 들어가 있는 게 문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한 말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은 아니다. 마르크가 쓰고 싶은 마음에 쓴 것이다. 저는 사실 그렇게 읽는다. 그렇게 읽는 게 일단 제가 배운 슐라이어마허 이래로 전개된 해석학의 기본 원리이다. 누구 편도 들지 않고, 저는 가령 마르코의 복음서를 읽는다 하면 마르코의 편을 들어서 읽는다. 마르코가 하고 싶은 말을 썼겠지 라고 생각을 한다. 신학과 학생들은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는데 복음서 하나 읽어서 은총을 받을 거면 그런 은총은 안 받는 게 낫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모습은 그게 아니라 우리가 평생을 이를 악물고 살아내서 자기의 신앙을 간신히 증명할 수 있을지 말지도 모르겠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야 된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게 유한자로서 할 수 있는 태도이다.  


선생님은 한편으로는 팟캐스트라든지 이른바 현대 문명의 이기들인 아이폰도 엄청 잘 쓰시고 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아날로그인 만년필이라든지 3공노트 이런 것들을 좋아하신다. 각각을 어떤 원리에 따라서 하시는지
예전에 90년대 말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닌 회사가 IT 회사였다. 그때 제가 그런 걸 한번 확연하게 느낀 게 있었다. 저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일단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범위 안에다가 지식 정보들을 놓아두는 게 되게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팟캐스트는 성의만 있으면 인터넷이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다. 그것이 지식인이 해야 할 최소한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약간의 사명감이라기보다는 공부하는 게 그렇게 뭐 대단한 건가 하는 생각이 좀 있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좀 나눠 가지면 어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책 읽기와 그런 도구 사이에는 그렇게 깊은 관계는 없다. 만년필은 다 잘난 척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여기 제 가방도 있는데, 가방과 만년필은 공부하면서 괴롭고 그러니까 자기를 위로하기 위한 어떤 그런 도구들일 뿐이다. 그래도 만년필은 있어야 된다. 만년필 연필이 있어야 되는 이유를 현학적으로 몇 가지 생각해 봤는데, 첫째 멀티펜을 쓰면 기록해놓은 것은 쉽게 버려지게 된다. 3공노트 이런 데다가 만년필로 정리해놓은 건 오래도록 가지고 있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공부를 그렇게 했구나 라는 것을 기록하게 된다. 우리의 개인 삶 자체가 역사적인 형성물이다. 그런 역사적인 형성물을 남기기 위해서는 기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니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아닌데 공부를 오래하는 사람은 된다. 공부를 오래 할 수 있는 방법은 기록물들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다. 저는 독서카드라든가 강의 노트라든가 그런 것을 디지털 문서로는 보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의외로 문서 보관 드라이브를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  

전자책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다. 《에로스를 찾아서》나 《숨은 신을 찾아서》와 같은 책들은 종이로 봐야 한다. 종이책 안에다가 몇 가지 편집적인 즐거움들이 숨어 있다. 전자책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강의하면서 여러 차례 말했듯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유한한 존재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은 생각이다. 그런 사유라고 하는 것, ‘도대체 생각이 없어'라는 얘기를 듣지 않도록 기독교도들로서, 여기 오신 분들은 모두 다 기독교도라고 전제하고, 무한한 존재에 대해서 즉 신에 대해서 사유하는 삶을 여러 가지 책을 도구로 해서 누리셨으면 하는 게 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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