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87 제35강(5) 괴테 《파우스트》

 

2024.02.06 문학 고전 강의 — 87 제35강(5) 괴테 《파우스트》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5강(5)

 

 

오늘은 《문학 고전 강의》 제35강을 마저 다 읽겠다. 제35강은 도이치 고전주의 그리고 도이치 낭만주의에 대해서 설명을 하다 보니까 자잘하게 설명해야 될 것들이 많아서 벌써 다섯 번째이다. 한 챕터를 이렇게 오래 읽는 것이 어떠한가. 이렇게 읽어서 얼마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쓸모가 있는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텍스트 하나 읽어가지고 이해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학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알 수 있으면 좋으니까 그렇다.  

책 355페이지에서 야훼가 사탄에게 물었던 부분을 여기에서 생각하는데, 주님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대화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한다. "진정! 그 자는 당신을 독특하게 당신을 섬기고 있지요. / 그 바보가 마시고 먹는 것은 지상의 것이 아닌가 싶소이다. / 부글거리는 마음이 그 자를 먼 곳으로 몰아가곤 하는데, / 그도 자신의 바보짓을 반쯤은 의식하고 있지요." 텍스트 읽을 때 이런 단어들이 나오면 민감하게 조금 반응을 해야 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지상의 것"과 같은 얘기들이다. 이런 것이 나오면 거의 상투적으로 사용한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가 일상의 대화를 하면서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지 않고 상투적으로 특정한 사태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들이 있다. 모든 작가들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작가들이라고 해서 모든 단어를 다 곰곰이 생각해보고 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이렇게 하나의 일종의 대위법을 만들어서 서로 대립되는 개념상들을 사용한다. binary라고 불리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들, 지상의 것과 천상의 것 이런 것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부글거리는 마음이 그 자를 먼 곳으로 몰아가곤 하는데", 부글거리는 마음, 현대 우리들이 사용하는 속된 말로는 열받은 마음이 그러는데, 여기서 괴테는 부글거리는 마음이라고 했다. 이런 걸 이제 봐야 된다. "최고의 인식과 진리를 향한 내면의 내면적 충동"을 의미한다. 충동이라는 단어 나왔으니까 중요하다. "먼 곳으로"(in die Ferne) 몰아가곤 하는데 먼 곳이라고 번역어 되어 있다. in die Ferne, 먼 곳보다는 낯선 곳, 조금 뉘앙스는 다르다. 먼 곳은 자기가 도달할 수 없지만, 그래도 도달할지 아닐지를 알 수 없지만 가고자 하는 곳, 진리가 있는 곳이 먼 곳이다. 머나 먼 길. 낯선 곳은 그 내면의 당혹감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표현일테고, 먼 곳은 당혹감은 아니고 알고 있지만 먼 곳일 수 있다.  

《파우스트》 300~303행
메피스토펠레스: 진정! 그 자는 당신을 독특하게 당신을 섬기고 있지요. 
그 바보가 마시고 먹는 것은 지상의 것이 아닌가 싶소이다. 
부글거리는 마음이 그 자를 먼 곳으로 몰아가곤 하는데, 
그도 자신의 바보짓을 반쯤은 의식하고 있지요.

가령 제가 요즘에 좀 가보고 싶은 곳이 조지아 이런 곳인데 먼 곳인데 알고는 있다. 물론 이제 가보면 내가 안 게 헛된 것이었구나 잘못 알았구나 그럴 수도 있는데, 낯선 곳이지만 그것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으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으니까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 1800년대 중반 이후로 지상 세계에서 먼 곳과 낯선 곳들이 나온다. 아직 《파우스트》에서는 그것까지는 아니다. 여기서 먼 곳은 천상을 가리킬 것이다. 19세기가 들어서면서부터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그 당시 사람이니까, 이런 사람들이 남아메리카 여행도 하고 인문지리학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한데, 그 사람들은 이제 낯선 곳을 가서 뭔가 알아내서 그것이 멀고 낯선 곳이지만, 먼 곳이긴 한데 낯설지는 않은 곳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열정들이 있었다. 훔볼트도 그런 점에서는 먼 곳으로 가고자 하는 곳이 동경Sehnsucht인데 이런 낭만주의적 충동에 의해서 움직여 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사실은 제국주의적 침탈과 결합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낯선 곳과는 다르다.  우리가 위치를 알고 있고 노력하여 이를 수 있는데, 낯선 곳은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 해도 낯선 곳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참 낯설 수 있고 그렇다. 낯설다 라는 것과 멀다 라는 것의 구별. 그런데 여기서 파우스트의 Sehnsucht는 불경한 것이 아니다. 신이 보기에 진리를 탐구하려고 하는구나 하고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가 지금은 혼미한 가운데 나를 섬긴다 할지라도, / 머지 않아 나는 그를 명료한 곳으로 인도할 것이로다. / 마치 정원사가 작은 나무가 푸르러질 때, / 머지 않아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것임을 아는 것과 같으니라." 이런 비유들이 좋다. 작은 나무가 푸르러질 때, 머지 않아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것임을 아는 것과 같다. 누가 아는가, 정원사가 안다. 정원사는 이것이 때가 되면 어떻게 어될 거라는 걸 안다는 것이다. 그게 이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건 패턴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료한 곳" 이런 단어들 나오면 후딱 알아차려야 된다. 명료한 것, 모든 것이 투명하게transparent 보이는 것.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이고 그게 바로 진리를 관조할 수 있다. 그 길을 이미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가봤어도 모를 수 있다. 가본 사람은 안다는 것도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

《파우스트》 308~311행
주님: 그가 지금은 혼미한 가운데 나를 섬긴다 할지라도,
머지 않아 나는 그를 명료한 곳으로 인도할 것이로다.
마치 정원사가 작은 나무가 푸르러질 때,
머지 않아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것임을 아는 것과 같으니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 《파우스트》 317행인데 저는 아주 이 행을 좋아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방황하기 싫어서 노력을 안 한다? '해봤자 힘만 들어, 그냥 가만히 있을래'라고 하면 그것은 멈춰 있는 것이고, 멈춰 있다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의 시간이 헛되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모든 순간순간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자각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좀 챙겨서 보는 맛은 있어야 된다. 방황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노력이라고 하는, 분투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인지 아닌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애초에 노력 자체를 하지 않으면 방황도 없고 노력을 하기 때문에 방황하는 것이고, 방황하고 가는 과정이 바로 인간의 길이다. 노력하는 한, 진리를 열망하는 한, 노력을 해도 어떤 방향으로 노력해야 될지가 중요한 것 같다. 양scalar은 있는데 방향vector이 잘못되어버리면 이상한 곳으로 가게 된다. 애초에 제1 전제인 출발점 자체가 방향이 잘못되어버리면 참 그렇다.  

《파우스트》 308~311행
주님: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

그러니까 방황하고 가는 과정이 인간의 길인데 주님은 여기서 또 그렇게 말을 한다. "선한 인간이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 올바른 길을 잘 알고 있다고 말이다." 올바른 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파우스트》의 주님은 참 순진하기도 하셔라 라는 생각이 오늘 《문학 고전 강의》 해설하려고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대인들은, 지금 근대인이라고 말한 건 특정한 시대가 아니라 하나의 그 인간을 파악하는 또는 시대를 파악하는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 근대이다, 인간이 절대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와버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그 두려움을 끊임없이 느끼고 있고 《팡세》에서도 그런 것이 느껴졌다. 절대 진리를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까지 가지고 있고 그래서 마지막에 성모의 도움을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는 《파우스트》는 굉장히 경경한, 경건주의라고 말하기는 그렇고 독실한 텍스트이다. 그것이 없다면 일종의 신비적 자연주의로 끝날 것인데 가톨릭 전통의 성모를 얘기했으니까 신비적 자연주의 끝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단테 《신곡》의 모티브도 여기 있다. 사실 성모를 말하기는 좀 곤란하니까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제시한 게 아닐까 한다.  

《파우스트》 329~329행
주님:  선한 인간이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올바른 길을 잘 알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 다음에 《파우스트》의 마지막을 보면 12104~12111행까지가 '신비의 합창', 이게 《파우스트》의 주제이다.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데, 그 방황이 결국 신비의 합창으로 귀결된다고 하는 것이다. 괴테는 그런 점에서 기독교 전통을 도이치 방식으로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그러면 괴테는 진정한 기독교도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교도인가, 누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인가, 누가 진정한 무엇인가. 사람은 방황할 것을 알면서도 노력을 해 나가는 것이고, 방향이 잘못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이 그들에게는 진정성이 있는 것이다. 신비의 합창에 나온 것처럼 "일체의 무상한 것은 / 한낱 비유일 따름이다."  인간사라는 것은 비유, 비유라는 건 모사물이다. 지나간 것이고 닮은 것일 뿐이다. 진정한 것이 아니고 완전하지 못한 일이다. "완전치 못한 일들도, / 여기서는 실제 사건이 된다. / 형언할 수 없는 것들도, / 여기에서는 이루어진다. /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 우리를 이끌어가는도다." 이런 것을 읽을 때는 처음에 말한 것처럼 어떤 것들 두 개가 대비되고 있는 것, 무엇이 대비되고 있는가. 완전치 못한 일, 형언할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이 실제 사건, 이루어진 것 이런 것. 천상과 지상 이런 것들을 대비들을 찾아서 보는 것, 그게 문학 고전 텍스트뿐만 아니라 철학 텍스트도 그렇고 읽는데 핵심적인 중점이 된다.  

《파우스트》12104~12111행
신비의 합창: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따름이다.
완전치 못한 일들도, 
여기서는 실제 사건이 된다. 
형언할 수 없는 것들도, 
여기에서는 이루어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가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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