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회사상의 흐름(9) ━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1)

 

2023.12.11 📖 사회사상의 흐름(9) ━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1)

📖 사회사상의 흐름

❦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
❧ 1848년의 혁명의 정치적 지형
-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역사 연대
프랑스 대혁명. 1789.

프랑스 제1공화국. 1792. 9. - 1804. 5. 
국민공회. 1792. 9. 21. - 1795. 10. 26. 공포정치 시기(1793-1794)포함
테르미도르 9일(1794. 7. 26.) 로베스피에르 몰락, 공포정치 종식
총재정부. 1795. 10. 26. - 1799. 11. 9.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1799. 11. 9. 나폴레옹의 군사 쿠데타
통령정부. 1799. 11. 10 - 1804. 5. 18. 나폴레옹은 종신 통령
프랑스 제1제정. 1804. 국민투표에 의해 나폴레옹 1세로 즉위
나폴레옹 1세 실각. 1814. 
빈체제. 1814-1815. 
루이 18세, 국왕으로 즉위
샤를 10세, 루이 18세 사망 후 국왕으로 즉위
7월 혁명. 1830. 7. 28. 샤를 10세 해외 추방
7월 왕정. 1830. 8. 9. 루리 필리프 1세 즉위. 
2월 혁명. 1848. 2. 22. 루이 필리프 영국으로 도망

제2공화국. 1848. 2. 24. - 1852. 12. 2. 르드뤼 롤랭과 라마르틴이 지도하는 임시정부, 1848. 12. 10.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당선, 1851. 12. 2.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프랑스 제2제정. 1852. 12. 2.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국민투표로 황제에 즉위(나폴레옹 3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프랑스의 패배,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잡힌 후 영국에서 살다가 사망

제3공화국. 1871. 아돌프 티에르가 대통령으로 취임
파리 코뮌. 1871. 3월 18 - 5. 28. 
제1차 세계대전. 1914. 8. 8대 대통령 레이몽 푸앵카레

제4공화국. 1946. 10. 27. - 1958. 10. 4.

제5공화국. 1958. 이후 - 현재


- 1848. - 1851. 입헌군주제가 파멸되고 공화정이 그것을 대신하였으나 다시 공화정이 파괴되어 권위주의적인 제정으로 바뀜.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임시정부의 일시적 지배, 보통선거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가 제정을 수립하려 하자 그것에 대항한 입법의회(공화국을 지지했던 왕당파 다수가 포함)의 투쟁이 있던 기간  
- 20세기에 파시스트로 알려진 사람들, 자유주의적인 민주정 지지자들,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삼각 갈등. 이는 1920-1933 사이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볼 수 있다. 1848년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오늘날[1960년대]의 공산주의자들과 똑같은 성향을 가진 이들이 아니며, 1850년의 보나파르트주의자들도 무솔리니와 같은 파시스트는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에 있어서 이 시기는 주요한 적대자들과 경합자들의 20세기적 유형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 콩트, 토크빌, 마르크스는 이 시기를 분석하고 비판하였으며, 이 사건들에 관한 그들의 판단은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 콩트 
- 일시적 독재라 불렀던 바를 찬성하며 대의적 자유주의적 제도의 붕괴를 환영. 콩트에게 의회제도는 영국 역사의 우연한 사건, 귀족계급이 하원, 부르주아지, 일반 국민과 연합하여 왕정의 영향과 권위를 감소시시키는 것에 대해 비판. 나폴레옹 3세가 의회의 공론가를, 마르크스가 ‘의회의 크레틴병(crétinisme)’이라 불렀던 것의 폐지를 찬성  
- 콩트가 구상하고 뒤르켐이 실천에 옮긴 사회학은 중심 과제를 사회성에 두었지 정치성에 둔 것은 아니었다. 뒤르켐은 사회적 문제, 직업윤리의 문제, 직업인들의 조직체의 재조직 문제에 정열적인 관심을 가졌으나 의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차적인 것이라 보았다.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을 읽겠다. 사실 이 레이몽 아롱의 책에서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이 제5부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이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공산당 선언》과 같은 것들이 구체적으로 일어났던 사태를 바탕으로 해서 쓰인 부분들이다. 사실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서 아주 직접적인 논평을 썼다든가 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드물기 때문이다.   특히나 마르크스 시대만 해도 그런 정도의 언론이 활발하게 있었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제가 그런 점에서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단순히 이상국가론이 아니라 그 당시에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에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드라마로 만들어서 드라마처럼 쓴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고 그것을 한번 읽어보는 게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게 제가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책을 쓸 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이다. 왜냐하면 소포클레스나 아이스퀼로스나 이런 사람들의 드라마를 보면 그 드라마가 반드시 옛날에 전해져 내려오던 어떤 mythos들을 개작해서 텔레비전 연속극처럼 만든 게 아니다. 분명히 어떤 당시 사람들에게 뭔가를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실효성 있고 정치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드라마를 보고 자란 사람이고 본인도 드라마 작가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텍스트를 충분히 시의성 있는 하나의 정치적인 대화, 말 그대로 정치적인 대화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러한데 그때 이후로는 그런 사상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재미있는 게 콩트는 몰라도 토크빌이나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 시기에,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또는 유럽 대륙 전반적으로 일어난 그 시기에 굉장히 활발하게 정치적인 활동을 했고, 특히 마르크스는 인텔리겐차에 불과했다면 토크빌은 그 당시에 정부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의견을 내놓았는가 어떤 비판을 해놓았는가 어떤 진영의 편을 들었는가 이런 것을 보는 것은 정치사회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게 왜 그러는가. 레이몽 아롱은 1848년 혁명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얘기한다. 그것부터 먼저 얘기를 해보면 1848년에서 1851년 사이에 프랑스에서는 입헌군주제가 파멸되고 공화정이 그것을 대신했으나 그 공화정이 다시 파괴되고, 프랑스 제2제정이 성립하는 시기이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중에 나폴레옹 3세가 되는 제2제정이 성립하는 시기인데 이때가 흔히 하는 말로 프랑스의 격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한 토크빌의 그 생각들은 사실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토크빌은 1835년에서 1840년 사이에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를 저술했다. 그 시기가 7월 왕정 시기이다. 그다음에 토크빌의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혁명》은 1851년 쿠데타 이후에 정치에서 은퇴해서 썼다. 그리고 또 한 번 보면 회고록이 있는데 그 회고록도 좀 읽어볼 만하다.  그리고 토크빌의 저작 중에서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혁명》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어떤 분석서라기보다는 1848년에서 1851년의 어떤 사건들이 7월 왕정에서, 넓게 잡으면 1830년에서 1851년 사이에 그의 정치적 경험이 굉장히 강력하게 투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좋다. 레이몽 아롱도 그렇게 얘기를 한다. 

1848년에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임시정부가 일시적으로 지배를 했다. 그런데 보통 선거에 의해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정을 수립하려고 했다. 그것에 대항해서 입법의회가 투쟁을 하게 된다. 굉장히 복잡다단한 시기이다. 그 입법의회에는 왕당파도 이제 다수 포함되어 있는 굉장히 재미있는 시기가 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프랑스 연대를 아주 간략하게 보면 1792년에 프랑스 제1공화국이 성립한다.  그때부터 나폴레옹이 국민투표에 의해서 나폴레옹 1세로 즉위하면서 프랑스 제1제정이 될 때까지를 프랑스 제1공화국이라고 한다. 프랑스 제1공화국 안에는 공포정치 시기가 포함되는 국민공회도 있고, 테르미도르 반동 그다음에 총재정부,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그다음에 통령정부 그리고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 제1제정을 성립시킨다. 이렇게 해서 15년 정도에 걸쳐서 한 번 돌아가는데, 그다음에 나폴레옹 1세가 나폴레옹의 전쟁 패배로 1814년에 실각을 하고 유럽에서 빈 체제가 성립한다. 그리고 나서 프랑스는 입헌군주정이 된다. 루이 18세가 국왕으로 즉위하고 그가 죽은 다음에 샤를 10세, 그런데 7월 혁명이 일어나서 샤를 10세가 해외로 추방되면서 루리 필리프 1세가 즉위한다. 그게 바로 7월 왕정이고, 7월 왕정은 18년 후에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영국으로 도망가면서 끝난다. 그러고 나서 프랑스 제2공화국이 이제 성립하게 된다. 그때가 지금 1848년 2월 혁명이다. 2월 혁명부터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가 있고 1871년에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 그때까지가 사실은 굉장한 격동기이다. 그다음에 재3공화국이 1871년 그리고 나서 바로 파리 코민, 그다음에 1914년에 1차 세계대전, 현재는 프랑스 제5공화국이다. 

제5부 253 맨 먼저 1848년의 혁명, 제2공화국의 짧았던 그 기간, 그리고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는, 연달아 입헌군주제가 파멸되고 공화정이 그것을 대신하며 그리고 이번에는 공화정이 파괴되어 권위주의적인 제국의 체제로 바뀌는 것을 표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배경에는 항상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준하는 혁명의 위험 또는 망명이 존재했었다. 1848년부터 1851년까지의 기간은 사회주의적 영향이 강했던 임시정부의 일시적 지배가 있었고, 그 다음으로 국민의회와 파리시민 간의 투쟁, 또 그 다음으로 권위주의적 제국을 다시 수립하려 했던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에 대항한, 입법의회(공화국을 지지했던 왕당원의 다수를 포함했던)의 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1848년에서 1851년 사이에 일반적으로 20세기의 파시스트로 알려진 사람들이, 그때는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일텐데, 어쨌든 자유주의적인 민주정 지지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삼각 갈등이 있었다. 토크빌은 보수적인 왕당파인데 어쨌든 진영 논리로만 따지면 자유주의적인 민주정 지지자들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과 유사한 삼각 갈등이 이제 1920년에서 1933년 사이에 도이칠란트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가 굉장히 현대의 19세기, 20세기의 정치 체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여러 가지가 갈등 국면에 있고 세력을 어떻게 분포되고 어떻게 합종연횡이 일어났는가를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고, 동시에 현대 정치사상의 일종의 기원과 같은 시대와 장소이다. 레이몽 아롱에 따르면 1848년에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오늘날, 그러니까 아롱이 이 책을 쓴 시기인, 1960년대의 공산주의자들과 똑같은 성향을 가진 이들이 아니며 1850년에 보나파르트주의자들, 그러니까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제정 황제로 밀어올렸던 자들, 그게 무솔리니와 같은 파시스트는 아니다. 그러나 이미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에 있어서 이 시기는 주요한 적대자들과 경합자들이 어떤 행태를 보이고 어떤 식으로 서로 합종연횡을 하는가 이런 걸 보여줌으로써 20세기적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제5부 253 다른 말로 말하자면 1848년부터 1851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프랑스는 19세기 역사에 있어 다른 어떤 에피소드보다도 더 20세기의 여러 정치적 갈등에 유사한 하나의 정치적 갈등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사 실상 이 기간에 우리는 20세기에 있어서 파시스트라고 알려져 있는 사람들, 다소간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자들 및 사회주의자들 간의 삼각 갈등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을 또다시 우리는 1920년과 1933년 사이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며 현대 프랑스에 있어서도 아직 어느 정도까지 관찰할 수 있다. 

제5부 254 1848년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들과 꼭 같은 것은 아니었으며 1850년의 보나파르티스트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도 아니었고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자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에 있어서의 이 시기는 주요한 적대자들과 경합자들의 20세기적 유형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콩트는 간단하게 언급을 하겠는데 토크빌과 마르크스는 이 시기를 어떻게 비판하였는가는 촘촘하게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정치사회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핵심을 레이몽 아롱이 짚어주고 있다. 콩트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가 되니까 굉장히 찬성했다. 콩트는 자유주의적 대의 민주정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가 보기에 의회 제도라고 하는 것은 영국 역사의 우연한 사건에 불과하다. 나폴레옹 3세가 의회의 공론가를, 마르크스가 의회의 크레틴병(crétinisme)이라 불렀던 것의 폐지를 찬성했다. 크레틴병은 갑상선 관련 질환을 가리킬 때 쓰는데 마르크스가 이런 비유를 쓴 것은, 오늘날 보면 어이가 없는데, 그때는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 굉장히 쿨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콩트는 왕정의 영향과 권위가 감소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정치 체제 자체가 그렇게 이 사람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사회와 국가가 분리된다고 할 때 사회가 어떻게 잘 되는가만 신경 쓰면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는 그럭저럭 잘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콩트가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런 점에서 레이몽 아롱은 콩트가 구상하고 뒤르켕이 실천에 옮긴 사회학은 중심 과제를 사회성에 두었지 정치성에 둔 것은 아니었다 라고 지적을 한다. 그러니까 콩트나 뒤르켕은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뒤르켕 같은 경우는 정치적 관심이 거의 없다. 그래서 지난 번에 뒤르켕이나 파레토를 읽지 않고 베버를 바로 들어가겠다 라고 말한 것이다.  

제5부 254 콩트의 경우는 가장 용이하다. 여러 말 할 것없이 콩트는 자신이 비판적, 형이상학적, 따라서 무정부적 정신과 관련되었다고 믿었던, 그리고 또한 영국의 정치 혁명이 가지는 특유한 성질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던, 대의적 자유주의적 여러 제도가 붕괴하자 심히 기뻐하였다.  

제5부 254 콩트에게는 의회제도는 보편적 사명을 가진 정치제도가 아니라 영국 역사의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영국을 모방한 대의적 제도들을 프랑스에 도입하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역사적 오류가 될 것이었다.  

제5부 259 콩트가 구상하고 뒤르켕이 실천에 옮긴 사회학은 그 중심 과제를 사회성에 두었고 정치성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에 종속시키는 것은 <기본적 사회적 현실태>를 중시하고 의회를 격하시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뒤르켕도 <사회학>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콩트가 의회제도에 가졌던 것과 비슷한 적의나 경멸이 곁들인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뒤르켕은 사회적 문제, 직업윤리의 문제, 직업인들의 조직체의 재조직의 문제에 정열적인 관심을 가졌으나 의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비록 경멸의 대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제2차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일단 콩트는 그렇다는 것과 이 시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유념해 둘 필요가 있겠다.
다음에는 토크빌을 상세하게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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