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82 제34강 파스칼 《팡세》

 

2024.01.20 문학 고전 강의 — 82 제34강 파스칼 《팡세》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4강(1)

하느님께서 이처럼 숨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다고 말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교육적인 종교가 아니다. 우리들의 종교는 그 모든 일을 하고 있다. "VERE TU ES DEUS ABSCONDITUS." (§275)

 

 

오늘은 《문학 고전 강의》 제34강 파스칼의 《팡세》를 마저 다 읽겠다. 《팡세》를 읽고 나면 괴테의 《파우스트》가 있고 그리고 《모비 딕》이다. 《파우스트》를 읽을 때는 괴테와 그의 시대, 이른바 Goethezeit라고 하는, 괴테의 시대에 대해서 좀 지루할 정도로 상세하게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괴태가 문학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사상의 역사에서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번 기회에 괴테 시대를 정리하고 가는 게 좋지 않겠나 한다. 오늘은 제34강 《성서》를 통해 다시 신에게로 향하는 속죄자 인간을 마무리하겠다. 여기까지 읽으면 그러니까 파스칼의 《팡세》를 읽으면, 파스칼의 《팡세》까지가 이런 종류의 신에 대한 고백, 신에 대한 고백으로서는 마지막이다. 그 이후로도 나온 건 있겠지만 거의 형식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맥락을 계승한 텍스트로서는 《팡세》가 마지막일 것이고, 그다음부터는 이런 고백은, 루터라든가 이런 사람들과 같은 시대이긴 한데, 아주 다른 종류의 이제 고백들이 등장한다. 경건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등장한다. 루터 이후 시대의 사람이긴 하지만 칼빈이나 츠빙글리와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의 개혁파 교도 그리고 얀센주의자들은 조금 다르다. 이때 이후로 고백이라고 하는 것들이 좀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이 경건주의이고 그게 낭만주의로 이어져 갔는데 그런 것들을 다 묶어서 이제 얘기할 수 있는 게 괴테이겠다.  

제34강에서 짚어 볼만한 부분만 보겠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비참하기도 하고 동시에 위대하기도 하다. 그런 것들이 모순인데, 모순이라고 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그냥 계속 안고 가는 것이다.. 《팡세》의 호교론적인 목표, 제2부 신과 함께하는 인간의 행복 부분이 파스칼의 목표이기는 했겠지만 그 목표를 우리는 도외시한 채, 대체로 인간의 허무와 비참 이런 것들만을 열심히 읽어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팡세》를 통해서 파스칼이 의도했던 바는 아주 분명하다. 최고선이라고 하는 것을 11번째 섹션에서 얘기하고 그다음에 포르로아얄에서를 중간에 한 번 넣어놓고, 그리고 13번째 섹션부터 결론까지는 신으로 향하는 인간의 발걸음을 얘기하는데, 특히 그 신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명백하게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숨어 있는 신 DEUS ABSCONDITUS"이라는 개념, 《숨은 신을 찾아서》도 이전에 여기 「라티오의 책들」에서 얘기한 게 있다. "숨어 있는 신 DEUS ABSCONDITUS"은 서구 사상에서는 또는 기독교 사상에서는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이교도들pagan에게도 무의미한 얘기는 아니다. 여기서 신이라고 하는 말은 파스칼의 시대에서는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적어도 19세기 중반쯤 오면 '신'이라고 하는 단어를 어떤 철학자가 사용한다 할 때 그 사람이 정말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신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한번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그런 부분이다. 이를테면 괴테가 말하는 신이 정말 기독교적인 신일까, 그건 아닐 것 같다. 여튼 "신에게로 향하는 속죄자 인간"에서 인간에 대해서 다시 얘기하는데 341페이지에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신을 발견하고 나서 그에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 이 부분을 읽을 때 신이라는 단어가 좀 껄끄러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워낙 종교에 대한 특히 기독교적 종교에 대한 증오, 경멸 또는 무시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러다 보니 종교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부분마저도 아주 배척되는 그런 경향이 있다. 안심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확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이 편안해야 하는 건데 그게 안 된다. 종교가 안심을 주지 못하면 이제 어떡하겠는가. 이제 아무것도 안심을 못 준다. 과학은 원래부터 안심을 주는 것은 아니다. 포퍼가 말하는 비판적 합리주의. 과학이라는 것은 반증가능해야 하고 예측가능해야 하고 실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되풀이해 볼 수 있어야 하고 반증가능하다고 하면 이건 틀릴 수도 있다고 과학자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종교라고 하는 것이 신에 대한 확신을 주려고 하는 나머지 독단을 계속 심어서 사람들에게 강력한 거짓을 통한 심리적 지배를 행하다 보니까 사람들에게 안심은 커녕 적대감만 불러일으켜버리는 그런 일이 생겨났다. 오히려 종교가 본래적으로 해야 되는 것들을 할 수가 없게 되고 그러니 신이라는 글자만 하나 들어가 있어도 읽으면 안 되는 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파스칼의 《팡세》는 굉장히 좋은 책인데 권하기가 곤란한 책이 되어 버렸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신을 발견하고 나서 그에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이런 얘기를 하면 그게 노예의 도덕이 아닌가, 그다음에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를 찾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뭘 신을 찾아 그냥 눈앞에 닥친 일이나 열심히 하고 살지 이렇게 바로바로 반박을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생긴다. 그리고 "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찾지도 않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행복한 것 아닌가 이렇게 얘기를 해버리면 파스칼이 말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은 올바른 사람들이 아닌 것이 된다. 여기서 신이라는 단어를 나에게 안심을 주는 참다운 진리, 그런데 나에게 안심을 주는 참다운 진리를 찾는다는 게 굉장히 어렵다. 안심을 찾기 위해서 자꾸 확증편향에 빠져들게 되고 한 번 뭔가를 알게 된 것은 그것에 닻을 내려서 절대로 바꾸려고 하지 않고 아전인수 심지어 견강부회까지 하게 되는 그런 일이 생겨난다. 그런데 원천적으로 한번 돌아가서 신을 발견하고 나서 신에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정말 내가 신을 발견했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한번 다시 되물어보는 게 필요하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를 찾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나에게 안심을 주는 진리, 안심이라고 해서 한 번 딱 발견하면 단박에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서 궁리를 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물론 파스칼에서는 신을 발견하고 나서 그에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한 사람들, 발견하지 못했고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찾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나 또는 발견하지도 못했고 찾지도 않는 사람들은 비참한 사람들이다. 호교론의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신을 위한 변호를 펼쳐 보이는 것의 경우에는 물론 아주 당연하게도 이런 사람들이 비참하게 보일 것이다.

《팡세》 13. 시작, §192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신을 발견하고 나서 그에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를 찾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찾지도 않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 


단편 231을 보면 파스칼의 그 유명한 말이 나온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에서 가장 연약한 한 개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부러뜨리기 위해서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방울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부러뜨릴 경우라 할지라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도 훨씬 더 고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비록 파스칼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신을 찾아야 하고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처럼 신 안에서만 안심을 얻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신 안에서만이 우리가 진정한 기쁨gaudium을 얻을 수 있다 라고 말하지만 그냥 맹목적으로 신을 찾는 것이 아니다. 여기가 이제 바로 17세기 인간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전 세계에 사는 17세기 인간이 다 그랬다는 건 아니다, 특정 지역에서 살고 있던 17세기 인간이 보여주는 하나의 자기 의식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또 생각해 보는, 이게 바로 이른바 중세의 인간과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파스칼의 온전한 의미에서의 자각적 자기의식적 개인이라고 하는 것은 없었다.  없었다 해도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우주와 나를 대비시켜가면서 나는 나 자신이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주보다는 나는 더 고상하고 우주보다도 더 위대하다. 이렇게 인간은 갈대라는 말로서 시작을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생각하는 존재라는 게 아무 생각 없이 산다 라고 말할 때의 그 생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팡세》 16. 인간을 아는 것으로부터 신을 알게 되는 과정, §231
인간은 자연 가운데에서 가장 연약한 한 개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부러뜨리기 위해서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방울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부러뜨릴 경우라 할지라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도 훨씬 더 고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다음에 또 유명한 단편233의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한다." 파스칼의 이 공포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독특하다. 공포라는 감정, 두려움이라고 하는 감정, 두렵다 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뭔가 대상이 있다. 불안이 아니다. 불안이라고 하는 감정은 17세기에는 아주 희미하게 몇몇 사람은 느꼈을지 몰라도 파스칼이 공공이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 쓸 수 있다 라고 할 때는 신을 잃어버린 자만이 그것을 쓸 수 있는 말들이니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분명히 공포라고 하는 건 신으로부터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그런 공포이다. 17세기 파스칼의 공포라고 하는 건 반드시 신이라고 하는 저쪽에 있는 뭔가가 상대자가 있어야 한다. 

《팡세》 16. 인간을 아는 것으로부터 신을 알게 되는 과정, §233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한다.


우주 너머에 있는 우주의 창조자를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신이 있음을 감지하지만 그 신이 어떤 원리에 따라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나의 좌표를 찍을 수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반드시 이 공포의 근본적인 원천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  이것의 중간 과정을 생략해버리고 신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니 신은 나쁜 존재 라고 말하면 안 된다. 맹목과 비참이라고 하는 것도 오로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그것 자체만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내가 신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신이 나에게 확실한 증거를 주지 않고 명료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신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신이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 신이 나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다. 그러니까 이 공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숨은 신 논변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기를 원하셨다는 것." 이 지점에서 파스칼의 종교가 기독교인가 아닌가, 그 당시에는 이단이다 이렇게 했겠지만 우리는 여기서 굳이 이단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384절에 보면 "비참은 절망을 깨닫게 한다. 오만은 자만심을 깨닫게 한다." 비참과 절망과 오만과 자만심. 이 두 개를 연결을 시켜서, 그렇다면 나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겠다, 구원을 받고자 한다, 마음속에서 안심을 얻고자 한다, 신이 정말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움직여가는지 그걸 알 수 없다, 세상을 아무리 열심히 들여다봐도 그 신은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면 절대적 관념론이 된다. 인간이 이 지상에서 펼쳐 보이는 역사가 신의 발걸음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절대적 관념론인데 그렇게 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파스칼은 종말론적인 어떤 계보, 칼 뢰비트의 계보에도 이게 나오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팡세》 19. 종교의 기초와 반대에 대한 답변, §275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기를 원하셨다는 것. 만일에 종교가 하나밖에 없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종교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실 것이다. 만일에 우리들의 종교에만 순교자들이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숨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다고 말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교육적인 종교가 아니다. 우리들의 종교는 그 모든 일을 하고 있다. 

《팡세》 27. 기독교 윤리, §384
비참은 절망을 깨닫게 한다. 
오만은 자만심을 깨닫게 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이 그가 필요로 하는 구제책의 중요성에 따라서 인간의 비참도 도한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나는 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 신에 대해서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내가 신 때문에 불안한 것을 원하지 않아 하는 분들은 신이라고 하는 단어에다가 진리라는 단어를 집어넣어도 괜찮다. DEUS ABSCONDITUS를 숨은 신이라고 하지 말고 숨어 있는 진리라고 읽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숨은 신 논변이기보다는 숨어있는 진리 논변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 

다음부터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는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독일 신비주의, 독일 낭만주의 이런 것 저런 것이 아주 굉장히 많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독일 낭만주의를 한번 정리하고 그다음에 괴테 시대라고 하는 것의 사상사를 정리하고 이런 것에 대해서 철학적으로도 한번 정리를 하는 게 필요하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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