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회사상의 흐름(3) ━ 콩트

 

2023.11.20 📖 사회사상의 흐름(3) ━ 콩트

📖 사회사상의 흐름

❧ 콩트
- 사회 유형들. 신학적·군사적 사회 유형 / 과학적·산업적 사회 유형의 대립과 진보. 사회학과 사회학 이론가의 과제는 역사의 필연적이고 불가결하고 불가피한 과정을 이해하여 새 질서의 실현을 촉진하는 일 
- 삼 단계의 법칙. 신학적 시대, 형이상학적 시대, 실증적 시대
- 실증철학의 목표는 근대 세계의 위기를 해결하고 사회의 여러 조직을 관장할 과학적 사상 체계를 제공
- 산업사회의 특징들. 산업은 노동의 과학적 조직을 구성한다. 노동조직에 과학을 적용하여 부와 자원을 개발한다. 공업생산은 공장과 교외에 노동자를 집중시킨다. 노동자의 집중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고용주의 대립을 발생시킨다. 산업사회는 과잉 생산의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콩트는 앞의 세 가지에 집중한 반면 마르크스는 뒤의 두 가지에 집중
- 부가 증가함으로써 모든 이의 이익은 궁극적으로 조화에 이른다. 사제가 아닌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도덕적 가치 질서를 통제, 선택, 변형한다.
- 사회현상은 인간 사회의 필연적 진화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엄격한 결정론의 지배를 받으며, 이는 인간 정신의 진보에 의해 지배된다. ‘단 하나의 설계에 따른, 인간 역사의 여러 사건의 근본적 연속’, 즉 신학적 섭리주의
- 실증주의는 종말론적인 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 외부의 질서를 인정하고 그것에 관한 최종적 설명을 행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을 인정하고 오직 그 질서를 판독하는 일에만 국한하는 철학

참조
📖 Löwith(9): 시간론 — 15 https://www.podbean.com/ew/pb-wsyqm-13abc61 
📖 Löwith(9): 시간론 — 16 https://www.podbean.com/ew/pb-fr2xj-13b45f5 
📖 Löwith(9): 시간론 — 17 https://www.podbean.com/ew/pb-g4f6b-13bf477 

원문: https://www.buymeacoffee.com/booklistalk/pokawuvolu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을 읽는다. 전체적으로 책은 두껍지만 핵심적인 부분, 여전히 읽을 만한 부분들을 추려서 정리해서 읽는다. 이 책은 1967년에 나온 책으로 낡은 책인 것처럼 여겨지기 쉬운데, 요즘 「20세기 읽기, 세미나」에서 읽고 있는 《하버드-C.H.베크 세계사: 1750-1870》 제4부가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글인데, 거기에서 과거에 등장했던 사회학 책들을 검토를 하면서 레이몽 아롱의 몽테스키외에 관한 탁월한 분석을 얘기한다. 사실 2000년대에 나온 책이 거의 반세기 전에 출간된 책에 대해서, 특히 사회과학처럼 변화가 많은 학문 분야에서 나온 책을 그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만큼 레이몽 아롱의 책은 좋은 책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 위르겐 오스터함멜 정도 되는 거의 석학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하는 얘기들은 좀 볼 만하다.  

《사회사상의 흐름》을 정리하고 나면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지금은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 사람들도 이제 관심을 갖지 않는, 그러나 제가 책 정리를 하면서도 여전히 읽을 만한, 참조할 만한 책들을 정리해서 얘기를 해보는 게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있다. 예를 들면 칼 포퍼의 《역사주의의 빈곤》이 있는데, 이 책은 이제 굉장히 탁월한 책이다. 성균관 대학교에서 퇴직한 이한구 교수가 다시 출간했는데, 초역은 이석윤 선생님께서 하신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칼 포퍼의 번역일 것이다. 이석윤 선생님과 소광희 선생님, 김정선 선생님 세 분이서 역사 철학에 관한 책을 한 권씩 번역해서 내보자고 해서 이석윤 선생님이 《역사주의의 빈곤》을 번역하셨고 김정선 선생님이 월쉬의 《역사 철학》을 하시다가 지병으로 돌아가셔서, 원고 번역이 남아있던 것을 이석윤 선생님이 다듬고 다시 추려서 김정선 선생님이 번역한 걸로 해서 서광사에서 나왔고, 그다음에 소강희 선생님과 손동현 선생님이 콜링우드의 《역사의 인식》를 번역을 했다. 콜링우드의 책은 여전히 인용되는 책이다. 칼 포퍼의 《역사주의의 빈곤》은 이석윤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걸 제가 가지고 있는데, 공부할 때 거의 외우다시피 해서 읽은 것이다. 그다음에 테다 스코치폴의 《국가와 사회혁명》은 여전히 의미가 있는 책이고, 크레인 브린튼의 《혁명의 해부》, 크레인 브린튼은 이 분야에 관한 한 더 이상 다른 얘기할 것도 없는 저자이다.  그다음에 배링턴 무어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과 같은 책들. 여전히 오늘날에도 한 번쯤 들여다볼 만한 구절들을 찾아서 봐야 되겠다 라고 생각해서 버리지 않고 놔둔 책들이다. 

오늘은 콩트에 관해서 몇 가지 짚어보겠다. 콩트에 대해서는 칼 뢰비트의 시간론에서 다룬 바도 있고 해서 그걸 또 참조해서 들으시면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본다. 콩트에 대해서 이것저것 레이몽 아롱이 많이 얘기하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얘기부터 해보자면 콩트는 3단계의 법칙이 있다. 신학적 시대, 형이상학적 시대, 실증적 시대라고 하는 3단계의 법칙을 따라간다. 이게 일종의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런데 그전에 콩트는 일종의 사회 유형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사회를 대비시켜 놓는, 그런 것에 관한 가장 선구적인, 철학적인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것에, 칼 뢰비트를 봐도 그렇고, 신학적인 쪽에 가까운데, 신학적 또는 철학적인 사유를 바탕에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사회학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사회학 이론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롱이 그걸 잘 짚고 있다. 

사회 유형에 관한 두 가지를 대비시키는데 그것 중에 하나가 신학적·군사적 사회 유형이다. 이건 중세 사회를 드러내 보인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다음에 과학적·산업적 사회 유형이 있다. 이것은 콩트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보면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겠다. 그러면 이 두 개의 사회를 이렇게 비교하면서 콩트는 사회학의 또는 사회학자의 근본적인 과제를 도출해 내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후지고 못난 사회에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과정을 이해하고 새 질서의 실현을 촉진하는 일, 사회학 이론가는 일종의 메시아적 사명을 가진 사람이 된다. 역사의 필연적이고 불가결하고 불가피한 과정을 이해하여 새 질서의 실현을 촉진하는 일을 사회학 또는 사회학 이론가의 목표로 보았다.

제2부 73 신학적 · 군사적 사회유형과 과학적 · 산업적 사회유형의 대립으로 인한 그 시대의 위기를 이렇게 분석한 결과, 개혁자로서의 콩트는 마르크스류의 혁명이론가도 아니었고 몽테스키외나 토크빌류의 자유주의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는 실증과학 이론가, 특히 그 자신이 사회학이라고 부른 사회과학의 이론가였다. 


그렇다면 그 과정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3단계의 법칙을 잘 알아야 된다고 말하는데, 그 당시에는 굉장히 획기적이었겠지만 오늘날 보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다. 미리 자신이 이렇게 목표를 정해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는 실증적 시대에 이룩하게 될 사회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타당성을 지닌 사회가 된다. 바로 여기서 레이몽 아롱은 몽테스키외와 콩트의 결정적인 차이를 찾아낸다. 이것을 콩트의 열등성이라고 보는데, 논리를 지나치게 전제해서 그러니까 제1 전제를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게 틀림없어'라고 전제를 하고 나서, 거기서부터 시작을 해서 연구 대상을 삼았다 라는 점에서 몽테스키외와의 차이를 본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결론은 정해져 버렸으니까 이미 그것에서 도출되어 나오고 뭔가 전개되고 하는 것들이 아주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그런 논의는 아니게 된다.  어쨌든 콩트는 자신이 목표로 삼는 사회를 정해버렸다. 그런 다음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역사에 필연적이고 불가결하고 불가피한 과정을 이해해서 새 질서의 실현을 촉진하는 일이 사회학 그리고 사회학자의 일이니까, 구체적으로 사회학은 근대 세계의 위기를 해결하고 사회의 여러 조직을 관리를 잘 해야 할 과학적 사상 체계를 제공하는 것, 이런 것이 이제 사회학이 하는 일이 된다. 

제2부 73 콩트에 의하면 사회학의 기능은 역사의 이러한 필연적이고, 불가결하고 또한 불가피한 과정을 이해하여 새 질서의 실현을 촉진하는 일이었다. 

제2부 76여기서 우리는 콩테스키외와의 비교에서 콩트의 열등성이랄까 혹은 우위성이랄까, 그 차이를 보게 된다(나는 열등성으로 본다). 


그렇다면 사회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회를 분석하는가. 당시 콩트의 시대는 본격적인 것은 아닌데 산업사회로 진입을 하였다. 그러니까 콩트의 사회 분석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산업사회 분석이 된다. 그러면 산업이 전면으로 나서게 되는 그런 사회이다. 그것이 바로 이제 두 종류의 사회 유형학에서 나온 것처럼 과학적·산업적 사회이다. 콩트가 보기에도 그리고 그 당시 주요한 문제로 등장했던 것은 산업이라고 하는 것은 노동을 과학적으로 조직한다. 그 이전의 봉건사회나 중세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노동을 과학적으로 조직을 하지 않았다.  그다음에 노동이 과학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면 거기다가 과학을 적용해서 부와 자원을 막대하게 개발하는 것이 산업이 하는 일이고, 공업 생산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다 보니까 공장과 교외에 노동자가 집중된다. 그게 콩트가 주목했던 지점이다. 그런데 레이몽 아롱이 보기에 그 당시에는 이제 몇 가지 더 징조들이 나타났다. 말하자면 산업 부작용의 징조가 나타나는데 하나가 노동자의 집중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고용주의 대립을 불러오고, 그다음에 산업사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다. 그건 바로 과잉 생산의 위기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5가지 정도가 있다고 할 때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그 학자의 사회학의 성격이 달라진다. 제3부에서는 마르크스를 다루고 있는데 앞서 말한 세 가지, 산업은 노동의 과학적 조직을 구성한다. 노동조직에 과학을 적용하여 부와 자원을 개발한다. 공업생산은 공장과 교외에 노동자를 집중시킨다.  이 세 가지는 콩트가 주목했던 반면 노동자의 집중이 프롤레타리아트와 고용주의 대립을 불러온다는 것과 산업은 과잉 생산의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이렇게 두 가지는 마르크스가 집중했던 지점이다. 콩트나 마르크스나 일단 기본적으로 그들이 지향하고 있는 이상적인 사회 또는 모범형의 사회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제시하기 위해서 당대 사회를 분석하고,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징적인 면모들에 주목을 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신들이 애초에 존재하고 있는 처방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데 콩트와 마르크스가 주목하는 지점들은 이렇게 다르다 하는 것이다. 콩트는 노동자의 집중이 프롤레타리아트와 고용주의 대립을 불러온다는 것과 산업사회가 필연적으로 처하게 될 과잉 생산의 위기에는 거의 집중하지 않았다 라고 레이몽 아롱은 분석한다. 그렇다 보면 콩트는 산업사회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만을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부가 증가해서 모든 이의 이익과 일치하고 산업사회의 이익은 궁극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거 참 가슴 벅찬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콩트가 이런 이익의 궁극적 조화라든가 이런 것들을 해내는 궁극적인 방법은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수행하는 도덕적 가치질서의 통제와 선택과 변형에 의한 것이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다. 이 지점에 오면 이거는 좀 헛소리다, 정말 드림이다, 꿈이다 그렇게 된다. 그러다 보니 콩트의 이런 산업사회론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러니까 레이몽 아롱의 용어를 빌리면 골동품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지나치게 꿈스럽다. 꿈스럽다라는 표현을 제가 한번 만들어봤는데, 꿈꾸는 듯하다, 꿈스럽다, 꿈 같다 라는 얘기이다.  어찌 그 부정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제2부 71 그의 철학에 따르면 절대적 타당성을 가진 사회는 단 하나의 유형뿐이며 모든 인류는 이 모범형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2부 81 내 의견으로는 19세기 초기의 사람들이 관찰했던 산업의 특징은 다음 여섯 가지였다.
  ① 산업은 노동의 과학적 조직을 구성한다.  관습에 따라 진행하지 않고 생산은 최대한의 산출을 목적으로 조직된다.
  ② 노동조직에 과학을 적용한 결과로 사람은 부와 자원의 거대한 개발에 종사하게 된다. 
  ③ 공업생산은 공장과 교외에 노동자들을 집중하게 한다.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 발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노동 대중의 존재이다. 
  ④ 산업 지역에 있어서의 노동자의 이러한 집중은 고용인과 고용주 사이,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 사이에 잠재적 내지 표면적 적대심을 불러일으킨다. 
  ⑤ 노동의 과학적 성격의 결과 부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반면, 과잉 생산의 위기가 또한 증가하므로 이 과잉생산이 풍요 가운데 빈곤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⑥ 노동의 산업적 과학적 측면과 연결된 경제조직은 소위 자유 기업으로서의 특징을 갖는다. 즉 기업가나 상인이 이윤을 추구하게 된다. 

제2부 83 콩트는 프롤레타리아와 기업가 사이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대립되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부의 분배에 있어서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경쟁이 있을 수 있으나, 자본주의적 경제학자와는 달리, 콩트는 부의 증가가 (말하자면 정의상) 모든 사람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이며, 산업사회의 기본적 법칙이 바로 이 부의 증가이며 그로 말미암은 이익의 궁극적 조화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콩트는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산업사회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모두 다 이익을 궁극적으로 조화시키고 도덕적 가치 질서가 변화하고 평화를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 이것 역시 꿈스럽다. 사실 콩트 얘기는 모든 게 꿈스럽다. 마르크스 얘기도 좀 그런 점이 있긴 하지만 콩트는 좀 더 심하다. 세 번째는 좀 미묘하다. 콩트에 따르면 산업사회라고 하는 것은 각자 개인의 업적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실력주의인데, 이 실력주의라고 하는 것이 의외로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력에 따라서 가장 아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사람은 그게 전적으로 자기의 책임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니까 운명이나 불의가 개입되었다 라는 것을 탓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실력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콩트가 무시되고 있는 세 가지 이유라고 이야기를 한다. 

제2부 89 실력주의야 말로 바로 산업사회가 지향하는 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콩트의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콩트의 실증 철학, 실증 단계에 이르는 이 세 단계, 신학적 시대, 형이상학적 시대, 실증적 시대. 이 세 단계라고 하는 것은 칼 뢰비트가 보고 있는 콩트의 유토피아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회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필연적인 진화 형식으로 작용하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인간 정신이 그에 걸맞도록 도덕적인 진화를 이루면서 진보를 이루면서 그것과 서로 맞물려 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신학적 섭리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즉 단 하나의 설계에 따른 인간 역사의 여러 사건들이 근본적으로 연속되어 간다. 그러니까 실증주의라고 하는 것은, 이게 명칭은 실증주의인데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데이터들을 일단 열린 마음으로 가져다가 뭘 이렇게 해야 될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종말론적인 철학,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는 정해진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그런 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실증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어쨌든 열린 결말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따져가 보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인간 바깥에 있는 어떤 질서를 인정하고, 사람이 뭔가 하기 전에 이미 정해진 질서가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관한 최종적 설명을 행할 능력이 실증 철학자 자신에게는 없다. 그냥 지금 정해진 대로 가고 있나 하는 것만을 판독할 뿐인 철학이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콩트의 실증 철학은 자신이 애초에 과학적인 것들을 얘기했지만 과학적 질서와 섭리적 질서 사이에 오고 가면서 요동을 치다가 결국 섭리적 질서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마는 것이다 라고 정리를 할 수 있겠다. 책이 두꺼운 내용인데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제2부 91 사회현상은, 인간 사회의 필연적 진화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엄격한 결정론의 지배를 받으며 이 진화는 그 자체가 이번에는 인간 정신의 진보에 의해 지배된다. 

제2부 91 「단 하나의 설계에 따른, 인간 역사의 여러 사건의 근본적 연속의 합리적 조정」은 말하자면 콩트의 사회학의 개념에 대한 열쇠이다. 

제2부 92 이와 같이 우리는 실증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바로 그 사람이 기독교적 또는 신학적 섭리주의의 마지막 제자로도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2부 94 그에 대한 회답은 실증주의가 자발적인 철학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종말론적 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실로 실증철학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밖에 있는 질서를 인정하고, 그것에 관한 최종적 설명을 행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리고 오직 그 질서를 판독하는 일에만 국한하는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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