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80 제33강(1) 파스칼 《팡세》

 

2024.01.13 문학 고전 강의 — 80 제33강(1) 파스칼 《팡세》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3강(1)

 

 

 

《팡세》의 차례를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도입부가 있고 그다음에 첫째 부분, 둘째 부분. 둘째 부분은 호교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으로 향하는 인간의 발걸음'이다. 파스칼에서는 신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인격적인 신이 아닌 진리 그런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아주 분명하게 기독교적인 신을 이야기하고 유대교와 기독교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데, 《팡세》를 얘기하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되는 것이 '숨어 있는 신' 얘기이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아주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신에서 숨어 있는 신이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파스칼의 신이 기독교적인 의미의 신이 아닐 수도 있다 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것은 과잉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파스칼의 신은 아주 명백하게 기독교의 신이고 그 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 일뿐이지 그것이 독일 관념론에서 말하는 절대적 정신, 독일 관념론이라기보다는 헤겔이다, 셸링도 명백하게 기독교적인 신을 얘기하고 있고 헤겔만이 자신의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것이니까 절대적 정신 같은 것이고 또 그 신도 좀 묘한 것이긴 하다. 그런데 파스칼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아무리 그가 숨어 있는 신을 이야기했다 하더라도, 그 신은 명백하게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신이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신은 다 다르다. 

오늘은 제33강을 읽는다. "신으로부터 멀어져 본성이 타락하게 된 인간", 이건 아주 분명하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모티브를 보여주고 있다. 《고백록》이라고 하는 텍스트는 postype에서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통독」로 연재했던 것처럼 서구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부분은 빠뜨릴 수 없는 텍스트이다. 그리고 《고백록》을 읽어야만 사실은 파스칼의 《팡세》도 온전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조만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한번 읽기는 할 텐데 pagan tradition에서는 아주 좋은 텍스트이다. 저는 거기서 정치철학적인 함의도 찾아보고 있지만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pagan tradition에서 반드시 읽어야 될 텍스트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명상록》이라고 불리는 그 텍스트도 봐야 되겠다.  신으로부터 멀어져 본성이 타락하게 된 인간은 아주 명백하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겠다.  

이제 도입부에서 파스칼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보겠다.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경멸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종교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종교가 사실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한다.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가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존경할 만하다. 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줄 것." 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줄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제이다. 특히나 21세기 한국에서 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줄 것은 정말 굉장히 어려운 과제이다. 진정한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실 우리나라는 종교를 국교를 갖고 있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종교 교육을 할 수가 없다. 그다음에 "종교를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들 것." 존경심과 사랑스러움, 이것을 넘어가는 지점이 굉장히 어렵다. 지난 시간에 말한 것처럼 비굴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그다음에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되는데, 이 경외심이라고 하는 것이 존경심하고 사랑스러움이라고 하는 것이 겹쳐 있는 것이겠다. "선량한 사람들에게 종교가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라도록 만들 것." 그런데 사실 선량한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어서 아주 심하게 착취를 당한다. "존경할 만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인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할 만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진정한 선을 약속해주기 때문이다." 정말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이제 바로 파스칼이 주장하고자 하는 두 가지가 된다. 종교는 인간을 잘 안다. 그다음에 종교는 진정한 선을 약속한다. 그런데 종교가 인간을 잘 안다 라고 할 때 그것이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황당무계한 얘기인 것 같은데 파스칼 이후의 철학자들도 꽤나 종교라고 하는 건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종교의 이성성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당장의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을 읽어봐도 도덕감정과 타산적 계산이 결코 둘이 아니다, 그건 하나로 만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의 시도였다. 계산을 잘 해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이 너에게 결코 손해가 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그 목표였다. 그렇게 본다면 파스칼이 종교에 대해서 시도하고 있는 이것도 그렇게 황당무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그다음에 사랑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하는 것.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타산적 계산하고도 통하는 부분이 있고 사랑스러운 것은 감정적으로 만족하는 그런 지점이다.  그런데 이제 사랑스럽다 라는 것은 참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렵다. 특히나 신은 우리가 피지컬하게 접촉하기 어렵다. 피지컬하게 접촉하기 어려운 신에 대해서 사랑한다고 하려면 수도원에 가서 도를 닦아야 될 것 같다. 

《팡세》 2. 순서, §46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경멸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종교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종교가 사실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한다.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가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존경할 만하다. 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줄 것. 
그리고 나서 종교를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들 것. 즉 선량한 사람들에게 종교가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라도록 만들 것. 그다음에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줄 것. 
존경할 만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인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할 만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진정한 선을 약속해주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진정한 위치에서 떨어져 나와서 자신이 본래 있어야 할 곳을 알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것이 인간의 비참함이다. 그러면 인간의 진정한 위치는 어인가, 신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모티브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고백록》을 잘 읽은 사람은 《팡세》 읽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래서 고전 텍스트는 옛날 것부터 읽어야 된다. 특히나 문학 텍스트들은 호메로스부터 읽어봐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라고 하는 것은 새삼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고백록》 1권 1장 1절에 딱 나와 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신 안에 있는 존재인데 신에서 떨어져 나오면 abs te,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metanoia, 신을 향하고ad te 신 안으로in te 다시 들어가게 된다. 신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는 것은 우리가 신이 아닌 한은 알 수 없고 신을 향한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그래서 별을 향해 간다 alle stelle 그런 것처럼 무엇을 향한다 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꼭 신이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뭔가 참다운 것을 향해서 나아가야 된다. 《팡세》의 목차를 보면 도입부과 1,2이고, 그다음에 13~18이 '신으로 향하는 인간의 발걸음'이다.  이 부분이 이제 신을 향함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신을 향한다 라고 하는 부분과 이 부분이 상응하고, 그다음에 19~28 까지가 신 안에 있는 상태를 회복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팡세》 1. 1658년의 목차 묶음, §19 인간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그의 진정한 위치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그 위치를 되찾지 못한 채 눈에 띄게 방황하고 있다. 그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곳곳에서 불안스럽게 그 위치를 찾고 있으나 성공하지 못한다. 


3~11까지가 첫째 부분이고 그다음에 12가 포르로아얄에서 라고 해서 이어주는 부분, 그러니까 신이라고 하는 존재, 최고 선이 있고, 3에서 11까지 첫째 부분인데 이성적으로 해명하는 부분이다. 12. 포르로아얄에서 부분을 보면 종교라고 하는 건 인간에 대해서 잘 안다, 그리고 존경심을 갖게 한다 라는 얘기가 있다. "인간의 위대와 비참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에 참 종교는 반드시 우리들에게 인간 속에는 위대성의 어떤 대원리가 존재하며 동시에 비참의 대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 종교는 우리들에게 이 놀라운 모순들의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만 한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위대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하다. 위대한 것과 비참함이 공존한다는 말이다. 모순이 공존하고 있다. 동시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인간은 모순성 즉 동시에 위대하면서도 동시에 비참하다. 파스칼이 생각하는 인간 존재는 그런 것이다. 위대하면서도 동시에 비참하다. 그러면 위대한 국면도 있고 비참한 국면도 있는 인간 존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이라는 얘기이다. 신 안에서 행복하다 이런 얘기들, 사실 저는 별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까지 추구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그냥 내 손에 닿아 오는 따스한 어떤 것, 그런 것들을 가끔이라도 만질 수 있으면 또는 코로 들이마실 수 있으면 그런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팡세》 12. 포르로아얄에서, §182 인간의 위대와 비참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에 참 종교는 반드시 우리들에게 인간 속에는 위대성의 어떤 대원리가 존재하며 동시에 비참의 대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 종교는 우리들에게 이 놀라운 모순들의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만 한다. 


《팡세》를 읽으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또 어이없고 그런 것들, 남이 그렇게 써놓은 걸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나 자신에게 위로가 되어버린다. 인간은 위대하면서도 동시에 비참하다. 그다음에 인간의 조건은 변덕과 권태와 불안이다. 외부의 상황 때문에 내면의 일관성이 상실된 상태가 변덕이고 비일관성이다. 비일관성의 원인은 뚜렷하게 보이지만 불안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는 것이고, 그리고 그저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불안이다. 이 세 가지가 인간 내면의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인간은 내면의 상황 때문에 진리도 선도 소유할 능력이 없고 그리고 외부의 상황 때문에 내면이 어수선하고 불안한 상태가 있고 그래서 파스칼은 "은총 없이는 지울 수 없는, 천성적인 오류로 가득 찬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은총이 있어야만 타고난 오류를 지울 수 있는데, 글쎄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은총은 기대하지 말기로 하고 천성적인 오류로 가득 찬 상태이고 이런 게 다 사적인 욕망 또는 이제 사악한 욕망과 힘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된다고 하겠다. 파스칼은 여기서 힘이라고 하는 것을 가져다가, 보통 그 철학자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적극적이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악한 욕망은 편집자가 《고백록》을 출처로 하는 주석을 붙이고 있듯이 있는 것처럼 정욕 concupiscentia 부분이다. 이 부분은 다음 주 화요일에 읽는다.  일단 오늘은 인간이 변덕과 권태와 불안 그리고 진리도 선도 소유할 능력이 없고 천성적인 오류로 가득 찬 존재다 하는 부분까지 읽은 걸로 하겠다. 

《팡세》 3. 허무, §62 우리는 진리도 선도 소유할 능력이 없다.

《팡세》 3. 허무, §178 인간은 은총 없이는 지울 수 없는, 천성적인 오류로 가득 찬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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