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79 제32강(2) 파스칼 《팡세》

 

2024.01.09 문학 고전 강의 — 79 제32강(2) 파스칼 《팡세》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2강(2)

timor servilis(servile fear). 비굴한 두려움, 노예적 심성에 기인하는 두려움
timor filialis(filial fear). 신의 자녀로서의 두려움, 경외하는 두려움

 

 

《문학 고전 강의》 제32강 두 번째 시간이다. 지난번에는 신에 관한 문제 일반론을 이야기했다. 공포와 두려움을 얘기를 했는데, 이때 말하는 신을 이야기할 때의 공포라고 하는 것에 대해 조금 보충 설명을 해보면 두려움이라는 게 두 종류가 있다.  이른바 16세기, 17세기 근대라고 불리는 시기에는 두려움이라는 게 두 종류가 있는데 라티움어로 공포라는 단어는 timor이다. 두려움 중에 하나는 진짜 두려움, 내가 죽으면 어떨까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닥치는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가만히 추적을 해보면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나는 두려움이다. 그것을 기독교도들은, 특히 루터가 이것을 많이 구별해서 얘기했는데,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두려움이다. 이것은 아주 믿음이 두툼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죄이다. 하느님이 있는데 하느님을 믿고 두려움을 없애야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 같지만 사람들이 다 그게 죄라고 여기던 시절에는 죄가 되기도 하겠다. 그다음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은 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신을 믿는, 완전히 양가적인 감정이다. 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신을 믿는 그러니까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해야 한다, 경외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신에 대한 공포, 신에 대한 두려움만이 진정한 두려움이고 현실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닥칠 무슨 재앙에 대한 두려움은 죄악으로서 간주된다. 그러면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 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니까 그것 자체로 죄악이 아니라 이것은 경건한 것이 된다. 그래서 두려움의 경건함이라고 하는 하나의 심성 상태가 형성이 된다. 두려움의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 광신적인 기독교도들, 천주교는 광신자 없는 것 같은데 있다. 안 봐서 그렇지 실제로 보면 장난 아니다. 가서 보면 천주교도 기도원 같은 데서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신이 두려운데 왜 저렇게 울부짖고 난리인가. 그런데 두려움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구원에 대한 확신도 커지게 된다. 이제 바로 과도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그러한 과도한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신자들의 공동체 속에서 신에 대한 두려움을 과하게 표현할수록 사실은 신에 대한 믿음이 많다 라고 하는 역설적인 그런 상황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 구원의 약속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팡세》를 보면 불멸에 이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라고 하는데, 불멸에 이르는 방법을 편안하게 찾지 않고 굉장히 두려워하면서 찾고 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벌벌 떨고 있나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파스칼도 누구 못지않게 유럽 사회의 30년 전쟁이라고 하는 시기를 겪어가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두려움 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서도 신을 찾는데, 두려움과 신에 대한 사랑이 공존하게 되니까 이것은 두려움의 경건성이다.  바로 그런 것, 저 사람은 마음속에서 굉장히 신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만큼 신을 애타게 갈구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 두려움을 억누르고 신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그런 것이니까 그게 바로 이제 절제라고 하는 것이 된다. 플라톤에서 절제라는 말 나온다. 중용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절제sōphrosynē라고 하는 것은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기독교적인 신이라고 하는 인격신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경건함에서 그것이 나온다. 진리에 대한 경건함, 그러니까 이것은 두려움이라는 건 없다. 플라톤이 말하는 절제, 그것도 경건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는데, 제가 좋아하는 게 그런 것이다. 두려움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시켜서 생겨나는 절제 그리고 그런 경건함, 그것은 굉장히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sadomasochism이 동시에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한 경건함은 사실 18세기 이후에 도이치 지역에서 생겨났던 경건주의 운동과는 아주 조금 다르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경건과 이건 다르다. 이것이 나중에는 도이치 감성주의 문학으로 전개가 되는데, 이렇게 감성주의 문학으로 전개가 된 것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런 작품들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일종의 도야Bildung라고 하는 것은 사실 도이치 감성주의나 경건주의, 신적인 어떤 두려움을 바탕에 깔고 있는 도야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라든가 소크라테스라든가 이런 사람이 말하는, 또는 아리스토텔레스도 거기 포함될 수 있다, sōphrosynē와 같은 것들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어떤 것이 더 낫겠는가. 저는 경건한 사람들의 독서 공동체를 얘기하는데 지난번 성공회 교회에서 강연할 때 경건한 심성을 추구하는 폭넓은 독서 연대 속에서 살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라고 말을 했다. 그때 그 경건한 심성을 추구한다라고 하는 게, 경건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신에 대한 어떤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라 아주 고전적인 의미에서 그런 경건함은 진리에 대한 것이다. 진리를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구원을 얻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굉장히 차이가 있다. 그리고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인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찌 보면 자신의 일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두려움일 수 있다. 그게 루터가 하지 말라고 했던 노예적인 두려움timor servilis이다. timor filialis는 신에 대한 사랑이며 두려움이고, timor servilis는 노예적 두려움이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하는 두려움인데, 사실 이것을 엄밀하게 구별해내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저도 기독교도이지만 기독교도 역사 속에서 계속 변화하는 거니까, 신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을 진리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꿔서 생각한다면 훨씬 더 건전한 기독교도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 해본다. 

《팡세》 전문 연구자인 편집자 필립 셀리에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인 기독교, 즉 거의 천오백 여 년 동안 서양 세계를 지배해왔던 하나의 세계관 내지는 역사관을 제시해주고 있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기독교'라는 것은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모두 다 공통의 뿌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사였다. 단순하게 얘기를 해보자면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냥 농땡이 부리고 놀면 구원 못 받고 노력을 해야 된다 라고 할 수 있다. 파스칼은 프랑스 얀센주의의 중심지인 포르로아얄 수도원에 있었다. 이것은 거의 프로테스탄트 분위기에 아주 가까운 가톨릭이라고 보면 되겠다.  인간이 죄를 짊어진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믿는다. 그러면 죄를 벗어던지는 게 구원인데 구원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신에게서만 오는가,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가. 구원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된다 라고 생각하면 기도도 하고 착한 일도 해야 되겠지만 칼뱅주의에서는 예정설로 되어 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인간은 노력을 해야 되고 그것에서 신의 은총이 결합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적 기독교라고 생각을 하면 되겠다.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노력은 어떻게 보면 굴종하는 노예의 두려움이 되겠다. 당당하게 진리라고 하는 것, 인격신을 전제하지 말고 진리에 대한, 내가 진리를 얻지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되나 그게 걱정일세 라고 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학 고전 강의》 322페이지에서 323페이지를 보면 이제 1658년 6월의 계획, 1658년의 목차, 6월의 목차 묶음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28장 결론까지 목차에 대한 정리를 하고 그에 이어서 설명을 해뒀는데, 여기서 《팡세》는 크게 보면 단편 40에 전체가 주제가 아주 간단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신 없는 인간의 비참 그리고 신과 함께 하는 인간의 행복. 달리 말해서, 본성이 타락하였다는 것, 본성 그 자체에 의해서 그리고 제2부 속죄자가 있다는 것, 성서에 의해서.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성서를 읽는 것, 아주 간단한 것이다. 신 없는 인간의 비참, 그리고 신과 함께 하는 인간의 행복이 《팡세》의 주제이다. 《팡세》를 읽을 때는 그냥 기독교 문헌이다 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여기서 신 없는 인간의 비참, 신과 함께 하는 인간의 행복에서 신이라고 하는 자리에 진리를 집어넣고 읽어도 된다. 그게 사실은 《팡세》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진리가 없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진리로 가는 길조차도 모르는 그런 인간의 비참함과 진리를 탐구하고 있는 인간의 행복, 그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겠다. 오늘은 《팡세》 얘기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그것을 생각을 해보면 좋겠다. 다음번에는 제33강을 읽는다. 신으로부터 멀어져 본성이 타락하게 된 인간, 고통스러운 인간이겠다. '진리로부터 멀어져'라고 생각해도 된다고 거듭 말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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