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회사상의 흐름(7) ━ 토크빌(1)

 

2023.12.04 📖 사회사상의 흐름(7) ━ 토크빌(1)

📖 사회사상의 흐름

❧ 토크빌
- 토크빌, 콩트, 마르크스의 비교 
콩트와 마르크스는 경제현상과 사회의 정치적 조직에 관심. 콩트가 산업 사회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술관료 조직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 비전을 가졌다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집중하여 그것을 혁명가의 묵시록 비전으로써 전복하는 데 관심  

토크빌은 프랑스혁명 이후의 민주정 사회라는 현실에 관심. 민주정 사회에는 여러 종류의 경제적 구조, 정치제도가 결부될 수 있는데 어떤 정치제도가 자유를 보장하는지가 집중적인 탐구 과제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아메리카의 민주정 사회가 자유로운 까닭을,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혁명⟫은 프랑스가 아메리카와 같은 자유로운 사회가 되지 못한 까닭을 탐구 

- 민주정과 자유의 규정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개념 규정을 찾아볼 수는 없다. 민주정은 “조건들의 평등”(égalité des conditions)이 구현된 상태, 프랑스혁명 이후의 사회는 바로 이 조건에 근거하여 규정할 수밖에 없다.  

자유는 무엇보다도 안전, 즉 자의적인 정부로부터 안전을 보장하는 것. 권력이 권력을 저지하여 절대 권력을 방지하는 것, 즉 다양한 견제 장치가 있는 상태  
—> 조건들의 평등이 보장된 상태에서 전제주의에 떨어지지 않고 자유를 지킬 수 있는가(⟪앙시앙 레짐과 프랑스혁명⟫, 3.3)  

- 아메리카의 민주정이 자유로운 원인 
· 아메리카가 처한 우연적 특수한 상황, 즉 지리적 공간 
· 여러 법률 
· 관습과 예법 

고대의 민주정은 평등한 시민들과 공동체의 덕에 의존했다면 근대의 민주정은 상업적·산업적 상황에서 생겨나는 자기 이익의 추구에 기초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서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 흐름》 제4부 토크빌을 읽으려고 한다. 지난주에도 월, 화, 수 세 번에 걸쳐서 마르크스를 읽었는데, 지금 이렇게 읽는 이유는 요즘에 「20세기 읽기」를 하면서 몽테스키외는 아닌데 콩트, 마르크스, 토크빌 이런 사람들, 즉 18세기 19세기를 규정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잠깐 《하버드-C.H.베크 세계사》에서 언급이 되었다. 지금 이들의 이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분석의 도구를 제공한다 라고 말하면 막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들이 사상적으로 어떻게 그 시대를 보았는가 하는 것을 한 번쯤은 이렇게 레이몽 아롱의 책을 통해서라도 정리를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토크빌까지는 하려고 한다. 그리고 제5부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도 다음 주에 간단하게라도 정리를 하려고 한다. 《사회사상의 흐름》 후편이 제6부가 뒤르켕이고 7부가 파레토, 8부가 베버이다. 6부와 7부는 그냥 두고 베버는 기회가 되면 한 번 해서 이 책을 마무리를 하려고 생각을 한다. 연대를 봐도 두 개의 파트로 나누고 있는 게 적절해 보인다. 몽테스키외는 1689년에 태어났으니까 이 사람은 17세기와 18세기 전반을 살았던 사람이고, 콩트는 1798년생이니까 아주 명백하게 1800년대를 살았고 그다음에 마르크스가 이제 1818년에서 1883년이니까 19세기, 토크빌이 마르크스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이 두 사람은 19세기를 쫙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뒤르켕이나 파레토나 베버나 이런 사람들은 아주 명료하게 20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둘로 나누는 게 적당해 보인다.  특히나 후편의 서론을 보면 이렇게 얘기를 한다. 이 사람들은 "20세기에 접어드는 유럽의 역사적 현실에 관련되어 있었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 사람이 다 그들의 대부분의 저작의 출판을 1차대전이 발발될 때까지 완료했었다." "그들 사상의 근본적 테마━그들이 보는 이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종교와 과학의 관계였다고 말해서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그래서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를 쓴 것도 종교와 과학의 관계 그런 것들이다. 막스 베버의 책은 굉장히 대가의 책이기 때문에 함부로 폄훼할 수는 없지만 안 읽어도 되는 게 꽤 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막스 베버의 책 중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는 유럽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분석하는 데는 그렇게 도움 안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될 그리고 토크빌에 대해서는 제가 열심히 읽은 사람이어서 말하기가 쉽다. 

후편 서론 291 파레토는 1848년, 뒤르켐은 1858년 그리고 베버는 1864년에 탄생했다. 뒤르켐은 1917년, 베버는 1920년, 그리고 파레토는 1923년에 사망하였다. 이 세 사람은 모두 19세기의 후반기에 속한다. 그들의 사상은 19세기의 후 4반세기, 또는 마지막 1/3의 시기에 형성되었고, 20세기에 접어드는 유럽의 역사적 현실에 관련되어 있었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 사람이 다 그들의 대부분의 저작의 출판을 1차대전이 발발될 때까지 완료했었다. 

후편 서론 292 그들 사상의 근본적 테마━그들이 보는 이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종교와 과학의 관계였다고 말해서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토크빌 부분을 보면 토크빌과 콩트, 마르크스를 비교를 하고 있다. 우선 레이몽 아롱에 따르면 콩트와 마르크스는 경제현상과 사회의 정치적 조직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두 사람은 정말 말 그대로 사회학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콩트는 산업사회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리고 산업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을 때 기술관료 조직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 조직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 아롱의 평가이다. 그러니까 신학적 · 군사적 사회 유형이 있고, 과학적 · 산업적 사회 유형이 있는데 콩트는 그것을 가져다가 최종적으로 3단계의 법칙에서 실증적 시대라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이제 기술 관료적 해결책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한테 어필하기 위해서는 종말적인 철학이 거기에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콩트에 대한 평가이다. 

제4부 197 토크빌의 역사적 진단은 콩트나 마르크스 그것과는 다르다. 콩트처럼 산업사회의 현실에 치중하고 거기에 우선적 관심을 기울이거나 마르크스 같이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에 우선적 관심을 주지를 아니하고, 토크빌은 민주사회의 현실에 우선적 관심을 두었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로 산업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르크스는 산업사회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라고 하는 것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에 집중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혁명가의 묵시록 비전으로서 전복하는 데 관심이 있다. 다르게 말하면 마르크스나 콩트나 둘 다 기본적으로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산업사회라고 하는 근대적 산업사회라고 하는 것이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그게 착취exploitation를 메커니즘으로 하는, 즉 착취를 통해서 이윤을 수탈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 모두 다 산업사회라고 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콩트는 그것이 기술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 기술 양식,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한 것이고 마르크스는 그것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라고 하는 것으로 조직되어 있다 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산업사회가 어떤 식으로 조직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고 본다면 마르크스는 거기에 정치적인 어떤 전망과 철학적인 사변을 기묘하게 혼합을 해서 묵시록을 하나 썼다. 그러니까 똑같이 산업사회라고 하는 것이 눈앞에 놓여 있어도 어떤 단면을 잘라서 거기에 접근에 들어가는가의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는 그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라고 하는 게 결정적인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만 전복한다면 산업사회라고 하는 것이 가져다주는 아주 못된 측면들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산업사회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얘기를 하는데 그러니까 여전히 산업사회이다. 그런데 그것을 조직하는 방식은 반드시 자본주의적인 방식인가.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또는 마르크스가 분석했던 또는 마르크스 시대에 통용되던 자본주의적인 방식은 아니다. 그 산업사회를 조직하는 자본주의의 방식도 달라졌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대면했던 자본주의적인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분석이 오늘날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왜 유효성을 잃었는가 라고 얘기할 때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자본주의 사회 아닌가, 그런데 왜 마르크스를 많이 읽을 필요가 없는가 또는 깊이 있게 분석할 필요가 없는가 이렇게 말을 한다면 다시 정리해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나 모두 산업사회인 건 맞다. 그런데 그 산업사회를 어떤 식으로 조직할 것인가 라고 하는 지점에서는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마르크스 당시의 자본주의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자본주의는 다르다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분석했던 자본주의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자본주의가 다르니까 마르크스의 분석이 원리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이 있을지는 몰라도 아주 상세하게는 받아들이기가 곤란한 지점들이 있다. 그게 첫번째이다. 두 번째는 마르크스가 대면했던 산업사회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가 또 많이 다르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 자체가 달라졌다.  그러니까 생산력과 생산관계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적인 어떤 생산 양식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용어가 여전히 유효하기는 하지만 양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마르크스의 이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결함인데 마르크스의 이론은 그냥 순수하게 경제적 분석만 했으면 괜찮은데, 또 그것도 괜찮지 않다, 사회학과 경제학을 결합한다는 게 그렇게 쉽지 않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정치적 전망과 철학적 사변을 버무려 넣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떼어내야 된다, 그것이 바로 아롱이 지난번에 얘기했던 내용이다. 저도 굉장히 공감하고 있는 바이고 마르크스를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 항상 이 점에 주의해야 된다 라고 얘기를 하는 지점이다. 

토크빌은 산업 사회 자체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 사회가 그냥 그대로 진행되어서, 아롱도 지적하고 있는데, 부르주아 사회가 계속 진행될 거다 라고 하는 것에 딱히 큰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오히려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민주정 사회라고 하는 것이 도래하였다 라는 현실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저는 민주주의democratism라는 말과 민주정democracy을 구별해서 쓰는데, 물론 책 제목은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로 되어 있지만 저는 이것이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을 가리키는 말, 민주정democracy으로만 생각한다. 민주정 사회에는 어떤 종류의 정치적 제도 그리고 경제 구조들도 결부가 될 수가 있다. 그러니까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그런 얘기할 때 의사결정 방식으로는 민주정을 채택하지만 그들의 경제 구조는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고 얘기될 수 있다. 토크빌은 어떤 제도가 결부되든 간에 어떤 제도가 가장 잘 자유를 보장하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와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이 토크빌의 대표적인 두 개의 저작인데, 아롱에 따르면 말하자면 한 권의 책을 양쪽으로 펼쳐놓은 것처럼 돼 있다. 왜냐하면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아메리카의 민주정 사회가 자유로운 까닭을 탐색을 했다. 

제4부 200 《구체제와 프랑스 대혁명》은 다음 질문의 회답을 위해 저술된 것이다. 왜 프랑스는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그 진화 과정에 있어서 자유주의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데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은 미합중국은 저렇게 잘 나가는데 왜 앙시앙 레짐 이후에 프랑스 혁명이 벌어졌고 지금까지 와 있는데 왜 프랑스는 안정적이지 못할까, 그 까닭이 뭘까, 그러니까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성공 사례 분석이고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은 실패 사례 분석이다. 그러니까 같은 주제를 놓고 두 개의 측면에서 분석한 것이다 라고 보는 게 적당한 규정이 되겠다. 그러면 토크빌이 말하는 민주정은 무엇이고 자유는 무엇인가. 아롱도 지적하고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념과는 다르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개념 규정을 토크빌의 이 책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읽어보면 '이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얘기하네'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일단 첫 문장에서 얘기하듯이 조건들의 평등이 구현된 상태가 토크빌이 말하는 민주주의이다. 조건들의 평등이 구현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모든 세습적 특권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 프랑스 사회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귀족정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이런 조건에 근거하여 규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토크빌에게는 지금 자기네 나라가 산업이 얼마나 발전했는가 이런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당면 문제가 바로 조건들의 평등이 이루어진 곳,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인데, 이 자유라고 하는 것도 가령 이사야 벌린이 말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자유에 관한 4개의 시론 Four Essays on Liberty》 책에 나온 것 같은 그런 자유가 아니라 안전, 즉 자의적인 정부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는 것이 자유이다. 그러니까 굉장히 토크빌의 자유도 즉각적으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러려면 권력이 권력을 저지한다. 절대 권력을 방지하는 것, 즉 다양한 견제 장치가 있는 상태가 토크빌에서는 자유이다. 토크빌의 문제의식이 서양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조건들이 평등이 보장된 상태에서 전제주의에 떨어지지 않고 자유를 지킬 수 있는가. 이게 바로 이제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 3권 3장에 나오는 얘기인데 이게 바로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와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 모두 다 공통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제4부 202 토크빌에게 민주주의라는 것은 여러 조건의 평등화이다. 구체제에 있어서와 같은 서열이나 계급의 차별이 없고 그 집합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개인이 사회적으로 평등한━되풀이 말하여 사회적으로 평등한━그러한 사회라야 민주주의적이다. 그런데 이 평등이라는 것은 지적인 평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이야기요 또한 경제적 평등을 말하는 것도 아닌데, 그것은 토크빌에 따르면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사회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은 조건들에 관한 하등의 세습적 차이가 없다 는 것이요, 또한 모든 직업, 모든 전문 직업, 모든 칭호 및 모든 명예를 모든 사람이 얻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4부 205 <자유>의 내용을 구성하는 첫 용어는 <안전 security>, 즉 자의적인 정부로부터의 안전보장이다. 권력이 법에 따라서만 행사될 때 개인들은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인간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어느 개인도 부패됨이 없이 절대권력을 휘두를 만큼 충분한 덕을 가지는 것은 아니므로━다시 나는 토크빌을 부연하고 있다━절대권력은 어떤 자에게도 줄 수 없는 것이다. 

 

아메리카의 민주정이 자유로운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는 아메리카가 처한 우연적 특수한 상황 그다음에 지리적 공간이다. 땅이 넓어서 그렇다. 그다음에 여러 가지 법률이 있고 관습과 예법이 있다. 그런데 토크빌은 지리적 공간이라고 하는 건 일단 차치하고 법률보다는 관습과 예법 즉 습속에 더 중요한 우선권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자율적 결사체 또는 사회체라고 하는 것, 그런 관행들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한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제4부 207 이제 《미국 민주주의》를 고찰하겠는데 토크빌의 다음 질문을 염두에 두자. 왜 미국 민주주의는 자유스럽고 자유주의적인가? 나는 자유민주주의의 결정요인, 또는 변수에 관한 이론도 함께 보여주는 토크빌 자신의 여러 요인의 열거를 인용하고자 한다. 토크빌이 말한 세 가지 종류의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① 미국사회가 처하게 되었던 우연적이고 특수한 상황 ② 여러 법률들 ③ 관습과 예법.

제4부 217 전형적인 고대 민주주의는 평등주의적이었고 또한 절제적이었다. 시민들은 평등에 기울어져 있었으나 상업적 고려에 대해서 우위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고대 공화정은 평등주의적이었 으면서도 덕치주의였다. 그들은 평등주의적이었으나 호전적이었다. 토크빌이 본 현대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상업적, 산업적 사회이다. 따라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현대사회에 있어서 지배적 감정이 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실로 현대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자기 이익 추구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몽테스키외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는 토크빌에 따르면 이해관계이지 덕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토크빌의 논의의 맥락에서 알 수 있듯이 이해관계와 덕은 공통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양자의 경우에 있어서 시민들은 그 스스로 하나의 도덕적 훈련에 복종해야 한다. 양자의 경 우에 있어서 국가는 오직 사회 자체가 그 성원에게 행사하는 영향을 통해서만 존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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