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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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30 문학 고전 강의 — 85 제35강(3) 괴테 《파우스트》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5강(3)
《문학 고전 강의》 제35강 괴테 《파우스트》를 읽기에 앞서서 지난주에 두 번에 걸쳐서 이른바 근대의 인문주의라고 알려져 있는 것, 즉 이탈리아의 후마니타스, 페트라르카에서 시작된 인문주의와 도이치 신인문주의, 정확하게 표현을 하면 똑같은 인문주의인 것 같아도 이탈리아에서 참조한 것은 로마의 고전 텍스트라면 빈켈만이 참조한 것은 헬라스의 고전 텍스트이다. 그래서 도이치의 신인문주의는 신헬레니즘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문주의에 이어 고전과 낭만, 즉 클래식Klassik과 로만틱Romantik이라고 하는 대립 구도를 말했다. 고전과 낭만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시기의 문예사조라든가 또는 예술사조라든가 또는 사상사조라든가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생각의 프레임, 생각의 틀이다. 플라톤 같은 사람이 전형적인 클래식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완결된 그것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본paradeigma이 있고 그 본을 모방하는 것이 이 우주의 현상들 그리고 우리 인간이다. 그게 바로 예술에도 적용이 되면 고전예술이 된다. 그래서 그런 고전 예술은 반드시 이탈리아 15세기 즉 Quattrocento의 고전 예술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원근법, 그런 비례의 이상을 표현하는 화법, 즉 기술은 여러 가지 종류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그것에 비해서 로만틱은 역동적이고 혁신적이며 결여된 것이고 미완성이고 그에 따라서 아직도 생성 중에 있는 것이다. 물론 도이치 로만틱은 그것에 조금 고유한 방식이 하나의 삶의 정서라고 말할 수 있는, 니콜라이 하르트만이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고유한 방식의 삶의 정서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문제로 삼는다 하면 낭만주의적인, 즉 낭만주의라기보다는 낭만적이라고 하는 게 더 적당하다. 낭만주의라고까지 말하면서 뭔가를 추구할 만한 공통적으로, 공통적으로 있는 것은 있는데 그것이 하나의 이념으로까지 내세울 만한 그런 것은 없을 때 그런 것을 낭만주의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그런 것을 보면 광범위한 문예철학 운동, 슐레겔 형제, 청년 헤겔, 슐라이어마흐, 쉘링, 횔덜린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거론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도 물론 하위 단위로 들어가면 여러 종류의 갈래가 있게 된다. 그중에서도 어떻게 보면 가장 클래식에 가까운 사람이다 하면 프리드리히 실러,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이다. 슐레겔의 《헬라스 시 연구에 관하여》도 그쪽에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낭만적인 것, 로만틱을 강조하면 횔덜린 같은 사람이 된다. 계속 갈망하는 사람 또는 노발리스처럼 신비주의적인 통일을 원하게 된다. 신비주의적인 통일을 원한다 라고 하는 게, 통일을 원하는데 왜 낭만인가, 그 통일로 가는 길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각자 알아서 가야 된다. 이런 부분들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사실 나타난다. 클래식과 로만틱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괴테를 읽는 데도 필요하지만 청년 헤겔이 로만틱이라고 말했다. 청년 헤겔의 마지막 저작, 즉 헤겔 청년기의 마지막에 나온 저작이 《정신 현상학》이다. 《정신 현상학》이라고 하는 건 로만틱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저작이다. 그런데 조금 헤겔은 로만틱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했다. 생각해 보자. 나는 낭만적인 사람이야 라고 할 때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너와 나는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해진다. 낭만적인 사람과는 우리 대화할 수 없다. 그 사람은 궁극적으로는 천재가 되는 것이다. 분열되고 파편화된 정신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니까 남에게 그걸 전달할 수가 없다. 그런 것은 비밀스럽게 전달되고 있으니 비의적esoteric이라고 한다. 그런 것들을 낭만적이라고 말하는데 헤겔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철학이라고 하는 게 본래 그렇게 비밀스러운 어떤 그런 것만인가, 그건 아니라고 헤겔은 생각을 했다. 공적으로 가르쳐질 수 있는, 즉 exoteric한 것이다. 그런데 낭만주의자들을 궁극적으로 밀고 들어가면 신비주의가 되니까 그건 비밀스러운 ritual이 있는 esoteric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신현상학》에서자신이 보기에 튀빙겐 대학 동창인 《휘페리온》을 쓴 횔덜린이나 셸링 모두 헤겔의 동창이다, 이 사람들을 보니까 쉘링이 그쪽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분별지가 없이 무작정 신비주의적인 통일을 추구하는 것은 못하겠다 하면서 셸링을 거기서 비난한다. 그래서 셸링하고 갈라지게 된다. 셸링은 사실 천재이다. 철학계에서 가장 낭만적 천재를 한 사람만 들어봐라 하면 셸링이다.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그런 번뜩번뜩한 게 있다. 그래서 셸링의 초월철학을 읽어보면, 초월론적 철학(칸트)이 아니라 초월철학이다, 이 사람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따라하기는 쉽지 않은, 그게 낭만적인 것이다. 그게 끝까지 가면 노발리스 같은 사람, 《기독교적인 세계 또는 유럽 Christenheit oder Europa》으로 간다. 그래서 노발리스나 이런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이 낭만주의자들의 유럽Europa Christiana이라는 것이 된다. 반혁명적이고 낭만적인 유럽, 이 사람들이 말하는 유럽은 어찌 보면 극우파의 유럽이다. 그게 참 아이러니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르네상스로부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이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페트라르카처럼 로마 시대의 텍스트 읽고 또는 피치노 이런 사람들처럼 기독교적인 정신 속에서 플라톤을 읽는다고 하면 피치노의 《향연》과 같은 텍스트가 나온다. 그런 것을 읽어서 이 사람들은 고요하게 관조하고자 하는, 결국 세네카적인 어떤 이상을 향해 가고자 하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이 하나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아주 강조한 사람인 마키아벨리, 즉 인공물로서의 국가, 참고로 예전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에 대해서 강의하면서 말한 바 있듯이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하는 단어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한 역사파악의 범주가 아니다. 이제는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말은 잘 안 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적 인간은 진정으로 고대를 회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분열만을 일삼았을 뿐이다.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과 활동하는 삶vita activa이 분열 아닌가 해서 도이치 고전주의자들은 진정한 헬라스의 계승자로서 자기네들이 진정한 인문주의자로서 고전적 도야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제 고요히 앉아서 책만 읽고 《그리스 미술 모방론》처럼 헬라스의 미술품을 감상하고 그러면 좋은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이들도 이미 로만틱의 습격을 받은 상태가 되어 있다. 그래서 도이치 낭만주의자들과 이들이 교류하는 가운데서 경건주의라고 하는 것을 들여오게 된다. 즉 경건주의 목사들에서 발견되는 삶의 태도, 내면의 절제와 경건한 도야, 이것이 고전적 도야와 결합이 되어서, 스코틀랜드에서 들어온 개념인 세련됨refinement, 이것은 《철학 고전 강의》에서 칸트를 강의하기 전에 설명해 놓은 게 있는데 한번 참조해 보면 된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경건하고 절제된 상태로 나아가는 것, 그러면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키는 것, 감성주의 문학의 도야라고 하는 것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그러면 괴테라고 하는 이 사람이 등장했을 때 고전주의이기도 하고 낭만주의이기도 한 그런 상황이 바로 괴테의 상황이다. 지난 시간에까지 한 얘기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것을 전제로 하고 《문학 고전 강의》 제35강 349페이지부터 한번 읽어보겠다. 둘째 문단을 보면 “우선 독일 낭만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가 읽는 번역본 해설에 나와 있는 설명을 보면 이렇습니다. 제1부의 파우스트는 우주 본질에 대한 인식과 육감적인 욕망이나 사랑의 영역을 누비며 살아간다. 이 사건들은,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경험하고 머릿속에서나마 별 어려움 없이 체험할 수 있는 노력과 사상의 한도 내에서 전개된다. <비극 제2부>는 개인 생활의 영역을 뛰어넘어, 인간 정신이 종교와 철학, 학문과 예술, 국가와 문학생활 속에 정립한 보다 심오하고 포괄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상승된다." 이 설명은 정확하다. 첫째는 제1부 영역이 개인의 삶의 영역이라면 제2부에서 다루는 주제는 종교와 철학, 학문과 예술, 국가, 문학 등에서 세운 가치의 영역이다. 그러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파우스트》라고 하는 작품은 개개인에 대해서 다룬다. 비록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들인 《오셀로》나 《리어왕》을 보면 권력을 다루지만 그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권력의 작동 측면을 다루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런 걸 보고 싶으면 셰익스피어의 역사드라마인 《리처드 2세》를 보는 게 낫다. 셰익스피어의 역사드라마는 객관적인 상태, 즉 레짐, 정치 체제에 대해서 다루다가 비극으로 넘어오면 내면으로 파고들어 가게 된다. 그런데 《파우스트》는 각각 개인의 삶에 대해서 다루다가 제2부에 가면 종교와 철학, 학문과 예술, 국가와 문학생활, 문학생활이라는 게 예술을 말한다. 그러면 이제 가장 높은 차원의 문화적 실현태인 종교와 철학까지도 다루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걸쳐 있는 전 영역을 다루는 것이다. 고전주의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에서도 그런 것들을 논의의 범위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18세기~19세기 독일에서 전개된 광범위한 문예 철학 운동의 주요한 주제이다. 그러니까 안 다루는 게 없다. 어떤 사조를 파악하는 두 개의 프레임이 클래식과 로만틱인데 클래식도 하고 로만틱도 한다고 하면 다 하는 것이다.
제35강 349 우선 독일 낭만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가 읽는 번역본 해설에 나와 있는 설명을 보면 이렇습니다. "제1부의 파우스트는 우주 본질에 대한 인식과 육감적인 욕망이나 사랑의 영역을 누비며 살아간다. 이 사건들은,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경험하고 머릿속에서나마 별 어려움 없이 체험할 수 있는 노력과 사상의 한도 내에서 전개된다. <비극 제2부>는 개인 생활의 영역을 뛰어넘어, 인간 정신이 종교와 철학, 학문과 예술, 국가와 문학생활 속에 정립한 보다 심오하고 포괄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상승된다."
슐레겔 형제, 청년 헤겔, 슐라이어마흐, 셸링, 횔덜란, 프리드리히 실러 이런 사람들을 있는데 이념을 가장 잘 집약한 것은 실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을 위한 서한》이다. 낭만주의가 다루는 것은 방법도 방법이지만 앞에서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다루는 것, 사적인 삶의 영역에서 시작하여 사회와 국가 생활을 거쳐서 학문과 예술을 거치고 철학과 신적인 영역까지 편력하는 인간인데, 이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 이런 것들이 사실 중요하다. 앞서 말했듯이 셸링은 무자비한 통일을 얘기하는 것이고, 헤겔은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생각을 해봐야 된다는 얘기이다. 그러면 근대 독일 낭만주의는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분열Entzweiung의 상태에 있고 소외Entfremdung의 상태에 있다. 신과 인간의 분리, 자연과 인간의 분리, 인간과 인간의 분리. 우리는 파스칼에서 읽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상태, 이것도 신과 인간의 분리이다. ad te를 해야 되는데 abs te 상태가 되어 있다. 신을 향해야 되는데 신으로부터 벗어난 상태. 그러면 이제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통일을 시킬 것인가. 파스칼은 복음서의 방법이라는 것을 내놓고 DEUS ABSCONDITUS, 알 수 없는 신, 신은 숨어 있다, <욥기>에 나오는 방식이기도 하다. 신의 뜻은 알 수 없다고 욥도 얘기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그러면 아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뭐 있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고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보겠다 그런 사람은 초인Übermensch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우리는 에이해브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분열이라고 하는 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언제나 있기 마련인 이 분열을 우리는 통일하는 방법론이 있다. 어떤 식으로 통일을 할 것인가, 가장 좋은 방법은 없다. 각자 각자 그때그때 알아서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처님의 방식으로 한다고 하면 입을 다물고 생각을 멈추면 된다. 그것이 해탈 아니겠는가. 모든 게 다 우리 인간이 내놓는 것이고 작위적인 것에 불과하니까 입 다물고 생각을 멈추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또는 무의자연과 같은 도가적 방식도 있고 범신론,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그러다 보니까 자연 속에는 신이 스며들어와 있고 그러면 신과 하나가 되고 그래서 유한자와 무한자가 하나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신이 되는 것, 이런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팡세》에 나오는 것, <욥기>에 나오는 것은 신과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가 없다, 그럴 때는 신에게 철저하게 복종을 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철저하게 복종해서 제거해버리는 그런 생각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인간과 인간끼리도 서로 합치하기가 어려운데 그게 가능하겠는가. 자기 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합치하기가 어렵다. 그냥 입다물고 사는 게 제일 좋다. 이건 남 얘기가 아니라 제가 그렇다는 얘기이다.
지금 《파우스트》는 워낙 범위가 넓다 보니까 클래식한 것도 있고 로만틱한 것도 있는데, 클래식한 것만 담고 있는 게 아니라 로만틱한 것도 담고 있으므로 저는 《파우스트》를 낭만주의 작품으로 읽는 것이 《파우스트》를 읽기에 가장 좋은 안전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토요일에는 《문학 고전 강의》 352페이지부터, 《파우스트》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부분부터 다시 들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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