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81 제33강(2) 파스칼 《팡세》

 

2024.01.16 문학 고전 강의 — 81 제33강(2) 파스칼 《팡세》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3강(2)

“당신으로부터 오는, 당신을 향한, 당신을 위한 기쁨”(gaudere de te, ad te, propter te)

 

 

《문학 고전강의》 파스칼의 《팡세》를 다루고 있는 제33강 두 번째 시간이다. 신으로부터 멀어져 본성이 타락하게 된 인간. 왜 신으로부터 멀어져 본성이 타락하게 되었는가. 사실 본성은 원래 타락하지 않았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신 안에 있는 존재니까 본성상 인간은 타락되지 않은 존재이다. 멀어지면 이제 타락이고 사욕邪慾, 삿된 욕망, concupiscentia이다. 《고백록》을 먼저 보면 2권 2장 2절에 "사랑을 주고받는 것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때 밝은 우정의 길, 즉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진정한 우정의 한도(사랑의 질서)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한도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질서라고 되어있는데, 한도는 넘어가면 안 되는 선이다. 넘어가면 안 되는 선은 적절함metrion이다. 균형均衡을 잡는다고 할 때 저울 형衡, 형평성衡平性 할 때도 그 형衡을 쓰고 형벌刑罰을 내린다 할 때는 형刑이다. 한도라고 하는 말과 그 다음에 적절함이라는 뜻의 metrion이라는 말을 한 글자로 옮긴다고 하면 형衡이다. 저울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인 건 아니다.  '지금 배가 고프니까 밥을 몇 그램 더 먹어야겠어'라고 하면 배가 고픈 것과 내가 먹는 음식 사이에 균형을 잡아서 먹어야 된다. 배가 많이 안 고프면 적게 먹고 배가 많이 고프면 많이 먹고 배가 많이 고프더라도 몸 상태를 봐서 지금은 허겁지겁 먹었다가 크게 병들 것 같다 그러면 좀 적게 먹고 이렇게 그때그때 맞춰가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라고 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게 있고 그것을 이제 찾아내는 것이 어려운데 그것을 찾는 행위가 무엇인가. 신은 절대적 존재다, 절대선이 있다 라고 말할 때 신은 사실은 그렇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적절함을 변함없이, 그 행위에 변함없음이 있는 것이지 기준에 변함없음이 있는 게 아니다. 기준은 불변하지 않고 신은 항상 언제나 그렇게 하리라는 어떤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신이 아니니까 그 적절함을 찾아낸다고 하는 것이 탐색search, 밝혀 보이는 것, illumination이라고 한다. 빛을 비춘다, 조명照明이라고 말할 때 照.  그러니까 적절함(衡)을 찾는다(照)라는 말이 되겠다. 적절함을 찾는다. 사실 신은 항상 적절함을 찾는다. 우리는 항상 모자라고 엉망이다. 항상 엉망이기 때문에 적절함을 잘 못찾는다. 그래서 적절함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고백록》을 읽어야 된다.  

인간은 지켜야 될 선, 한도가 있다. 군대에서는 지켜야 될 선이 많다. 말 그대로 norm, nomos이다.  nomos는 metrion보다도 아래에 있는 것, 범주의 그 크기를 보면 metrion 안에 nomos가 있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이라고 하는 것, concupiscentia을 넘어가버리면, 사실 이게 없으면 생명 활동 자체가 없다. 공부를 해야겠다라는 마음도 사실은 이런 데서 나오는 건데, 이 선을 넘어가면 정욕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순화하면 dilectio가 된다. 똑같은 원천이 있는 것이다. 물이 흐르고 있는데 그 물에서 흙탕물이 흐르고 있는데 흙탕물을 필터링을 하면 마실 수도 있는 맑은 물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다. dilectio는 '분별 있는 사랑'에 가까운 의미를 갖는 말이다. dilectio라고 하는 것은 바로 metrion에 의해서 걸러진 사랑이다. 파스칼의 유명한 명제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이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이래도 생각 저래도 생각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은 metrion을 모르지 않는다. metrion을 알고 있는데 이 metrion을 적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끊임없이 고민을 하고, concupiscentia를 어떻게 하면 dilectio로 보낼 것인가도 안다. 생각하는 갈대라고 할 때 인간은 갈대인 건 맞는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좀 멋지게 표현하면 illuminatio, 계속 비춰보는 것이다. 생각이라고 하는 건 액션을 하고 있는 나하고 액션하고 있는 나를 지켜보는 나가 있는데 그 지켜보는 나가 바로 이제 illuminatio,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에 의해서 우주는 나를 포함한다. 그리고 나를 하나의 점인 것처럼 삼켜버린다. 그러나 나는 사고에 의해서 우주를 포함한다." 파스칼에 의해서 인간은 우주보다 위대하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밑밥을 깐다.  

인간 존재의 위대함이라고 하는 것이 물리적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하찮은 것인데, 《팡세》 7권을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비참하면서 동시에 위대한, 서로 모순이다. 내가 이렇게 끊임없이 metrion을 찾아서, 적절함을 찾아서, 균형점을 찾아서, 끊임없이 뭔가에 빛을 비춰야 되고, 여기다 빛을 비춰보고 저기다 빛을 비춰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비참하다. 귀찮고 힘들다. 그런데 신의 은총이라고 하는 것도 신이 우리에게 딱 줘서 내재해 있는 것, 강아지들 안에 칩을 심듯이 이렇게 심어지는 것은 아니다. 탐색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신의 은총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metrion을 찾아가는데, metrion이 있다는 건 인정하고, 어떤 식으로 illumination을 할 것인가에 따라서 세 가지 학파, 참다운 진리를 알고 있는 신학자theologian인 파스칼은 세 가지 학파, 즉 쾌락주의자, 자연학자, 스토아주의자 이 세 사람들을 비난을 하는데 사실은 신학자도 똑같다. 신학자도 다르지 않다. 신학자들도 쾌락주의자나 자연학자나 스토아주의자와 마찬가지의 처지에 있다. 쾌락주의자, 에피크로스주의자들은 정신적 평정에 이르는 것이 쾌락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신학자나 쾌락주의자나 자연학자나 스토아주의자나 모두 다 metrion을 찾아야 인간이 행복해진다 라는 것에 동의한 사람들인데 방법method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metrion을 찾아야 한다. 즉 metrion을 비춰봐야 된다는 것에는 모두 다 동의한다. 그게 진리이다. 진짜로authentic 진리인 것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정신적 평정에 이르는 것이 쾌락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적 평정이라고 하는 것, 평정심 metrion, 고요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쾌락이다. 그다음에 자연학자들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세상의 물리적 위치를 탐구한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우주에는 섭리가 관찰되어 있으며,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통해서 그 섭리를 알 수 있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허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다. 모두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신학자들은 알 수 없다 라고 생각을 하겠다. 신학자들도 신을 믿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는 거 아니겠는가. 신학자들은 고백을 한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신만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다 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신에게 당신으로부터 오는, 당신을 향한, 당신을 위한 기쁨 gaudere de te, ad te, propter te이 나의 행복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기쁨과 희망 Gaudium et Spes [1965년 12월 7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반포한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의 라틴어 제목],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신만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신학자인데 그렇다고 해서 당신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오늘은 제33강을 마무리를 하고 다음에는 "《성서》를 통해 다시 신에게로 향하는 속죄자 인간"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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