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1

 

2023.11.24 🎤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1

도서출판 비아 10주년 기념 특별 강연 - 인문학자의 비아 
강사: 강유원(철학 선생, 서평가) 
일시: 2023. 11. 24. 오후 7시-8시 30분 
장소: 대한성공회 대학로교회 

 

텍스트: https://www.buymeacoffee.com/booklistalk/ninutaxale


이번에 민경찬씨가 편집장을 하고 있는 비아 출판사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저는 철학 전공자이고 아무리 제가 신학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철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조금 범위를 넓힌다면 사회과학 정도로까지 갈 수는 있지만, 저는 의심만 가득 안고 가게 하는 그런 강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루터 얘기처럼 굉장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금 이 자리에 섰다. 미리 말을 하자면 광신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고 25살 무렵에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꽤나 오래된 가톨릭 신자이다.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도 강의를 조금 했었고 그다음에 북수원에 있는 예수회 수사들 수련원에서도 강의를 몇 년 했었고, 신학이 전혀 낯설거나 이런 것은 아닌데 그렇다 해도 한국의 상황에서는 본격적인 의미에서 신앙인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려운 사람이다. 저는 대개 보통 한 2시간 정도를 하는데 오늘 강의는 50분 강의를 하고 간단하게 쉬었다가 질의응답을 하겠다.  50분 동안 강의를 다 못할지도 모르니까 혹시 몰라서 미리 강의 자료를 여러분들에게 배포했다. 조심스럽게 공들여서 좀 써봤다. 레토릭을 다듬고 해서 써본 것인데, 거기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집중적으로 말을 하되 혹시라도 제가 얘기하지 않은 부분들은 강의 자료를 참조하면 되겠다. 

 

❧ 그 때 그 책을 읽었을 뿐이다
강의 자료를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때 그 책을 읽었을 뿐이다. 아무 데서나 신을 찾지 말며, 아무 때나 신을 부르지 말라. 넓이가 깊이를 만든다. 이 세 개는 어디서 베껴온 건 아니고 평소에 늘 스스로에게 다짐하기도 하고 하는 말이다. 책을 읽을 때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데 책은 그냥 읽는 것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은 게 나중에는 빙 돌아서 내가 그 책을 읽은 이유를 알겠다 그렇게 된다. 여기 강의 자료에도 적어 두었듯이 70년대를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80년에 대학을 갔다. 그때는 정말 살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한국 사회에서 잘 살아봐야겠다 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희망이 있네 없네 하는데 희망이라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그런데 군대를 갔다 와서 복학할 무렵에 종로서적에 갔는데, 이것을 왜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게르트 타이센의 《예수 운동의 사회학》은 사서 읽었다. 1981년 3월 10일에 초판을 발행했는데 책값이 2천 원이다. 저는 어쨌든 부동산 형편이 안 좋아서 책을 중간중간 재활용품에다 내다 버리는데, 이것은 꼭 가지고 있어야겠다 라고 해서 가지고 있는 책 중 하나가 이 책이다.  게르트 타이센의 《예수 운동의 사회학》이 아마 처음으로 읽은 신학 책일 것이다. 굉장히 감동 깊었다. 철학 책을 읽으면 아무 생각이 없는데 신학책을 읽으니까 감동이 오는구나. 역시 신학이야 라고 생각해서 신학을 공부할 뻔했다. 그 당시 철학과에 다니는 사람들이 신학 책을 읽고 있으면 굉장히 경멸적인 시선을 받았다. 숨어서 읽어야 했다. 여기 중간에도 써놓았지만 철학 전공자들은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이거나 해야 쿨해 보이고 진정으로 철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그들의 신념이니까 뭐라고 말하지 않겠지만, 그래서 게르트 타이센의 책은 지금까지도 나오는 족족 사서 읽는 편이다. 

이 책의 뒷날개를 보면 황선명 교수가 쓴 《민중 종교 운동사》 그다음에 이현주 목사님이 번역한 《민중의 복음》, 존 힉 원저의 《종교 철학 개론》 그다음에 야스퍼스의 《소크라테스 · 불타 · 공자 · 예수》 그다음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제가 다 사서 읽은 건 아닌데 몇 개는 샀고 나머지는 종로서적에 가서 서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아마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다 버린 것 같다. 어쨌든 지금도 게르트 타이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걸 왜 읽었느냐 물어보면 할 말은 없다. 우연히 읽었을 뿐이다. 《예수 운동의 사회학》을 그때 왜 이걸 읽었는지는, 책을 읽은 것에 대한 나중에 덧붙이는 정당화인데, 광신적 종교 운동에 빠져드는 어떤 그런 지침서가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서 이 책을 읽은 것 같다. 그래서 그 뒤로도 꽤나 대학 3~4학년 때 철학과 학생답지 않게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를 했고, 그러다 보니까 존 게이저의 《초기 기독교 형성과정연구》도 읽게 되고 학부 졸업 논문을 종교의 제도화에 관한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썼다.  철학과에서 참 유례없는 것이었다. 저는 그때부터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철학을 공부해도 그것이 나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가, 지금 나의 정신에게 무엇을 주는가 이것에 대한 어떠한 납득할 만한 답이 없으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한다. 강의 자료에 보면 알겠지만 신흥 종교 운동을 이끄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사라지면서 초기의 열광적 분위기가 가라앉고 다음 세대의 공동체에서 제도화된 교단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루었다. 그러다가 대학원에 가게 되었는데 대학원을 가게 된 것도 대학원에 가서 교수가 되어야겠다 라든지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철학과를 졸업해 보니까 딱히 공부를 한 것 같지 않아서 공부를 좀 더 해야겠 다라는 생각으로 대학을 갔다. 어떤 분야를 전공해야겠다 라든가 종교 철학을 해야겠다 라든가 그런 생각은 없었고, 학부 3~4학년 때 수업을 들었는데 4학기 연속 제가 A를 받은 선생님이 있었다. 그분이 나중에 제 지도교수님이 되었다.  내가 저 선생님 과목을 잘하니까 그걸 들으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해서 했더니 그게 실천철학, 형이상학 전공이 되었던 것이다. 철학과에서는 호메로스라든가 셰익스피어라든가 이런 문학책을 일체 읽지 않는다. 철학과야말로 편식의 덩어리들이다. 저도 철학 전공자이지만 철학자들이 인생에 대해서 뭘 얘기한다 그러면 다 입바른 소리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아는 게 별로 없다. 철학과에서 철학 책만 읽는데 철학책은 증류수와 같은 것이어서 삶의 지혜를 담고 있지 않다. 그냥 읽고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1990년대 말에 이제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때부터 호메로스도 읽고 셰익스피어도 읽고 신학책도 읽기 시작했는데, 그때 존 게이저의 책을 꺼내어 보니까 내가 예전에 신학책을 학부 때 몇 개 읽었구나 해서 그때부터 읽기 시작했다. 김진혁 교수가 쓴 《신학의 영토들》은 제가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을 소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책을 보면 제가 읽은 책이 별로 없다. 《신학의 영토들》을 읽으면서 제가 그동안 신학책을 안 읽었나 라는 어떤 착각에 빠질 정도로 굉장한 책들이 많다. 저는 성서 신학에 관한 것들을 집중적으로 많이 읽는 것 같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열심히 읽은 편인 것 같다. 사실 헤겔 철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사실 삼위일체론이나 폴 틸리히, 판넨베르크나 이런 쪽은 거져 먹는다. 헤겔을 전공하면 되게 쉽다.  그리고 헤겔 종교 철학이나 동방정교회, 분도 출판사에서 나온 이론서보다는 은둔 수행자들 그런 쪽을 많이 좀 읽었다. 그리고 칼 라너, 칼 바르트는 그럭저럭 읽은 것 같다. 이렇게 이것저것 두 없이 읽다 보니까 《신학의 영토들》처럼 '내가 읽은 신학 책들'과 같은 서평집을 쓸 만하지 않다. 그런데 김진혁 교수가 써놓은 걸 보니까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어떤 도서 목록을 만들어내는 게 쉽지 않다. 

신학책을 읽은 것은 사실 철학과에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사태인데 형이상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렇다. 어이없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제가 형이상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신학책을 읽은 건 저의 개인적인 취향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신학을 전공하고 있는 분들은, 선교 신학을 하신다든가 그런 것이 아닌 한은, 적어도 조직신학을 하는 분들은 일단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읽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다른 거 안 읽는다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안 된다. 적어도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형이상학 전공자와 서로 전공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연결고리들이 있어야 되는데 세속의 철학들을 잘 안 하는 것 같다. 이 부분은 조금 이따 다시 그 얘기를 하겠다.  


❧ 아무 데서나 신을 찾지 말며, 아무 때나 신을 부르지 말라
아무 데서나 신을 찾지 말며, 아무 때나 신을 부르지 말라는 제가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하는 기본적인 하나의 구호이다.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의 해제를 김진혁 교수가 썼다.  예전에 대학 강사 시절에 현대 유럽 철학의 영역에 들어 있으니까 실존철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도스토옙스키를 굉장히 좋아해서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책은 제가 다 읽어본다. 투르나이젠이 훌륭한 신학자라는 건 알겠는데 참으로 그 책이 못 마땅했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보면 두 페이지에 한 번씩 도스토옙스키는 이 자리에서 신을 찾는다 이런 얘기를 하니까 짜증이 나는 것이다.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책을 팔아먹기 위해서 신을 찾는 척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스토옙스키의 텍스트를 섣불리 신을 찾는 텍스트로 읽으면 안 된다 라고 생각한다. 제가 읽는 도스토옙스키의 독법은 그렇다. 숨 넘어가기 직전에 신을 한 번 찾았을 수 있는데, 도스토옙스키가 그렇게 자주 신을 찾은 것 같지 않다. 특히나 스스로도 《죄와 벌》을 쓴 것은 좀 낯간지럽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가끔 마을버스를 타거나 하면 교회 다니시는 분들이 '저번에 아파트 사놨는데 값이 올랐더라고, 기도 응답 받았어'라는 얘기들을 듣게 된다. 아파트 값이 올랐는데 신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무 데서나 신을 찾는다. 저는 기독교 신자라면 평생토록 신을 찾는 일이 한 번도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심중에 딱 품고 있으면서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한까지 최대한 버티고 버텨서 도저히 버티기 어려울 때에도 신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제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게 신이 우리에게 준, 말하자면 인간의 의무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초월적인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있는 것이지 내재적인 세속적인 삶을 사는 인간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 되고, 그것을 찾고 부르고 하는 것, 그래서 저는 큰소리로 기도하고 하는 것도 해본 적이 없다. 개인의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기도해라 그러면 마음속으로 어금니를 꽉 물고 기도한다. 그렇다 해서 제가 불가지론자이거나 또는 무신론자이거나 그러지는 않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관념은 아주 명백하게 기독교도의 신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강의 자료 두 번째를 보면 신을 부르는 소리가 온 세상에서 아주 시끄럽게 들리고 있다. 다른 학문들은 모르겠는데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적어도 원산지 콤플렉스에서는 벗어났다. 무슨 말인가 하면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철학 선생들을 했다. 그 사람들에게 배운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이 세운 나라의 대학에서 서양 학문을 했다. 어쨌든 식민지에서 뭘 했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철학을 한 셈이다. 사실은 서양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에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좀 특이하다. 기독교도 그렇게 전파되었다.  우리가 좀 믿을 테니까 좀 신부들 좀 보내봐하는 식의, 가톨릭의 역사가 그렇게 되어있다. 아주 특이하다. 그 뒤로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있고 한국에서 계속 공부한 사람이 있다. 적어도 이것이 뒤섞이면서 원산지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어떻게까지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한국어로 읽고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신학쪽은 어떠한 지 모르겠지만 기독교라고 하는 것이 지금 한국에 들어온 지가 굉장히 오래됐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이미 한국의 기독교이다. 지금 한국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이걸 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공부를 해야 된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러니까 영국 성공회는 어떻게 하고 있나 별로 안 궁금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기독교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을 봐야 하는데 뭐든지 나에게 복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징이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오래된 종교적인 심성은 샤머니즘이다.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가만히 보면 샤머니즘적 특성들을 살짝살짝 입힌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나 자기 주체성이 굉장히 강하다. 그게 결합을 해서 말하자면 슈퍼 종교가 된다. 적어도 한국은 나에게 복을 주기만 하면 그 어떤 종교든 믿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이다. 그런 것들은 좀 피해야 되지 않겠나 생각을 해본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는 그런 것들이 좀 아쉬운 지점들이 좀 있다. 


❧ 넓이가 깊이를 만든다
넓이가 깊이를 만든다. 기독교 신자들이 기독교를 책을 통해서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게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데 비아에서 나온 책들만 읽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읽어도 좀 달리 읽어야 된다. 이 부분이 오늘 강조해서 얘기하고 싶은 부분이다. 종교라든가 학문이라든가 이런 단어들은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건 19세기부터이다. 너의 종교가 무엇인지를 물어서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식별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 19세기이다. 그러니 굉장히 조심스럽게 써야 되는 말이다. 플라톤 시대에는 종교라는 단어도 없었고 철학이라는 단어도 없었다. 플라톤은 자기가 철학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작업을 하지 않았고 폴리스의 시민으로서 작업을 하였다. 필로소포스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단어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철학 책을 안 읽어도 된다고 말하면 19세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백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독교 신자이냐 무슬림이냐 이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강의 자료에 맨 밑에 보면 동방문제Eastern Question라는 단어가 있다. 발칸 지역에서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을 갈라내기 시작한 게 19세기부터이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도 기독교적인 종교에 의해서 그런 구별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 구별이 차별이 되고 그렇게 된다. 특정한 시기에는 기독교 중에서도 감리교를 믿는 게 굉장히 쿨하다 하는 그런 증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일반적으로는 기독교 신자다 라고 하면 미친 놈이다 하는 소리하고 거의 동의어이다. 굉장히 조심스럽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자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좀 굉장히 무서운 단어가 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기독교 신자라면 이 정도의 책 읽기는 해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몇 가지 말하면, 깊이 있게 공부를 하고 싶다 그럴 때는 우물을 깊이 파려면 일단 표면을 넓게 파야 된다. 넓이가 깊이를 만든다 라는 말이 그런 뜻이다. 강의자료를 보면 과거에 어떤 커리큘럼에 따라서 뭔가를 만들어보고 했던 것들이 지금 서양 철학에서는 굉장히 해체되었다. 이를테면 철학과에 들어가면 1학년 때 논리학 그다음에 2학년 때는 철학 원전 강독연습, 3학년 1학기 때 고중세 철학 그다음에 2학기 때 서양 근대 철학 그다음에 인식론 이런 과목들을 배웠다. 그런데 고대, 중세, 근대라고 하는 3분법 자체가 이제는 더 이상 서양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철학과 커리큘럼을 바꿔야 되는데 그러려면 지금 현재 철학과에서 그 커리큘럼에 따라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을 싹 없애고 새로 만들어야 된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안 된다.  

오늘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김진혁 교수님을 만나서 얘기를 들으니까 신학 대학들은 굉장히 번성하고 있다고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 신학대학의 커리큘럼은 어떻게 해야 될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려면 어떻게 순서가 되어야 되는가. 철학사를 읽는 게 먼저인데 철학사라고 하는 것도 제가 50번을 읽었던 힐쉬베르거 철학사를 더 이상 가지고 읽지 않다. 일단 지성사부터 읽어야 된다.  지성사라는 것이 제가 강조하는 사상사의 영역에 들어가 있다. 사상의 역사, 즉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사상사로서의 기독교 역사를 꼭 읽어야 된다. 펭귄 교회사 시리즈는 딱히 권해드리고 싶지는 않다.  비아에서 나온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의 《그리스도교, 역사와 만나다》는 반드시 읽어야 된다. 기독교의 역사를 이렇게 50개의 꼭지로 정리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다. 이게 일단 기독교도들의 기본적인 교육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가 역사적 형성물이라는 것,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한 번 딱 생겨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모양인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변천되어서 나에게 온 것이라는 것, 그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온 역사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걸 읽고 한국 교회의 역사도 같이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가 역사 속에서 변천을 겪은 역사적 형성물이다 라고 하는 것을 꼭 생각을 해야 된다. 

성서 신학에 대해서는 책이 많이 있는데 성사 신학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교리신학 즉 조직신학 또는 체계신학은 대가들의 책을 이를 악물고 읽어보고 노트 정리도 해보고 했는데 꼭 형이상학 공부를 같이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서양 철학에서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은 초월적인 어떤 존재에 대해서 인간의 이성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밀어붙여서 해보려는 생각이다. 한국에서 형이상학을 전공해서 그것을 개론서로 쓴다든가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철학 고전 강의》은 제 책인데 다른 책은 몰라도 제가 철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철학 고전 강의》라고 제목을 달았다. 신학을 공부하는 분이나 또는 기독교 신자분들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람이다. 일단 부제가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이다. 이게 저의 신앙 고백이다. 무한자는 신을 의미하고 무한자로서 존재하는 신을 끊임없이 유한자인 제가 사유한다는 것, 그게 저는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신을 보았다라든가 신이 나에게 임했다라든가 그건 우리는 알 수 없다. 명석한 정신으로든 아니면 몽롱한 정신으로든 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우리 유한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겠다고 나선다든가 그런 것은 오만한 태도이다.  그래서 《철학 고전 강의》의 부제는 아주 명백하게 신앙 고백을 담고 있다. 그것이 형이 사학의 기본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꼭 한 번쯤은 읽어보았으면 한다. 

나하고 똑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식별하기는 아주 쉽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공통의 공통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들은 결국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써의 책이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식별 부호로서 작동을 하지 않나 한다.  그리고 독서 모임은 적어도 45살 되기 이전에 시작을 해야 된다. 강의자료를 보면 "경건한 심성을 추구하는 폭넓은 독서 연대를 만들어 간다면, 길게 늘어난 삶이 고단하지는 않을 듯하다." 여러분의 생각보다 오래 산다. 물론 생계가 굉장히 곤란한 사람들은 그러지 않겠지만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되나가 걱정인 사람이 아주 많다.  그러면 책이라도 읽어봐 라고 해도 이제 책이 안 들어온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역사와 만나다》도 45살 이전에 읽어야 된다. 여러분들이 그런 독서 모임을 꾸렸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람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은 책을 무지하게 읽더라 이런 얘기를 들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어떤 종교인이든 공부하는 사람들 티가 일단 좀 나야 된다. 한국 사회와 서양 사회가 다른 결정적인 차이점은 미국 사람한테 못 배운 놈아 그러면 전혀 욕이 안 된다. 미국 사람들은 삶의 양식이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에 그게 욕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다 사는 게 비슷하다. 한국 사회는 거의 완벽하게 동질적인homogeneous 사회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심한 욕은 '못 배워가지고' 이런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기독교 신자들이 못 배워먹었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강의 자료 다시 한번 보자. 《예수 운동의 사회학》과 《초기 기독교 형성 과정 연구》는 지금 읽을 필요는 없다. 게르트 타이센의 책은 한 번쯤은 꼭 읽을 만하다. 도미니크 크로산의 책보다는 좋은 것 같다. 그다음에 《신화의 영토들》은 사놓고 '내가 이 책은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체크하는 도서 목록집으로 쓰면 된다. 그다음에 《발칸의 역사》는 필독서이다. 그다음에 《철학 고전 강의》도 필독서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와 만나다》는 기독교도들의 필독 도서이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문학 연구자로서 철학 연구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악물고 신을 찾지 않고 신을 부르지 않고 있다가 죽기 직전에 고요하게 신에게 기도를 한번 하고 죽는 것, 이게 진정한 저는 신앙인의 태도라고 생각을 한다. 누구나 다 자기만의 신앙이 있으니까 다른 분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똑같은 신앙을 갖고 있을 수는 없다.

유한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무한자 앞에 서 있는 유한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사유인데, 아무것도 읽지 않고 생각만 하다 보면 망상에 시달리니까 여러분들에게 꼭 읽어야 될 책 몇 가지를 오늘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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